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단상斷想

올겨울은 유난히도 춥다. 삼한사온이라는 우리나라의 겨울 날씨가 무색하게 시베리아의 찬 공기가 수시로 내려와 한반도를 꽁꽁 얼어붙게 하고 있다.

하늘길을 바삐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보고 있자니 먼 옛날 아득한 기억 너머로 고향 집이 생각난다. 반농반어半農半漁를 하던 우리 집은 가을까지 농사를 짓고 겨울이 되면 바닷일을 해야 해서 더욱 바빠졌다. 집집마다 김을 하던 터라 양지바른 곳에는 어김없이 김을 말리는 벽이 설치되었다. 아버지와 큰형은 바다에 나가서 우리 집이 설치한 김발에서 김을 뜯어오면 집안의 여자들은 네모진 틀에 김을 떴다. 그럼 나와 형은 떠진 김을 벽에다 고정해 넌다. 오후가 되면 잘 말린 김을 걷어서 한 장씩 뜯어내는 작업을 해야 했다.

소여물을 쑤고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면 온 가족이 큰 방에 모여서 김에 묻은 잡티를 제거해서 100장씩 묶어 장에 팔 준비를 한다. 5일 장날 새벽이면 아버지는 장이 열리는 면 소재지까지 지게에 김을 지고 팔러 나가신다. 장에 가신 아버지를 기다리는 우리는 구슬치기나 딱지치기를 하면서 연신 신작로를 걸어오실 아버지 모습을 찾는다. 해도 뉘엿뉘엿 지고 앞집 굴뚝에서 연기가 올라올 때쯤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한다. 반가워 논길을 가로질러 뛰어가면 아버지의 얼굴은 약간 발그스레하며 술 냄새가 확 풍겨온다. 그래도 반갑게 달려온 막내아들에게 시장에서 사 온 눈깔사탕이랑 라면땅 과자를 건네주신다.

김 농사도 어느 정도 마칠 때가 되면 마을에서 양식한 굴 수확이 시작된다. 어머니는 새벽에 일어나셔서 점심으로 누룽지를 한 뭉치 바구니에 담으시고 동네 여자분들과 바다로 나가신다. 조새라는 기구로 굴을 따면 좋으련만 어머니는 조금이라도 더 굴을 수확하기 위해서 굴을 통째(버캐)로 따서 큰 자루에 담아 두신다. 오후가 되면 나는 소달구지를 끌고 십 리나 되는 줄밭머리 갯벌까지 수확한 굴을 실으러 가야 했다. 우리 집 암소의 코에서 김이 무럭무럭 날 때쯤 도착한 갯벌에는 하얀 포말을 남기며 겨울 바다가 으르렁대고 있고, 많은 동네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더 굴을 수확하려고 바위와 돌바닥에 납작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밀물이 막 차오를 때쯤에야 어머니는 동네 사람들과 수확한 굴 포대를 들고나오셨다. 우리 집 수레에는 어느새 굴 포대가 수북이 쌓인다.

집에 도착하면 저녁부터 수확한 굴을 까느라 밤 깊은 줄을 모른다. 내일 또 굴을 따러 가야 하기에 저녁 식사를 마치신 어머니는 초저녁 깊은 잠이 빠지신다. 그럼 남은 몫은 형과 나의 차지가 된다. 굴을 까면서 날카로운 조새에 손을 찍기도 하고, 바닷물에 부푼 아픈 손가락도 참으며 우리는 그렇게 밤을 보냈다.

나의 부모님은 시골에서 쉼 없이 일하면서 사셨다. 그리고 힘들게 번 돈으로 자식 공부를 시켰다. 나는 그 힘으로 자랐고 부모님이 안 계신 지금 초등학교 교장이 되었다. 먼 옛날 아득한 기억 너머에 남아 있는 일들이지만 이 추운 겨울 그 시절 함께 보냈던 옛사람들의 정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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