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와 사랑방

내 고향은 충남 태안군 안면읍 신야리 목밭이다. 고려시대 삼별초가 몽골군에 맞서 항전하기 위해 강화도를 떠나 안면도 병술만에 진지를 구축하고 안면송을 목재로 공급하던 곳이 목밭이었다. 6가구가 모여 있는 곳이 내 집이 있는 큰목밭이고, 7가구가 있는 곳이 작은 목밭이다. 할아버지는 고향이 충청남도 보령군 청소면이시다. 지금도 권씨 집안 시제(時祭)를 지내는 곳이 청소이다. 일제 강점기에 둘째 아들로 태어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시고, 평생을 선비로 살아가신 분이다. 집안에서는 벼슬길에 나갈 수도 없는 입장인지라 마침 안면도에 바다를 간척한 곳이 있어서 할아버지를 그 간척지의 마름으로 보내셨다.

어렸을 때 기억하는 내 집은 충청도 양반집 구조로 솟을대문 옆에 사랑방이 있었다. 그리고 바깥채에는 섬마을로 오신 초등학교 선생님 부부가 기거하셨다. 대가족 체제여서 식사도 밥상이 세 개나 들어왔다. 맨 먼저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겸상하시고, 두 번째는 남자 형제들의 밥상, 맨 나중은 할머니와 어머니, 형수님의 차지였다.

저녁이 되면 사랑방은 할아버지의 손님들로 오래도록 호롱불이 꺼지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곰방대에서 빨간 담뱃재가 타들어 가고 지인들과 깊은 대화도 멈추지를 않았다. 토정비결土亭秘訣을 쓴 이지함李之菡 선생의 고향이 인근 보령군 오천면이었기에 할아버지도 그분의 저서와 풍수지리에 관한 공부를 오랫동안 하셨다. 그래서 마을에 초상初喪이 나면 묏자리를 잡는데 지관地官인 할아버지를 모셔가곤 했다. 가끔 육지에서 온 방물장수가 온 날이면 할아버지의 사랑방은 할머니와 동네 여인네들의 대화방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지금도 머리에 깊이 남아 있는 한 사람. 시각장애인이었던 함표 아저씨가 있다. 이분은 마을의 대소사大小事가 생기면 어김없이 나타나셔서 음식을 드시고, 할아버지 사랑방에서 며칠씩 기거하다 다른 마을의 대소사가 생기면 떠나가곤 하였다. 함표 아저씨는 우리에게도 점을 쳐 주기도 했는데 붓통 같은 곳에 대나무로 깎은 여러 가지 표식이 있는 기구를 흔들어 점을 봐주곤 했다.

어린 시절 카랑카랑하신 목소리와 긴 수염, 늘 한복이나 마고자 차림의 할아버지가 어제 일처럼 뇌리에 생생하다. 그래서 ‘아름다운 유년의 기억들은 퍼내고 퍼내도 끝이 없는 우물물과 같다’라고 바슐라르는『몽상(夢想)의 시학詩學』에서 말하고 있다. 지난가을 고향에 가서 아무도 살지 않는 고향 집 주변을 포클레인을 빌려 정리했다. 유년 시절 행복한 추억을 선사하고 떠나신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나도 퇴임 후 그곳을 예쁘게 단장하고 살아볼까 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