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찾아온 고향집, 어머니께서는 반갑게 맞아 주셨지만 내 몸과 마음은 3년 동안의 객지생활로 지쳐 있었다. 일단 몸을 추스르고 다시 일어서겠다는 다짐을 하고 한 겨울을 보냈다. 그리고 2월 10일 고등학교 졸업식 날 공주에 있는 학교에 갔다. 본인이 희망하는 대학에 합격해서 좋아하는 친구도 있었지만 우리 반 1,2,3등 모두 재수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나중에 차희0은 서울대에 합격했고, 김상0은 총남대 의예과에 합격해서 의사가 되었다.
졸업 후 나는 고향집 골방에 공부방을 만들었다. 문제집을 사서 풀고, 밤에는 교육방송을 라디오로 들으며 공부했다. 지겹던 이과 과목도 던져버리고 세계사와 사회문화 같은 문과로 전향해서 독학을 했다. 시골에서 바쁜 농사철이 되면 일손이 많이 필요했다. 하지만 나는 골방에 틀어박혀 나오지를 안 했다. 대신 헛간에서 키우는 토끼 몇 마리에게 줄 칡순이나 민들레 잎을 가져다줄 때만 밖으로 나왔다.
6월쯤이 되니까 몸도 많이 회복되고 토끼들도 번식해서 40마리가 넘게 불어났다. 당연히 먹는 풀의 양도 많아져서 가끔씩 토끼를 잡아 몸보신을 했다. 하지만 여름 장마가 오자 병이 돌아 많은 토끼가 죽고 말았다. 가을이 오자 농사짓는 큰형이 나에게 사관학교 시험을 보라고 권했다. 이종사촌 중에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해군지휘관이 된 함원0 형님을 보고 나에게 육군사관학교 진학을 권하셨던 것이다. 함원0 형님은 해군제독 소장으로 정년 전역을 하신다. 나는 내키지 않았지만 원서 접수를 하고 대전고등학교에서 시험을 보게 되었다. 전날 예비소집장에서 고등학교 동창인 강기0과 하숙집에서 같은 방을 쓰던 이기0도 만났다. 반가운 마음이었지만 여관방에서 뒤척이며 군인의 길은 내가 갈 곳이 아니라고 판단해서 다음 날 수학문제를 절반만 풀고 엎드려 있었다.
다시 입시 준비의 나날을 보냈다. 다른 친구들은 서울의 종로학원이나 대성학원에 가서 공부한다는데 혼자 공부하는 것이 불안하기도 했지만 최선을 다했다. 두 번째 학력고사를 보는 11월 아침부터 진눈깨비가 내렸다. 친구의 자취방에 몇몇이 모여 밤을 새우고 시험장에 갔다. 첫 번째 학력고사보다는 쉽게 출제가 되었지만 좋은 점수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시험장에서 친구의 가족들이 싸 온 보온밥통의 밥과 반찬을 나눠먹고 오후 시험까지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고향집에 내려와서 겨울을 보냈다. 그때 아궁이 앞에서 시를 쓰는 아들과 어머니의 대화를 표현한 시가 탄생했다.
시인과 어머니
권태주
문 밖에선 긴 겨울의 기다림이
흰 눈 되어 내리는 저녁
쇠죽을 끓이는 아궁이 앞에서
후끈한 시래깃국 냄새나는 시를 쓰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 얘야! 시인이 되면 가난하다더라.
시는 뭐 하려고 쓰느냐.
근심 어린 눈빛으로 말했었다.
아궁이 속 타오르던 장작불도 꺼지고
이젠 어머니도 이 세상에 없다.
흰 눈 내려 가득 세상을 덮어도
어머니와 함께 보던 그 저녁
토방 위에 내리던 싸락눈만 못하다.
꺼져 가는 불씨 불어 가며 매운 연기 눈물 나던
그런 저녁이 아니다.
안방에선 동치미에 뜨끈한 숭늉
문밖에 소리 없이 싸락눈이 내리는
그런 시절은 다시없다.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이제는 혼자서 가야 할 길
내가 할 수 있는 건
끝날까지 시를 쓰는 일과
바람 한 줌씩 움켜잡는 일
그 저녁 가슴에 고이 묻어 두는 일
먼 훗날 내 아이에게 지울 수 없는
추억 만들어 주는 일
학력고사 성적이 발표되고 나서 기대보다 못한 성적에 실망하였지만 그래도 내가 가고 싶은 Y대학 원서를 사려고 서울행 고속버스를 탔는데 옆자리에 앉은 노신사가 계셨다. 그분은 나의 모습을 지켜보시더니 넌지시 물었다.
"어느 대학에 지원하려고 하는가?"
"네, 서울에 있는 Y대학에 가고 싶어서 원서를 사러 갑니다."
"그런가? 공주 출신인가?"
"네, 공주고를 졸업했습니다."
"아, 그래. 내가 선배이네. 난 00교육대학 교수라네."
고속버스 옆자리에 앉았던 노신사와의 대화는 서을 강남고속버스터미널까지 가는 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나중에 이 분과의 인연이 다시 시작되게 되었다.-대학생활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