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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상오리 Nov 26. 2022

9. 여행 가이드도 여행이 즐거울까

[8개월 태백 살이]

  여행지의 숙소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두 가지다. 화장실이 깨끗한지, 침구가 깨끗한지다. 아무리 화려한 외관으로 인테리어 해 놓은 숙소라도 이 두 가지가 안 갖춰진 곳이라면 눈살이 찌푸려진다. 반대로 특별할 것 없는 숙소라도 화장실과 침구가 깨끗하면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허름한 자취방이지만 이따금씩 멀리서 와주는 손님들이 있다. 고속도로도 없고 KTX도 없어 굽이굽이 돌아와야 한다는 접근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강원도 태백까지 올 정도면 소중해도 보통 소중한 이들이 오는 게 아니다. 주로 가족, 연인, 절친한 친구다.

 

한국문화여행 태백선 01, 한국 교육방송공사, 공유마당, CC BY


  손님이 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며칠 전부터 분주하다. 손님용 이불을 빨고, 화장실 구석구석을 청소했다. 이불이 보송보송하게 말라 섬유 유연제 냄새를 풍기고 화장실에 광이 나면, 그제야 손님맞이를 위한 큰 준비는 된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도착한 손님들은 보통 멀리서 오느라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보일러 온수 모드를 한번 더 확인하고, 손님이 먼저 씻도록 들여보낸다. 오래 씻으면 씻을수록 괜히 기분이 좋다. 뜨끈한 물을 맞으며 샤워를 즐기고 있다는 생각에서다. "편하게 씻었어?" 눈치라도 보듯 얼굴색을 살핀다. 상쾌한 표정으로 상대가 고개를 끄덕여보이면 그제야 마음이 놓인다.


  하나뿐인 침대는 손님을 위해 내어 주고 새로 세탁한 이불을 깔아준다. 다음날 아침잠에서 깬 상대방의 얼굴을 보면 기다렸다는 듯이 편하게 잤냐는 질문이 튀어나온다. 잘 잤다는 대답을 들으면 마음이 기지개라도 켠 듯 가뿐하다. 비록 딱딱한 바닥에서 자느라 밤새 뒤척였고 몸 여기저기가 뻐근하지만 "나도 잘 잤어."하고 밝은 웃음을 지어 보일 힘이 생긴다.




   멀리 찾아와 준 소중한 이들을 데리고 태백 여행을 하다 보면 같은 장소를 수차례 방문하게 된다. 매번 가는 정해진 여행 코스가 생기고, 날씨와 계절에 따라 약간의 변주만 주는 식이다. 어느덧 사실상의 '태백 여행 가이드'가 되어 손님들을 데리고 다녔다.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첫 목적지로는 황지연못을 주로 찾았다. 집에서 차로 10분도 채 안 걸리기도 하고, 낙동강의 발원지로도 알려진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여행을 시작하면 여행의 시작점과 남한지역에서 가장 긴 강의 시작점이 맞물리는 의미 있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상류 중의 상류답게 바닥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일 정도로 물이 맑고 깨끗하다.



직접 촬영, 황지연못, 찬물에서 오래 버티기 내기 중인 가족들의 발


  황지연못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산양목장이 있다. 차를 한껏 털털거리며 오르막을 올라야 볼 수 있는 곳이다. 과거 사슴 목장이던 곳을 산양 목장으로 탈바꿈했다 한다. 태백을 둘러싸고 있는 산봉우리들을 배경 삼아 산양들이 풀을 뜯는다. 목장 한쪽에 놓인 흔들 그네에 앉아 산양이 노니는 풍경을 보고 있으면 평화로운 한 폭의 그림에 들어온 것 같다.


   산양목장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보이는 바람의 언덕도 장관이다. 특히 고랭지 배추 농사가 한창일 때는 언덕 전체가 신선한 녹색이다. 입이 쩍 벌어질만한 규모의 배추들의 향연으로 그 자체가 광활한 풍경이다. 이 많은 배추를 층층이 이동하며 심었을 이들의 노고를 생각하면 아찔한 생각마저 든다. 인적이 드문 틈을 타 슬쩍 마스크를 내려보면 배추 냄새가 콧속으로 훅 들어온다. 언제까지고 코를 킁킁대며 맡고 싶은 달큰한 향이다.


직접 촬영, 바람의 언덕, 언덕을 수놓은 배추들


  태백산 국립공원도 잊지 않고 꼭 찾아야 할 여행지다. 태백산 국립공원까지 차를 타고 이동해도 좋지만, 날 좋은 봄날에는 국립공원으로 향하는 산책로 양옆을 화려하게 장식한 벚꽃나무 사이를 걸어보는 것도 좋다. 이미 전국 대부분 지역의 벚꽃이 절정을 지나고 떨어질 무렵, 겨울이 길기로 유명한 태백에서 피어나는 벚꽃은 그제야 봄의 시작을 알린다. 태백산 국립공원에서 이어지는 등산로 초입은 경사가 완만하다. 산 전체를 등산할 필요 없이 수다를 떨며 잠깐만 걸어도 태백산의 고요함과 평화로움을 맛볼 수 있다.



 

  수 차례 방문하는 여행지지만 매 순간이 새로웠다. 첫 여행 때는 눈앞의 다채로운 풍경에 넋을 빼앗기지만 두 번 세 번 찾아갈수록 함께 있는 이들의 즐거워하는 얼굴이 점점 더 크게 보이고, 어느 순간부터는 소중한 이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자체가 여행의 기쁨이 된다.


  시리도록 차가운 황지연못에 발을 담근 가족들의 즐거운 비명소리, 베이지색 원피스를 입고 산양을 쓰다듬으며 웃던 언니의 얼굴, 만개한 벚꽃에 감탄하며 친구와 내딛던 걸음, 태백산이 내다보이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는 연인의 옆모습, 불어오는 바람마저 그림처럼 아름다운 이들의 모습을 더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것인 듯 느껴지던 순간들. 그 순간들은 여행지의 멋진 풍경 그 이상의 의미로 남아있다.


직접 촬영, 태백산 국립공원 초입 카페, 태백산을 내다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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