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부 낯선 곳에서 하룻밤을

-권태주 5시집

부 낯선 곳에서 하룻밤을


시인詩人

대숲

아침

저녁 바다

가을밤

회색 도시

엽서

낯선 곳에서 하룻밤을

소래 포구

갈대

가을의 변주곡變奏曲

꽃상여

시가 밥이 되는가

충주호 가는 길

우주 비행

낯선 고독

귀향일기·18

귀향일기·19

동학사

금강별곡

동면冬眠


시인詩人



스쳐 가는 바람을

가슴으로 마셔버리고

꽃 하나 먹고

한 뼘

다리를 건너가는 나그네

멀리 산허리에 걸린

하얀 구름을 머리카락에 거머쥐고

푸른 들녘을 걸어가는

그대는 선각자

바람이 가슴을 채우고

구름은 하얗게 부서져

머리 위에 흩날리면 짐짓

홀로 머물지 못하는 마음 있어

스러지는 연녹색 발자취를 남기고

황혼의 언덕 넘어

과거의 고향으로 가는 그대는

아! 시인이어라

(1984 공주에서)


대숲

1

한 올 한 올 실바람 모여들어

성긴 바람 댓잎 아우성을 부른다

툇마루 달린 메주 덮은댓잎은

바다를 닮아 파랗고

대숲에 걸린 달에 놀란

강아지 짖어 대는 밤

안개는 스멀스멀 대숲을 향하여 기어간다


2

조카 녀석 잠든 얼굴엔

대낮 소꿉장난이 숨어있고

어머니 마른기침

대숲 가르며 비명이 된다

함석지붕 처마 밑으로

달빛은 잠식해 들어와

자정 알리는 시계추

깨우는 시간


3

뜰에 나서 귀 기울이면

풀벌레 기척 소리

비둘기 깃 퍼덕이는 소리

몸 비비며 울어대는

댓가지 요란함이 들려온다

대숲 너머 나 뒹구는 쟁기만

새벽을 부르고

4

길 따라 떠나신 할머니 모습

대숲에 어릴 때

먼바다에서 들려오는

고동 소리 정겹다

청댓잎 숨 몰아쉬며 잠들어도

뿌리는 부지런히 수액을 더듬는다

대숲에 달빛 숨어드는 밤

(1985, 공주교대 계룡문학상 당선작)


아침



회색 천을 두른 안개가

어둠을 씻으며 산길로 오면

동편 하늘은 우물가에서 물 긷는

누이의 홍조 띤 얼굴

새벽별 하나둘씩

서쪽 하늘로 넘어가는

채 가시지 않은 어둠

둥지의 새들조차 단꿈에 잠긴

조용한 숲길 밟으며

어머니 벌써 바다로 가시나요

추위에 떨던 바다

아침이 옴을 즐거워하여 마중 나가고

검은 여 하늘을 우러르는데

어머니 발걸음을 재촉하지 마세요

포구를 떠나는 뱃고동 수 놓고

물새 떼 끼룩대는 갯벌에는

분명 긴 햇살이

천천히 손님처럼 찾아들 것입니다

(1986. 터 시동인지)


저녁 바다



마음에 빈자리 너무 많아

찾아온 저녁 바다 어느덧

낙조落照의 꽃이 피고 있다

노을에서는 오렌지 향내가 난다

지금쯤 남녘바닷가 어느 조그만 농장의

오렌지 향기는 바다를 물들이고

향기에 취한 여행자는 명상에 잠겨

해변을 거니리

갯모롱이 돌아 어부의 집 한 채

바구니 인 어미는 밀물을 등지고 오고

아이는 모랫벌을 달려간다

잔잔한 웃음 위로 마주 서는 모녀母女

어깨 위로 출렁이는 금빛 물결

별이 바다 위로 떨어지는 밤

어둠 헤치고 불타는 수평선 고깃배 무리

팽팽하게 당겨오는 그물의 중량감에

함박 웃는 어부

탄성하는 바다

빈 가슴 채우고 돌아오는 귀로에

이슬이 내리고 아득한 기억을 넘어

동쪽 하늘로 보름달이 뜨고 있다

(1986. 터 시동인지)


가을밤



가을비 푸른 속살 비치며 내리는 시골집

아버지는 콩걷이 녹두걷이 벼바심 걱정으로

사랑방 담배 연기 자욱하고

형 내외 새끼 꼬는 소리

귀뚜라미 울음 속에 연기처럼 피어난다

비릿한 갯내음 들창문 두드리니

주낙 놓으러 바다 나간 삼촌이 보고 싶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잠은 안 오고

마실 간 어머니 마중이나 가 볼까

비는 내리는데

우두둑 감 떨어지는 소리

먼저 가신 그분들의 발자취인가

밤이 깊을수록 촛농은 쌓이고

촛불 아스라이 흔들리는 긴 가을밤

어느메쯤 새벽닭은 우는가

속닥대는 형 내외 새끼꼬는 소리만 끝없고

마실 간 어머니는 왜 이리 늦으실까

갯바람 불어와 들창문 두드리는 바닷가에

밤비는 내리는데

(1986. 터 시동인지)


회색 도시



도시는 온통 회색 안개에 정복당한 채

서서히 긴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한다

나는 거대한 짐승의 입 같은 지하도를 헤매는

한 마리 벌레처럼 표정 없는 얼굴들에 휩싸여

또 다른 입으로 토해져 나와

끝없는 미로의 빌딩 숲을 걷는다

표정 없이 우뚝 서 있는 빌딩마다

낮 전등이 켜지고

회색의 안개는 소리 없이 빌딩 숲을 배회할 때

나의 발걸음은 빌딩 속으로 향한다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도시의 풍경

눈앞에 보이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분출해 버린

콘크리트 조각품들

흙이 사라진 회색 도시의 물결 속에서

누가 흙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것인가

흙의 평화를 진실들을 두껍게 덮어버린

회색 도시에 언제까지나 나의 껍질들을

하나둘씩 벗겨내야만 하는가

(1987. 터 시동인지)


엽서


먼 곳에서

아주 먼 곳에서 날아 온

엽서 한 장

파도 소리 가까이에서 몸짓하는 섬마을

온 밤을 뒤척이다 뱃고동 소리에 눈떠

새벽 바다에 서면

동쪽 하늘엔 온통 황금새 날아오르더라

다 저녁때

꽃잎처럼 바다로 떨어져 빛나는 햇살 바라보면

깊은 바다의 사연 조금이나마 느낄지도 몰라

외로움이라면 그것은 감청색 외로움

그리움이라면 그것은 노을빛 그리움

이곳 가을 들녘은 온통 들꽃 세상

들꽃들 세상

바다에서도 꽃은 피리라

다만 손 닿지 않는 곳에서

무형의 날갯짓으로 날아오르리

외로움 넘치면 노래하라

보고픔이 가득해 떠나는 뱃머리 꿈에 보이거든

이렇게 짠 내 풍기는 엽서 한 장

바다에 띄우렴

흐르다 흐르다 머무는 곳에

젊은 날 우리 있으리니

(1987. 터 시동인지)


낯선 곳에서 하룻밤을



새 눈 트는 봄날

대지엔 어느덧 저녁 안개 머물러

긴 염전길 따라 홀로 걸어가네

처음 걸어보는 이 길에는

그 옛날 선인들의 발자국 박혀있어

흐린 시선 너머

서해로 하루의 해가 지누나

긴 노을 붉게 타올라

내님 향한 애타는 사랑만큼이나

가슴 뜨거워져

자욱이 사라지는 안개 저녁연기

모든 것들이 한 줌 꿈이어라

태양은 지고 대지는 식어도

이 땅 위에 흐르는 그리움은 남아

어제는 먼 충청도 섬마을

오늘은 경기 땅 달월 들판

내일은 또 어디일까

하루 일을 끝낸 염부의 귀갓길엔

마을에서 아이들과 놀다 돌아오는

바람이 먼저 맞이한다

염전 길 만큼이나 골 파인 볼 가

길게 뿜는 청자 담배 연기

하늘은 유채색 풍경화다

외양간 젖소 되새김질하는

시골집 사랑방에서 하룻밤 잠을 청하니

세월은 자꾸만 거꾸로 흘러 흘러

가슴에 맺힌 지난날들의 영상 피어나네

손 내밀어도 잡히지 않는 수많은 말들

온 방을 날아다니네

끝없이 벽에 부딪히며 솟아나고 있네

(1988. 터 시동인지)




연대표가 새겨진 비석들 서 있는 무덤 곁을 지납니다

육신은 한 줌 흙이 되어 하얀 뼈만 곱게 숨을 쉴

나그네 여정을 살다 간 사람들

이곳에서는 부귀와 영화 번뇌와 고통 사라진

한갓 흔들리는 풀들의 꿈일 뿐입니다

나무들로 하늘 덮어버린 숲길을 갑니다

패일 대로 패이고 가끔 잡초에 묻혔다가

되살아나는 산길

꼬부랑 산길을 걸으면

아무도 없는데 혼자서 걷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라옴을 느낍니다

무엇일까요 바람 혹은 세월

인생이랍니다 그림자 없는 길입니다

시리도록 파란 하는 마시며

길을 가고 있습니다

아주 먼 곳에서 입을 벌리고 있을

심연을 향해 웃으며 환호하며

미워하고 사랑하면서

선한 사람도 용서받지 못할 죄지은 사람도

모두 걷고 있는 길이 산 아래 보입니다

애초에 무엇인지도 모르고 태어난

우주의 사생아들

그들이 빠져나온 흙을 콘크리트로 덮으면서

걸어가는 마지막 지점 알고 있을까요

몸속에서 흐르는 붉은 피 그 향기로운 흙냄새

지울 수 있을까요

숲이 끝나는 곳

양지바른 마른 풀밭에 눕습니다

가벼이 가슴 덮어 주는 원초의 대기

하늘과 내가 만납니다

(1988. 터 시동인지)


소래 포구



수인선 협궤열차

긴 꼬리 날리며 달려가는 겨울

철교 난간을 뚫고 날아오르는 회색빛 갈매기들

이 정지된 시간 포구는

무슨 꿈을 꾸고 있는가

암갈색 개펄 수렁에 뿌리를 박고

하염없이 흔들리는 갈대들

끝없이 머리 풀고 흔들리고 흔들려도

기다림의 갈증 멈추지 않는 포구의 저녁

베네치아여

그대를 생각하면 나는 자꾸

목이 메인다오

검은 해안선으로 오르다 오르다 부서져 버린

욕망과 욕구불만으로 가득한

밀물 위로 뿌려지는 저녁 놀 빛

당하고도 반항하지 못하고

헝클어진 머리칼 옷매무새 여미지도 못한 채

속울음만 울어대는 베네치아여

설움만을 가슴에 쌓아두고 있는 것은

그대 등에 기댄 채 살아가는

어부와 갈매기 때문인가

수인선 협궤열차 경고의 기적 소리

가슴 뚫고 지나가는

고향이 그리운 이들의 안식처

소래 포구

(1989. 터 시동인지)


갈대



그들은 거인족처럼

후줄근히 키만 커서 무더기로 모여 산다

인적 드문 고요의 땅

버려진 개펄이나 강가에서

종일토록 서로의 얼굴 비비며 따뜻한 체온 느끼다가

밤이 오면 무엇이 그리 슬픈지

엉엉 울기도 한다

가을날 따스한 보금자리 찾아온

철새 몇 마리 떠나보내야만 하는

아쉬움과 허전함이던가

또 다른 슬픔 하나

가장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처음 느낄 때

흰 머리칼 휘날리며 떠나야 할 자신이 미워

겨울 속으로 떠나야 하는

세월 때문이란 것을

(1989. 터 시동인지)


가을의 변주곡



십일월 어느 저녁

연극 연습하던 아이들은

날지 못하는 백조 찾아 모두 돌아간

교실에 앉아

젊은 나이로 죽어간 시인의

아픈 절규를 들었다

때늦은 가을비

서럽게 창을 때리며 계절을 재촉할 때

살아있음은 단지 한순간

창문에 부딪히고 흘러내리는 빗물임을 알았다

가을은 정리하는 계절

떠날 때를 스스로 알아

주저 없이 바람에 날리는 잎새처럼

젊음은 든든한 뿌리 박을 곳을 찾아

텅 빈 복도를 걸었다

현재는 녹색

과거는 노란색 물감으로 칠하는 하루

하찮은 것들에도 애써 의미를 부여하며

쓰디쓴 미소 지어보는 얼굴아

빗물에 씻겨도 그대로인

베르사유 궁전을 서성이는

서구식 몽상가여

시인도 백조도 모두 떠나간

현대식 목조 건물을 돌아가는

껍데기뿐인 사람아, 사람아

(1988. 터 시동인지)


꽃상여



어여~어여~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육십 평생 제멋대로 살다 가신

숙부 실은 꽃 상여

가는 곳은 북망산일세

딸랑~딸랑~딸랑~딸랑~

요령 소리에 멀어져 가는 지상에서의 삶

영혼은 한 마리 새가 되어

창공 속으로 사라져 간다

어여~어여~어여~

한 발 두 발 내딛는 상여꾼들의 발걸음

남은 피붙이들 가슴에 한을 남겨놓고

육신은 한 줌 흙이 되기 위해

칭칭 동여매인채 심연으로 가라앉는다

위선에 가득 찼던 속세의 삶

타오르는 불속으로 던져져

허무한 재가 되어

하늘로 날아간다

인생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 것

무덤만 남아 흔적을 남긴다

(1999,5,20.)


시가 밥이 되는가



시가 밥이 되는가

아니다 유희다

한 순간의 여흥을 위한 유희다

시가 밥이 되는가

아니다 배설이다

창자에 묵은 변을 쏟아내는 것이다

시를 써도 써도 밥이 되지 못하는 세상

혼자 쓰다 휴지가 되어 벼려지는

시는 밥이 되지 못한다

시는 밥이 되지 않아도 좋다

누가 돌보지 않아도 피었다가 지는 들꽃처럼

밤하늘에 무수히 돋았다가

아침이면 사라지는 별들처럼

사람들에게 영롱한 영혼의 울림과

가슴을 젹셔주는

시는 시다

(1999)


충주호 가는 길



아름답다는 계곡은 모두

인간 무리의 오색텐트에 점령당했다

나무 밑에도 바위틈에도

여지없이 가득 찬 텐트들

도시를 벗어나고 싶어 왔는데

도시에서 온 인간들이 곳곳에 자리를 잡고

쓰레기들을 채우고 있다

월악산 송계 계곡

산 그림자 내려앉는 시간까지

인간들 질펀하게 쏟아낸 오물이 흐른다

산 아래 충주호 진초록의 부유물들이 떠다니고

인간들 다시 도시로 돌아와 마실

수돗물이기에 더욱 안타까운 여름날

(1994. 터 시동인지)


우주 비행



중력을 벗어난 우주선 속에서

비행사는 산소를 씹어먹고 싶어졌네

어제 땅 위에서 보았던 구름도

이제는 발밑에서 겨울 눈구름처럼 펼쳐져 흘러가네

솜사탕처럼 만져지지도 빨아먹지도 못할

신기루의 구름 떼

가슴 깊은 골짜기에 그리움을 만들어놓고

지상으로 하강하기 시작하네

여과되지 않은 채 직진하는 태양 빛

이 강력함과 맞서기엔 눈이 부시네

모든 것을 손에 쥐고 싶었던

지상에서의 삶이 한낮 구름을 움켜잡는 것이었네

여기는 천국과 지옥의 중간 지점

카오스의 세계

한눈에 보이는 푸른 지구가

꾸역꾸역 머리 숙이며 지나가고 있네

(1996. 터 시동인지)


낯선 고독



우리나라 어디쯤

기차역 광장에 서면

낯선 고독 하나 기다렸다는 듯이

마중 나와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을 훔쳐보고

거칠고 투박한 사투리를 들으면

문득 나는 이름 모를 별에서 날아 온

외계인

무심히 내 앞을 지나가기도 하고

피우다 만 담배를 발로 비벼 끄다가

머쓱한 얼굴로 돌아서는 시내의 등 뒤로

달라붙은 낯선 고독

그것은 외로움인가

(1999)


기ㆍ18 눈

귀향일기·18

-눈



증오처럼 푸른 대나무

철저히 막힌 칸칸의 감방 속에서

못 참겠다 못 참겠다 외치는

분노의 숨 가쁜 소리

여기저기서 엉켜 나오는 소리들 모여

큰 함성이 된다.

참아라, 참아라

댓잎어우르며 지나가는 이방인 예수의 음성

일곱의 일곱 배라도 참아라

부르르 몸을 떠는 시퍼런 참대

갑자기 쏟아져 내리는

내려서 댓잎 스치는 흰 눈발

자유의 깃발 휘날리며 압제의 벽을 향해

벽을 부셔라 새 하늘 보아라

큰 외침 대숲에 울려 퍼지자

흰 광목띠 질끈 동여맨 눈에서 불꽃 튀는 사람들

우르르 어깨 걸고 몰려나온다.

죽창에 시퍼렇게 날 세우고

얼어붙은 겨울 들판 가로질러 달려간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사람들처럼

(1992. 문학지평)


귀향일기·19

-부흥회

1.

늙은 전도사 강단을 치며 설교하는

언덕 위 예배당

찬송 소리 북 소리 잠자는 마을로 퍼지는

부흥회의 밤

아골 골짝 섬마을십오 년 세월

풀꽃처럼 살아온 늙은 전도사의 꿈

기도가 되어 폭풍의 언덕 위로 날아오른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소돔 같은 거리에도 사랑 안고 찾아가서...

얼어붙은 땅 굳게 닫힌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뜨거운 사랑의 전파

아낌없이 드리리다 아낌없이 들리리다...

칼바람에 헝클어지는 복음

2.

강사로 나온 늙은 장로의 생애가

낡은 영사기 필름처럼 돌아갈 때

꾸벅꾸벅 졸아대는 갯벌에서 굴 찍던 아낙들

천국과 지옥은 장로의 마음

저들에겐 눌러오는 잠이 더 달다.

욥처럼 살아라 유다처럼 살지 말고

아브라함처럼 모세처럼 믿음 지켜라

요나처럼 회피하지 말고

...처럼...처럼...처럼

천국은 곧 주어지리라

석유난로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문 밖에서는 칼바람 스치고

조는 아낙들 떠나

얼어붙은 마을로 향하는

예수의 시린 손

(1992. 문학지평)


동학사



병풍처럼 깎아지른 절벽 아래

산자락을 드리운 산 그림자

그 속으로 속세의 인연 끊고

모든 것 털어내고 산속으로

깊은 산속으로 걸어가는 비구니

저녁 어스름 내리는 길에

낙엽은 가을로 진다

바람은 느티나무잎 사이로 지나며

하늘의 구름도 머물지 않는 시간

무엇을 찾고 있나요

염주 알 굴리고 굴려도

백팔번뇌는 끝이 없어라

풍경소리에 깊어가는

산사山寺의 밤

누가 호수에 그림자를 띄웠을까

상념의 배는 어둠 속에 떠돌고

(1991.문학지평)


서사시敍事詩

금강별곡

강물 위로 달빛이 부서지는 밤, 강줄기 따라 노인 하나 노 저어 오는 것을 보았다. 저만치 곰나루에 닻을 내리고 반짝이는 등불을 향해 걸어가는 노인의 등 뒤로 출렁이며 강물이 흐르고, 흐드러지게 휘어진 솔밭 사이로 강바람은 몰려가서 음울한 별리別離 노래를 연신 부르고 있었다. 역사의 밤을 가르며 강물이 흐르고 소중히 고동치는 심장을 향해 전설의 영웅들은 강물에 승리의 칼을 간다. 그대가 이름 모를 고지에서 밀려드는 적들에게 기관총을 난사할 때….

한성 백제의 멸망

역사의 수레바퀴가 돌던 밤

장수왕은 한강을 건너

위례성을 포위했다.

30만 대군은 창을 들고 성을 공격하고

불화살은 쉴새 없이 날아들어

성안은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선왕은 왕자와 신하들을 피하게 하고

진영을 정돈하여 적을 맞아 싸우다 전사

성은 함락되었다.

백제의 밤이 걷힐 때

가련한 백성들과 왕족들은

남으로 남으로

새 땅 새 하늘 찾아

가는 거다.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복수의 그 날까지

수일을 걸려 산을 넘고 들을 지나

내려 온 지친 행렬들

보인다.

새 땅이, 푸른 들판이

비단으로 수놓은 강이 흐르고….

그대의 왕명은 문주文主

금강이라 하리라

강은 흐르고, 어제같이 흐르고

2. 두 아이

청벽靑壁을 돌아 흘러내리는 물살

공산성 백사장에 머물면

꼴 베던 두 아이, 돌을 던진다.

쟁기 끌던 웅진 터밭 흙냄새

쌍수雙樹 휘어진 가지 위

새벽안개로 흘러

천 오백 년 이어 온 백제의 향기

바스라이 낙엽에 쌓인다.

해상의 무적 동성東成함대

서해를 흉용洶湧하고

야망의 투사들

중원대륙을 달렸다.

세월은 가고 무너진 성벽 사이로

들풀 돋는 곳

행여 발에 닿는 부서진 성문 조각들

이끼 낀 왕궁터

흐르는 금강

곰나루 전설 실은 사공의 가락에

하나둘 늘어만 가는 무명 묘비

어허라. 백발아, 위용 없는 장군처럼 늘어만 가도

천년을 더불어 황혼을 낚겠노라.

연미산 지네골 돌아 흘러내리는

차가운 물살

금강 백사장에 머물면

꼴 베던 두 아이, 돌을 던진다.

3. 동학 농민 전쟁

1894년 시월

동학군은 공주감영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외세를 몰아내고 민중을 위한

태평성대 꿈꾸어

흰 옷자락 나부끼며 뛰어오르던 수많은 농민은

우금티 고개에 쓰러지고

한양 진군의 꿈은 스러져갔다.

깊은 하늘

용광로 불길 속으로

사방팔방에서 무수히 던져진 농민의 꽃다발은

영원의 강물 되어 피로 물들어 흐르고

백화白花 요란한 하늘 밭 위에

용감하게 던져진 젊음을

역사는 돌아보지 않았다.

피를 머금은 금강만이

그들의 넋을 달래가며 흐를 뿐….

사람들은 역사의 그날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박제된 양심으로 살아가는 강촌에 밤이 오면 갈대만이 서로 몸 비벼대며 울어대고 풀벌레 요란히 긴 밤을 진군해 넘어오는 여명黎明의 새벽 노래를 부르고 있다.


동면冬眠

-이 도시에 있어서 겨울은 정적이다



모락모락 오르는 저녁연기는

산 아래 가난한 동네에서 먼저 오르고

하늘엔 하얀 눈 가득하다.

상수리, 참나무들은 말이 없고

강江 조차 깨어날 줄 모른다.

하행선 기차 소리만 가끔 들려오는 밤

몰래 찾아 든 바람마저 길 찾아 떠나는

적막한 소도시의 겨울

컹컹 짖어 대는 개들

그것은 조용한 동면冬眠의 숨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가을 녘 술꾼들의 노랫가락도 잊혀진 지

오랜 세월처럼 느껴지는 주점

술동이는 비어있다.

그 옛날 아사달 아사녀 꿈꾸던 산자락 양지 녘엔

다람쥐 먹이 찾아 서걱대고

안개 자욱한 도시의 카페

비발디의 선율에서 문득 깨어나는

동면冬眠의 꿈

푸른 샘물 돌 틈 비집고 흘러

언뜻 강이 풀리면

그대, 불면不眠의 밤은 사라지리니

깊은 잠을 깨치고 미명未明의 새벽을 향해

횃불 들고 서자!

먼 곳에서 아우성치며 올라오는

한반도의 아침을 푸른 가슴으로 맞이하자.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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