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개월 태백 살이]
드디어 차가 생겼다. 하얗고 작고 귀여운 차다. 차가 생기면 꼭 해야지 하고 벼르던 게 있었다. 바로 가야금 배우기다. 전에 시내에 나갔다가 우연히 작은 가야금 학원을 발견하고는 가슴이 콩닥거렸다. 차 없이 가기는 먼 거리였기에 언젠가는 가겠다는 소망을 품고 학원 입구 사진만 찍어 놓았었다. 드디어 접어두었던 소망을 펼칠 날이 온 것이다.
가야금에 대한 로망을 처음 갖게 된 것은 중학생 때였다. 친구네 집을 처음 방문한 날, 친구 어머님은 방문을 반쯤 열고 가야금을 타고 계셨다. 예쁘고 사근사근해 늘 선망의 대상이던 친구의 집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다. 그런데 친구보다 더 선녀 같은 모습으로 가야금을 타고 계시는 어머님을 만나게 될 줄이야! 어머님은 방문 앞에서 구경하던 나를 불러 앉히고 가야금 몇 곡을 연주해주셨다. 슬픈 듯 경쾌한 가야금 소리는 들을수록 사람을 빠져들게 했다. 그때부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악기는 가야금이 됐다.
가장 빠른 일정으로 수업을 등록했다. 수업이 있는 날이면 퇴근 후 두유나 계란 같은 걸로 간단히 배를 채운 후 차를 끌고 학원에 갔다. 손가락을 퉁기면 가야금 현은 정말로 노래를 했다. 연주법에 따라 굵고 떨리는 소리를 내기도 하고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뚝 끊기는 소리를 내기도 했다. 표현하고 싶은 감정은 많지만 안타깝게도 음치인 내가 소리로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해주는 기특한 악기였다. 가야금 현의 울림을 들으며 더듬더듬 손가락을 움직이다 보면 수업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주 1회 수업은 나를 애타게 했다. 한창 사랑에 빠졌는데 일주일에 한 번만 가야금과의 만날 수 있다는 건 가혹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중고 장터에서 가야금을 구입했다. 주말 낮이면 몇 시간씩 가야금을 연주했다. 멀리서 친구가 방문한 날이면 이렇게 비치해 놓은 악기로 작은 연주회를 열어주기도 했다. 물론 서툰 실력 탓에 중간중간 멋쩍은 웃음을 지어야 했지만 말이다.
취미는 직업 활동과 성격이 다르면 다를수록 좋고, 악기나 그림, 글쓰기처럼 생산물을 만들면 최상이라 한다. 직장에서 우리가 내놓는 모든 결과물은 평가의 대상이 되고 순위가 매겨진다. 사람들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느냐가 내 가치를 결정한다고 생각할 때 사람은 쉽게 불안해지고 조급해진다.
취미는 이러한 모든 평가로부터 자유롭다. 직장인이 취미 삼아 그림을 그리는데 좀 못 그렸다고 해서 세상이 나를 손가락질하지 않고, 음악가가 아닌데 악기를 서툴게 연주한다고 내 가치가 깎이지 않는다. 성과에 연연하지 않고 순간의 즐거움에 흠뻑 젖어드는 시간, 이런 시간 덕분에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버벅거리고 서툴러도, 아니 버벅거리고 서툴러서 나는 내 연주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