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조카를 사랑한 남자 1화
-해안시의 팔도미인 복지사 선우휘
따뜻하고 밝은 복지로 대통령상을 수상하다- 해안신문
팔성은 첫 휴가 장소를 외갓집으로 정했다.
군대 생활을 하며, 동갑내기 외사촌 선우휘가 불현듯 생각났었던 이유가 의식화되었다.
해안신문에 등장한 선우휘는 분명히 외사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군대 생활은 하루가 잘 지나가도 불안하고, 소란스러워도 불안했다.
다른 동기들보다 유독 더 불안해서 안절부절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변호할 과거의 증거가 필요했다.
그런데 이 불안스러움은 언제인가 경험했던 불안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팔성이가 군대에서 경험한 불안은 어린 시절에 선우휘 때문에 이미 경험했었다.
선우휘로 인해서 휘몰아친 불안은 이미 팔성의 내면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팔성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불안으로 몰아넣은 선우휘가 지금쯤 어떻게 자랐는지 궁금했다.
그보다 더 궁금한 것은 따로 있다.
군대에서 첫 휴가를 하여
외갓집에 도착하니, 외숙모만 덩그러니 집을 지키고 있었다.
팔성은 외숙모가 차려준 밥을 허겁지겁 먹어치우고 선우휘의 안부부터 물었다.
외숙모는 군복을 입은 팔성의 군기에 압도되어 그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우휘는 지금 어디있어요? 오늘 꼭 만나볼랍니다."
"우휘가 아니라 휘라고 불러야지. 글고 휘가 너한테는 누나다.
나이는 같지만 휘가 너보다 생일이 빠르잖아."
외숙모는 불안했는지 선우휘와 팔성의 서열을 분명하게 정리했다.
외숙모는 내심 걱정되는 표정으로 선우휘가 근무하는 직장의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었다.
"야, 선우휘, 그간 잘 있었나?"
선우휘는 팔성의 뜬금없는 연락에 많이 놀랐다. 곧장 누군인지 알아보지도 못했다.
"나말이야, 팔성이라고, 저어기, 전라남도 보성
느그 고모집 여덟번째, 팔성이라고!"
선우휘는 거의 15년 만에 팔성의 목소리를 들었다. 또한 고모집의 사촌들이 너무 여러 명이라
헷갈려서 확실하게 기억나지도 않았다.
"음...응,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팔성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것 같애...."
선우휘의 이 말에 팔성은 얼굴이 붉어졌다.
"뭐라고? 내 이름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나는 너를 확실하게 기억하는데,
지금까지 너를 잊은 적 없는데...."
팔성은 퇴근하고 집으로 오면 선우휘를 만나라는 외숙모의 만류를 뿌리치고 집을 나섰다.
무작정 버스를 타고 서면의 어느 굴다리에서 선우휘를 기다렸다. 굴다리는 너무 낮아서 모자를 쓴 채로는
통과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자신도 모르게 모자를 벗고 굴다리를 걸어나갔다.
모자를 벗고 낮은 굴다리를 통과하며 왠지 살짝 겸손해진 기분이었다.
굴다리를 막 통과하자마자 거리가 훤한 느낌이 들었다.
그 훤한 느낌은 선우휘가 그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우휘의 주먹만한 동그란 얼굴은 어린 시절에 그대로 멈춰있는 듯 했다.
시청에서 우루루 몰려나오는 공무원 중에서
가장 눈에 띄었다. 얼굴이 작아서 한눈에 바로 들어왔다. 얼른 모자를 쓰고, 큰소리로 선우휘를 불렀다.
"야 선우휘!"
선우휘는 주변을 휙 살피는 듯하더니, 곧장 팔성에게로 달려왔다.
"야, 내가 누나다. 그러고 보니, 기억난다. 팔성이..."
팔성은 선우휘의 손목을 잡고 다짜고짜 카페를 찾았다.
가장 가까운 카페면 족했다.
카페에 들어서자, 카페 사장인듯한 중년 여성이 웃으며 그들을 반겼다.
아니 선우휘를 반겼다.
"팔도미인 복지사님 어서 오셔요. 오우 멋진 군인도 어서 와요."
팔성은 선을 넘지 않으며 손님을 반갑게 대하는 카페 사장에게 하마터면 거수경례를 할 뻔했다.
"야, 선우휘, 잘컸네, 울보야.
아직도 찌질찌질 울고 있는 줄 알았는데 공무원 복지사라면서..."
팔성은 아이스아메리카노의 얼음을 바짝바짝 씹어먹으며 선우휘를 살폈다.
"야, 선우휘, 너한테 진짜 궁금한 것이 있어야.
너 우리 집에서 살 때, 왜 날마다 울었냐?"
선우휘는 팔성의 그 질문이 단순하지 않음을 금세 알았다.
팔성의 눈빛에서 발화되지 못한 성냥개비의 눅눅한 화약 기운이 느껴졌다.
분노가 되지 못한 그래서 억눌린 자의 맥박이 느껴졌다.
너무나 명백한 대의명분 앞에서 분노나 화로 표현할 수 없어서 망설임으로 남은 자의 슬픔이 물씬 느껴졌다.
선우휘는 여섯 살 아이가 되어 고모집의 마당에 서 있었다.
아버지가 40세의 나이에 갑자기 사망한 바람에 어린 선우휘는 고모집으로 오게 되었다.
과부 혼자서 오 남매를 키우기엔 역부족이라 여긴 고모가 선우휘를 키워주기로 했다.
언니 오빠들은 이미 초등학생이고, 두 동생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선우휘가 뽑혔다.
뭔가 당황스러웠지만 선우휘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았다.
고모집에는 고모의 자식들이 여덟 명이나 있었다.
박씨 집에 시집간 고모는 너그러운 성품이라 다복하게 살고 있었다.
박씨는 선우휘의 아버지와 형제처럼 잘 지냈었다. 그 죽음을 이해할 수가 없어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처조카인 선우휘를 자기 집으로 데려오는 것으로
처남에게 갚지 못한 빚을 스스로 덜어내는 심산이었다.
여섯 살 선우휘는 유독 작고 가벼웠다.
선우휘는 어른들이 의논하여 자기를 고모집으로 보내는데도 전혀 울거나 동요하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리자 박씨는 선우휘를 업고, 아내를 위로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선우휘는 고숙의 등에서 두리번두리번 여기저기 살폈다.
박씨는 점방에서 선우휘의 간식을 샀다. 엿과 초코파이를 사서 아내의 손에 쥐어주었다.
선우휘는 고모집에 도착했다. 막뚱이 팔성이가 맨 먼저 뛰어나와 마중했다.
"아부지..."
평소에 쪽쪽 빨았던 막뚱이 팔성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고모는 선우휘를 남편의 등에서 받쳐 안았다.
팔성은 아버지의 손에 든 엿과 초코파이를 보고 달려들었다.
"저리 비켜, 우리 휘꺼다. 너는 밥이나 묵어라."
박씨는 팔성이를 밀어내고 선우휘를 보고 웃어주었다.
"은자야, 너는 빨리 따뜻한 물 좀 준비해라. 휘 씻겨야겠다.
먼 길을 와서 휘가 힘들 테니, 재울 준비해야혀."
아버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은자와 금자는 부엌으로 향했다.
선우휘는 고모와 고숙의 방에서 생활하기로 정해했다.
낯선 환경에 선우휘가 소외감을 느끼지 않게 하려는 심산으로 자신의 자식들을
일부러 하대했다.
다른 때라면 막내아들 팔성이를 안고 쪽쪽 빨건데, 일부러 밀쳐내며 선우휘가 가장 사랑받는 존재라고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팔성은 평소와 다른 부모의 대우에 뻘쭘해졌다. 처음 본 선우휘를 곁눈질로 보았다.
선우휘는 고모집의 중학생 언니들에게 씻겨져서 방으로 옮겨졌다.
선우휘의 거처는 아랫처였다. 고모부와 고모가 기거하는 별채이다. 그 방에는 어른 베개 두 개와
어린이 베개가 나란히 놓여있었다. 이불 위에 달랑 앉아있는데, 고숙이 초코파이를 꺼내주었다.
그때 팔성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팔성이는 이미 면박을 당했던 터라 침만 꿀꺽 삼키며
선우휘가 먹는 모습만 지켜보고 있었다.
초코파이 한 조각이 흘리자, 팔성이는 덤썩 주워 먹었다.
"팔성아, 너는 이제 베개 들고 할머니 방으로 가라.
오늘부터 이방은 우리 휘가 잘거여."
팔성은 베개를 끌어 안으며, 선우휘를 슬쩍 보았다. 초코파이를 오물거리는 선우휘의
눈에 살짝 물기가 도는 듯했다.
"아부지, 나도 여기서 잘건디..."
팔성은 비적비적 울면서 말했다. 박씨는 팔성의 엉덩이를 살짝 때리며 팔성이의 베개와 이불을 안고 나갔다.
선우휘는 고모집에 도착한 밤은 금세 잠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니, 혼자 누워있었다.
작은 문을 여니, 아기소가 여물을 오물오물 오물거리고 있었다.
어미소는 연신 아기소를 혀로 핥아주었다. 갑자기 엄마가 동생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이 떠올랐다.
선우휘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어제는 낯선 불안을 초코파이로 달랬지만
오늘은 터져버렸다. 두 동생이 엄마 젖을 먹을 때마다 너무 얄미웠었는데
그 풍경이 너무도 그리워졌다.
그때 고숙 박씨가 뛰어들어왔다.
"우리 휘가 일어났구나...아이구 어른 세수하고 밥먹고
고숙이랑 보성장에 가자. 울지마라."
고숙은 선우휘를 안고 본채로 향했다.
"금자야 빨리 우리 휘 먹을 밥준비 해주고, 학교에 가라."
교복을 입은 금자는 선우휘를 보고 한번 웃더니, 부엌으로 들어갔다.
금자는 계란찜과 쌀밥을 작은 상에 차려주고 쏜살같이 학교로 향했다.
선우휘는 혼자 상을 차지하고 밥을 깨작깨작했다.
박씨는 육성이, 칠성이에게 지시했다.
선우휘가 재미나게 놀 수 있는 놀잇감을 만들어서 놀아주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논으로 나갔다.
육성이와 칠성이는 대나무를 잘라서 잔가지를 쳐냈다. 칠성은 어설픈 손놀림으로 낫으로 대나무 가지를
추려내다 손이 미끄러졌다. 미끄러진 손은 왼손등을 후려쳤다. 그래도 칠성은 대나무를 꼭 쥐었다.
육성은 잽차게 자신의 옷자락을 잘라서 칭칭감았다. 대나무를 타고 내리는 뻘건 피를 보고
팔성은 비명을 지르며 울었다. 어린 여섯 살 팔성은 순간 아수라장이 된 형들과 대나무가 널브러진 마당에 두려움이 느껴졌다.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엿을 쪽쪽 팔아먹고 지켜보는 선우휘의 모습은 더 두려웠다.
이렇게 육성, 칠성 형이 대나무를 추리는데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 때문에 팔성은 울음을 터뜨렸다.
선우휘가 이 집에 오고나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형제들의 삶은 별에서 개똥벌레로 추락했다.
선우휘는 낮에는 본채와 아랫채를 오가면 잘 놀았다.
그런데 어둑어둑해지면 뒤안에서 울었다. 뒤안의 굴뚝 옆에서 서럽게서럽게 울었다.
선우휘는 눈물은 윗도리를 흠뻑 적셨다. 보드랍고 둥근 턱밑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은 굴뚝통을 흠뻑 적셨다.
누런 찰흙으로 만들어진 굴뚝의 연기통에 선우휘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 시간에 집으로 돌아오던 박씨는 선우휘부터 찾았다.
굴뚝 옆에 옹그리고 앉아 울고 있는 선우휘를 발견한 박씨는 지겟작대기로
육성, 칠성에게도 날렸다.
"이 새끼들이 왜 우리 휘를 울렸다냐?
이 자식들아, 우리 이쁜 휘를 왜 울렸냐?"
박씨는 지겟작대기는 진심이었다.
육성, 칠성은 두 손을 싹싹 빌며 울었다. 이를 지켜보던 팔성이가 제일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울었다.
육성과 칠성은 팔성이의 입을 막으며 험악한 분위기를 빨리 모면하려고 애썼다.
선우휘는 고숙이 엿가락을 주며 달래면 엿을 쪽쪽 빨아먹으며
아랫채로 내려갔다. 고숙의 손을 잡고.
팔성은 선우휘의 등장으로 무너진 자신의 삶이 너무도 억울하고 슬펐다. 막내 왕자의 자리도 무너졌고,
어린 아기의 응석 권리도 모두 내주었다. 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잠이 들고 눈을 떴던 막내의 영광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빼앗겼더라면 투정으로 되찾을 수 있을 것인데, 거저 내주었기 때문에
떼를 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갑자기 아버지를 잃은 천하의 불쌍한 선우휘에게 팔성의 세계를 내주었다.
선우휘가 아버지를 잃은 날, 팔성은 세상을 잃었다.
그 자리를 모두 선우휘가 대신했다.
과거를 회상하던 팔성과 선우휘는 성큼 마음이 가까워졌다.
마음이 가까워졌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다.
묘하게 가해자 없는 피해의식만 가득했다.
팔성은 선우휘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왜 해질녘이면 뒤안의 굴뚝에서 웅크리고 울었냐."고.

그녀의 남자들 1화를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화에서 선우휘와 팔성의 어린 시절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