치명적인 모성애 중독
모성애라는 치명적 오류를 어느 책에선가 본 적이 있다.
이미 어머니가 자식을 위한 희생은 의무가 아닌 선택적 도리로 남겨졌는데
세상의 곳곳에서 모성적 희생을 말한다.
모성애!
어머니의 심리에 채우는 족쇠는 서로에게 부담과 서운함을 준다.
최근 동치미라는 프로그램에서 참여한 마담들은
어느 순간 자신이 엄마가 되어있더라.
자신의 어머니가 강남에 아파트를 사주고 무한대의 사랑을 베풀었다.
하지만 정작 어머니는 양은냄비가 닳도록 사용하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구순을 넘기셨다.
그 희생정신, 모성애가 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더란다.
퇴임하고 귀농한 정한용 씨는
자식에게 뭔가를 바라지 마라. 자식은 태어나서 다섯 살 때까지 모든 효도를 다했다.
유명 트레이너는 너무도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많은 고생을 했다.
자신이 차라리 고아였더라면 고생을 덜 했으리라는 생각을 했었다고 말했다.
최근 그가 헬스 사업을 시작하자마자 코로나라는 인류의 변수가 닥쳤다.
그의 어머니가 계속 사업에 대해서 물었다.
어머니가 사업에 대해 물을 때마다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 힘들었다.
어머니가 또 묻자 "해준 것도 없으면서, 왜 묻냐"고 버럭 화를 냈다고 한다.
어머니는 눈물을 닦으며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셨다.
그 다음 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가 어머니에게 버럭 화른 낸 것은 평생의 후회로 남았다고 한다.
트레이너의 어머니는 걱정이 되어 자식에게 계속 물었을 것이다.
인류가 채운 모성애라는 족쇠가 죄책감을 지속적으로 느끼게 했을 것이다.
새끼의 생존을 위해서 모든 생명체는 본능적으로
새끼를 보호하고 키운다.
이것은 본능이고 의무이고 법이다.
그래서 우리 민법은 자식을 양육하는 것은 의무로 정했지만
부모 봉양은 의무가 아니다.
그렇다고 양육과 지속적인 헌신은 분명히 다르다.
어린 생명인 자식을 양육하는 것까지 부모의 의무이다.
그 자식이 스스로 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키우는 것이 중요하고
그 시기가 되면 과감하게 모성애의 족쇠를 벗어야 한다.
그래야 그 자식도 자기 자식을 그렇게 키울 것이다.
이제야 역발상을 하자면,
내 엄마는 모성애를 인류애로 승화한 분이셨다.
내가 주민등록증을 하러 본적지로 갔을 때, 엄마가 마중을 나와 계셨다.
면사무소와 고향 집은 거의 1시간 가량 소요되는 먼 곳이었다.
엄마한테는 그날 면사무소에 간다는 일정을 알리지 않았었지만
친구들로부터 들으셨다고 한다.
면사무소에서 친구들의 얼굴만 보고 당일에 마지막 열차를 타고 돌아올 요량이었다.
논일을 하다가 나를 보러나온 엄마의 팔과 다리에는 흙이 범벅이었다.
엄마는 터미널에서 나에게 짜장면을 사주셨다.
엄마가 300짜리 짜장면을 한 그릇만 시킨 것을 보고, 마구 화를 냈다.
한 젓가락 먹고, 젓가락을 내려놨다.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가 남긴 짜장면을 대신 드셨다.
내가 화를 내던가말던가 전혀 동요하지 않고, 묵묵히 혼자서 그 먼길을 되돌아가셨다.
친구들과 재미나게 놀다 가라는 말을 남기고 되돌아가셨다.
나의 손을 잡거나, 눈물을 글썽이거나, 어떻게 사냐고 묻지 않으셨다.
나는 엄마의 쓸쓸하지 않고 묵묵한 뒷 모습,
엄마의 서운하지 않고 당연한 뒷 모습,
엄마의 특별하지 않고 일상적인 뒷 모습,
많이 반가워하지도 않고, 아쉬워하지도 않는 뒷 모습,
인정스럽지도 무정하지도 않는 뒷 모습이 엄마의 나이가 되어서 다시 떠올랐다.
엄마가 나에게 사준 짜장면은 꼭 딸에게만 해 줄 수 있는 한끼가 아니라
배 고픈 누구에게라도 할 수 있는 인류애였다.
나의 딸이 부산에 왔다가 집에 들르지 않고 바쁘게 서울로 돌아간 그날 밤에
엄마의 그 뒷모습이 나를 가르쳤다.
엄마의 그 뒷모습이 보고픔, 아쉬움, 미안함 등의 족쇠를 풀어주었다.
자식과 엄마는 서운하지 않은 관계다.
엄마는 인정스럽지도 무정하지도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
모성애는 인류애로 바뀌어야 한다.
짜장면을 한 그릇밖에 시킬 수 없는 형편은 엄마의 죄가 아니다.
엄마의 운명이고 엄마의 형편이었다.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존중받아야 할 엄마의 역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