Ⅴ부 멀리 있는 것은 밤에만 보인다

-권태주 5시집

Ⅴ부 멀리 있는 것은 밤에만 보인다


지진, 전쟁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

멀리 있는 것은 밤에만 보인다

아니었다면

우도 해녀의 노래

조피란 여사

둔덕골* 애가

상처, 그리고 헌신

하얀 제비꽃

봄이면 피는 꽃

구멍

철길 위에 남겨진 이야기

폭설

고비사막

눈 내리는 풍경

정전

이를 뽑다

물고기의 꿈

어느 겨울


-평론 : 권태주의 시 세계


지진, 전쟁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




튀르키예와 시리아에 일어난 7.8도의 강진으로

수많은 건물이 무너지고 사람들은 건물 잔해에 깔렸다

우리 인간은 출렁거리는 맨틀 위에서 살아가는

아슬아슬한 삶 아니더냐

어느 날 지각이 흔들리고

그 속의 마그마가 솟아오르면 화산이 폭발하고

땅이 갈라지면 지진이 일어나

그 위에 지은 인간들의 건물들이 무너져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다

절망과 암흑의 땅 시리아에는

구원의 손길은 없고 울부짖음과 죽음의 냄새뿐

흰 눈 쌓인 튀르키예의 건물 잔해 더미에서 사투를 벌이는

구조대원들

시간은 흘러가고 삶의 희망의 끈은

하나둘씩 끊어져 가는구나

살아남은 자는 앞으로의 삶이 막막하고

죽은 자는 지나간 삶을 기억하지 못한 채

망각의 존재로만 남을 것이다

이 우울한 죽음의 현장 너머 동유럽에서는

벌써 일 년 동안 서로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터

죽음의 그림자는 이곳에도 머물고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다

사탄이여! 죽음의 잔치를 멈추어라

고귀한 생명의 싹을 자르지 마리

이 땅은 평화의 땅

축복의 땅이 되어야 하니

죽음을 드리우는 전쟁의 무기들과

화산과 지진으로 인한 죽음의 공포를 걷어

너의 고향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악의 세력이여

다시는 이 땅에 돌아오지 마라



멀리 있는 것은 밤에만 보인다




우리 삶에 그늘이 내릴 때

내 눈앞에 있는 것만 보지 말고

멀리 보기 바랍니다

그것도 혼잡스러운 낮이 아닌

밤에 홀로 하늘을 바라보면

먼 우주공간에서 날아온

아름다운 별빛이 반짝입니다


어느 세월에 출발한 빛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은하계를 지나 성운을지나

이 지구의 한 사람 눈에 보일 겁니다

진짜 멀리 있는 것은 밤에만 보이기에

마음의 눈을 활짝 뜨면

보이지 않던 것들까지 보이게 됩니다


여기는 남반구의 파초가 우거진 나라

세상 모든 짐을 내려놓고

밤하늘의 별을 바라봅니다

북반구에서도 보았던 북두칠성

반갑게 나를 내려봅니다.

멀리 있는 것은 밤에만 보입니다


아니었다면




10월 29일 토요일이 아니었다면

이태원 밤거리 할로윈 축제에 가지 않았을 것을

그날 시골에 사는 친구가 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번쩍이는 나이트클럽 구경 가지 않았을 것을

내 나이가 20대가 아니었다면

가족들과 바닷가에 텐트를 치고

모닥불을 피우고 있었을 텐데


내가 탄 지하철이 그 밤 이태원역에서 멈추지 않았더라면

홍대 밤거리나 덕수궁 돌담길을 걸었을 텐데

대통령이 청와대에 있었더라면

경찰기동대가 모두 용산으로 몰려가지 않았을 것을

이태원 내리막 40m 도로가 없었더라면

내 친구와 손잡고 흥겨운 밤거리를 활보했을 텐데

누군가에 등 떠밀려 넘어져

겹겹이 쌓여 죽어가지 않았을 것을


그날에 내 운명이 그 좁은 길을 걸어갔기에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이었기에

늦가을 떨어지는 플라타너스 잎처럼

심장의 박동이 멈추고 말았던 것을….


우도 해녀의 노래




너 거기 누워있었느냐

톨칸이* 건너편엔 성산봉이 듬직하게 서서

애절한 사모곡만 불러보는

당신과 나의 그리움의 거리

사람들은 이 땅에서 태어나고 자라

더러는 뭍으로 떠나 다시 돌아오지 않더라

내 사랑도 그렇게 더벅머리 사나이가 되어

떠나간 지 칠십 년

열일곱 처녀 시절부터

물질하며 긴 세월을 이 섬과 함께

기다리고 기다렸다오

가끔씩 뭍에서 들려오는 동란 소식과

더러는 군대로 가서 상이군인이 되어

피골상접한 얼굴로 돌아왔고

어느 해는 월남이란 나라에 가서

전사통지서만 날아왔지만

그때 떠나간 그 총각은 영영

소식 없이 세월만 흘러갔다

우도 바다 뿔소라 톳 전복들 물질로

해녀의 살아가는 양식이 되었지만

내 주름은 깊어만 가고

손주들은 자라 성인이 되었다

저 옥빛 물빛은 변함없이 오늘도

큰바다로 흐르는 꿈을 꾸지만

아직도 그리움은 미련이 되어

바다만 바라보고 있다오

해녀의 노래만 부르고 있다오


*톨칸이ㅡ우도 사투리로 소의 여물통



조피란 여사




조선시대 정감록에 나오는 피난처 중의 하나인

마곡사 골짜기에 터를 잡고 살아 온

조피란 여사

6.25 전쟁 때도 전쟁을 모르고 지나갔다는 마을에서

토종닭으로 백숙을 끓이며

식당을 해 온 지 수십 년 세월

오늘 밤도 능이버섯을 넣고 끓인 백숙을 내오는

조피란 여사

마곡사의 밤은 깊어 가고

조피란 여사의 인생이야기 또한

끝날 줄 모르는데

낯선 여행자의 하룻밤도 추억되어

낙엽처럼 쌓이네


둔덕골* 애가哀歌




바람 불고 비 오는 날이면 둔덕골에 올라

멀리 떠나간 그대를 생각하오

나 죽어 하나의 바위가 되어

먼 대양으로 향하는 어부의 심정으로

끝없이 바다만 바라볼 것이오

도회로 가는 긴 둑방길엔 코스모스가 피어

가을의 그리움을 그대에게 날리어 보지만

대답 없는 그대에게 손편지를 우체통에 담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쓸쓸하오

나는 그대에게 깃발이 되어 휘날려도 보고

만주 벌판 삭풍 맞으며 외쳐도 보았지만

아! 서글픈 사랑이여 한여름 밤의 꿈이여

둔덕골 언덕엔 밤이면 무수한 별똥별이

그대를 향해 떨어지오

나의 은하수는 밤마다 우주 공간에 오작교를 만드는데

굳어버린 당신의 마음은 언제 풀리려나

아!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대답해다오. 대답해다오.


*둔덕골-청마 유치환시인의 거제도 생가 마을


상처, 그리고 헌신




모든 만물이 기지개를 켜는 봄날

나도 몽우리를 터뜨리고

분홍 복사꽃을 피웠다

꽃을 찾아 벌과 나비가 내 몸속으로 들어와

화분과 꿀을 날랐다

나의 성장은 그치지 않았고

햇살을 맞으며 둥글게 몸을 키워갔다

폭풍우와 태풍까지 이겨내며 맞이한 초가을

나는 당당하게 붉은 과육을

모두에게 보이고 싶었지만,

아뿔사!

내 몸속에서 꾸물거리는 그것은

복숭아 나방의 애벌레 한 마리

너는 그렇게 소리 없이 들어와 내 몸을 파먹으며

커가고 있었다

하지만 내 몸을 희생해 네가 자란다면

그것으로 괜찮다

나는 관대하다

어미의 살을 파먹고

살아남는 우렁이 새끼들처럼

너도 언젠가는 멋진 나방이 되어

날개를 퍼덕이며

파란 하늘로 날아갈 테니까


하얀 제비꽃




부모님 산소 주변에 솟아나 꽃을 피운

백의민족의 꽃

순결하고 고결함을 잃지 않고 피는

너의 영토는 고귀하다

춘궁기가 찾아와

오랑캐가 쳐들어올 때 피기에

오랑캐꽃으로도 불렸다는

오늘은

고운 봄날

입안에서 맴도는 너의 이름

다시 되뇌어 본다

하ㆍ얀ㆍ제ㆍ비ㆍ꽃





아침마다 쑥쑥 자라는

무를 보면

아이들이 떠오릅니다

아침마다 등교하는

아이들의 모습들

쑥쑥 자라나는 무처럼

생기 넘치고 활달합니다

멋진 우리 아이들

이 가을의 주인공입니다


봄이면 피는 꽃




어느 꽃이 먼저 피나

매화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목련이 피고

뒤따라 벚꽃 살구 복숭아 사과꽃이 피지

모든 꽃이 지려 할 때 피는 철쭉

색깔 더욱 진하게 봄을 보낸다네

키가 안 큰다고 걱정하는 아이야

조금 늦을 뿐이지 어느 날 너도

쑥 자라 있을 거야

조급해하지 말고 너의 길을 가렴

순서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얼마나 열심히 살았느냐에

행복이 따라올 거야


구멍




삶의 무게가 버거웠더냐

희고 노란 들꽃들 피어 봄바람에 살랑거리고

하얀 민들레 씨앗은 바람 따라 하늘로 나는데

큰 구멍 하나 가슴에 안고 서 있는 감나무

누가 네 가슴에 커다란 상처를 남겨 두고 떠나간 것이냐

부모 가슴에 대못을 박아놓고 떠나간 자식

못 뺀 자리마다 황소바람 들락거려

아프고 시린 날들을 보냈다

봄 햇살 맞으며 잎사귀는 피어나고

감꽃들도 무성히 필 것이다

노란 가을날 어느 때쯤

붉디붉은 그리움들은 홍시가 되어

가슴에 뚫린 상처 보듬어 주리



철길 위에 남겨진 이야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을 방문했다고

라디오에서는 중계에 열을 올릴 때

하얀 벚꽃도 져서 호수 위를 떠다니던 꽃잎들

흘러가는 꽃잎을 바라보던 우리에게

미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아득한 기차의 기적 소리를 들으며

평행으로 뻗어있는 레일 위에 실어 보낸

어느 젊은 날 첫사랑의 이야기들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기차는 사연을 밟으며 지나가고

추억들만 더욱 생생하게 철길 위에 돋아나는

교황의 한국 방문에 벅차하던 그 시절의 사연들





먼 산 뻐꾸기 울어

봄인가 내다보니

개울가 능수버들 가지가지마다

초록 순 돋는구나

앞산 진달래 피어

봄을 재촉하니

이리저리 날아드는 나비 한 쌍

봄 햇살에 사랑놀이 그치질 않네

그리운 그님은 바구니 들고 냉이 캐러 가고

나는 노란 산수유꽃에 마음 걸려

시간 가는 줄 모르네


폭설




2월의 첫 하늘은 축제였다

끝없이 내려오는 저 천사들의 나팔 소리

폭죽처럼 일제히 터지는 봄날의 배꽃이 피듯이

온 하늘이 축제의 날이었다

이런 폭설이 내리는 날에는

먼 오지의 외딴집 노부부 안부도 궁금해지고

눈 무게에 해송 가지 부러지는 소리에 잠 깨던

유년 시절의 아득한 그리움도 있다

이 폭설이 그치면

홀연히 떠나간 그리운 이 찾아

나도 정처 없는 길 나서야 하리


고비사막




사막의 산등성이를 오르면

멀리 보이는 푸른 강 같은 신기루

모래톱에서는 사막을 여행하는 여행자를 유혹하는

음악이 흐르고

끝없이 흐르는 모래알들의 속삭임들

멀리 쌍봉낙타의 울음소리

어미 잃은 낙타를 위해 들려주는 마두금 선율

어미 낙타의 눈물은 마두금 선율과 조화를 이루며

황혼에 물드는

몽골 초원 유목민의 삶



눈 내리는 풍경




오후가 되자 갑자기 하늘에 구름이

까마귀 떼처럼 몰려오기 시작했다

뒤이어 하얀 나비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일제히 공간을 가득 채웠다

산 아래 마을의 지붕들은 어느새 하얗게 변해가고

들판도 한순간 백설의 세상이 되어 있었다

외딴 마을로 이어지는 길에는

그리움의 줄기들이 낮고 길게 이어져 있고

정적만이 흐르는 시간

어둠은 점령군처럼 은밀하게 골짜기에서부터 내려오더니

기억의 저편까지 망각으로 채워버렸다

희미한 등불들만 조등이 되어 걸려있고

고요함만이 수안보의 밤하늘을 가득 채우는 시간

외로운 달그림자만이 졸고 있었다


정전




순식간에 세상이 고요해졌다

정적 속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두꺼비집을 열어 스위치를 올렸다 내리고

주변을 둘러보는 것뿐

환한 빛과 추운 겨울 난방까지 모두

전기의 힘이었던 것을

모르고 살았다 아니

잊고 살았다

한전과 관리실에도 전화를 걸어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점검 중

보고 싶다 주변의 것들이

한전은 점검 중 우리 집은 정전 중


이를 뽑다




너무 오랫동안 괴롭히더니

이젠 고통을 끝내려 한다

주인을 위해 50년 이상을 네 역할에 충실해 왔지만

더는 머물 수가 없었다

불면의 밤 고통의 시간에 종지부를 찍고

마취된 잇몸과 뿌리를 끊고 안녕

어금니 떠나간 자리엔 새로운 임플란트가 자리하겠지만

너 떠나간 빈자리 허전하게 기억의 흔적으로

오래도록 남아 있겠지



물고기의 꿈




시장 좌판에 진열된 물고기

배는 갈라져 텅 비었고 윤기를 잃은 반짝이던 비늘

한때는 너도 푸른 파도 출렁이는 깊은 바닷속을

힘차게 헤엄치던 물고기였다

가고 싶은 곳 어디라도 꼬리지느러미 흔들며

달려 나갔던 살아있는 물고기였다

때로는 거친 물살 속 큰 물고기의 공격을 받아

아슬아슬한 때도 있었지만

당당하고 씩씩하게 살았었다

어느 날 물고기 떼 속에 들어가

큰 바다를 헤엄치다

순식간에 그물의 벽에 갇혀

끌어올려져 생을 마감했다

시장 좌판에 진열된 물고기 한 마리

썩은 비린내가 아니라

바닷속을 빠르게 헤엄치는

싱싱한 물고기가 되고 싶다


어느 겨울




적은 은밀하게 숨어들었다

저격수처럼 총구를 세워 가장 약한 부위를 공격했다

흐르는 콧물과 재채기

COVID-19 테스트는 양성

두터운 마스크를 하고 혼자만의 토굴로 진입하면

세계와의 단절이다

목 부위를 찔러대는 통증과

쉼 없는 기침과의 사투

또다시 찾아온 너는

인간의 모든 의지를 꺾어놓았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의

길고 긴 전쟁

이제 나를 충분히 괴롭혀 놓고

너는 또 어디로 떠나가려 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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