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시인 권태주 우리문학 발행인 Dec 9. 2022
제 2시집 『그리운 것들은 모두 한 방향만 바라보고 있다』 출간을 계기로 월간지 기자가 교장실로 취재를 와서 질문하기를
“시는 왜 쓰시나요?”
하는 것이었다. 순간 당황하기도 했지만 나는 1995년 첫 시집 『시인과 어머니』를 출간한 후 출판기념회에서 했던 말을 기억해 냈다.
십수 년간 시인의 길을 걸어오면서 저는 과연 시인의 길이란 어떤 길이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물질도 명예도 저만큼 떨어진 시인의 길을 나는 왜 가고만 있는가? 후회도 해보고, 붓을 꺾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숙명인지 나의 슬픔과 괴로움이 깊이를 더해 갈수록 시는 내 곁에서 나를 위로해 주고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논어에서 보면 ‘詩三百이면 思無邪’라는 공자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을 풀어보면 모든 시는 마음을 순수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이 땅의 시인들은 시를 통하여 세상의 부패한 것들과 악한 것들을 깨끗게 하고 순화시키는 사람들입니다. 시인들에게는 세상의 추한 것도 더러운 것도 외면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감싸주고 보듬어 주는 따뜻한 마음과 눈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시를 통하여 독자들에게 더 고차원적이며 정신적인 즐거움을 주고, 동시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제시해 주는 존재입니다.
기자가 취재를 끝나고 돌아간 후, 서재에 앉아 되뇌어 보았다. “시는 왜 쓰는가?” 나는 혼자 대답해 보았다. “시는 감상感想의 발로發路이다.”, “시는 상상像想의 건축물建築物이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그의 저서 『空間의 詩學』에서 시를 하나의 집으로 보고 있다. ‘더할 수 없이 깊은 몽상 속에서 우리들이 태어난 집을 꿈꿀 때, 우리는 물질적 낙원의 그 원초적인 따뜻함, 그 잘 중화된 물질에 참여하게 된다.’라며 본인의 추억이 깃든 집을 그리워하며 몽상夢想 속에서 되돌아가고자 한다는 것이다. 시인들은 끊임없는 상상 속에서 알맞은 표현을 찾아 집을 짓고 허물곤 한다. 그러한 무수한 과정을 통해서 하나의 건축물인 한 편의 시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위대한 작업인가?
안타깝게도 현대인들은 시의 낭만 말고도 접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아기들은 태어나서 엄마 품속에 있을 때부터 텔레비전의 화려한 색상에 익숙해지고, 어린이들은 핸드폰과 게임의 세계에 빠져든다. 청소년이 되면 상대방과 이야기하며 게임하는 증강 현실 게임과 온라인의 세계에 푹 빠져 있다. 독서를 통해 생각을 키우고 기본적인 학습을 체계 있게 배우게 되면 상상과 창의력은 무한한 영역으로 퍼져나갈 수 있다. 우리 아이들에게 그런 생각의 시간을 주어야 한다.
2017년 지구촌을 강타했던 가상화폐에 투자한 젊은이들이 60%가 넘는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접한 게임과 온라인의 세계가 비트코인 열풍으로 우리나라 젊은이들을 열광하게 하였고 또한 좌절하게 하고 있다.
‘시는 왜 쓰는가?’ 다시 한번 나에게 질문해 본다. 인간의 삶과 현실에 대한 서정抒情,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에 대한 서경敍景, 사람들은 타원형의 지구 위에 지금도 무수한 건축물을 짓고 있듯이 시인들도 시라는 상상의 건축물을 만들어갈 것이다. 감정의 유희遊戲가 아닌 인류 보편적이며 항구적인 정서를 담아내는 시를 쓰는 시인이 되고자 앞으로도 나는 고뇌하며 내면의 세계를 다듬고 새로운 세계를 찾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