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타인

#가족 01

by 콰랑
그래도 가족이잖아.

잔인한 한마디가 아닐 수 없다. 미디어가 포장한 가정의 불가사의한 따스함과 결속력은 놀라울 정도로 촘촘하게 대중의 의식을 잠식하고 있다. 나이가 들 수록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족 문제에 대해 본인이 충분히 안다고 착각한다.


짧게 생각하고 쉽게 조언하며,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한다. 다들 언젠가 부모가 되고, 그 입장이 되다면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누구나 겪는 일이니까. 가족이라는 대 공통점 아래 특수한 케이스란 없으니까.






부모 자식이나 형제자매의 사이가 보다 가까 수도 있다. 하지만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혈연은 외부인과의 관계와 본질적인 차이를 가지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에게 먼 타인이거나 가까운 타인일 뿐이기 때문에, 똑같이 말과 행동에 예의와 책임을 다해야 한다.


상대가 어리거나 본인에게 법적으로 예속된 채라고 해서 '가족이니까', '시간이 지나면', '너도 내 나이와 입장이 되면' 이해해 줄 것이라는 기대로 소통에 소홀해서는 안 된다. 바쁘고 정신없이 살다 보면 이런 것들을 놓치기 마련이라는 변명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은 본인 몫의 짐을 남에게 넘기는 일이다. 당신이 마음 편히 그렇게 생각하자고 결심한 순간 누군가의 마음이 방치 속에 상처로 멍들고 영영 풀릴 수 없는 앙금으로 남는다.


보통 문제 구성원이 먼저 시작한다. 그 사람은 같이 살면서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킨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구성원들은 서로에게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된다. 기울어진 관계 속에서 벽에 대고 소리치며 속절없이 나이를 먹으며 늙어간다. 그 나이 듦의 세월에서 이따금 이해와 후회의 감상에 잠기도 하지만 별로였던 궁합이 변하지 않는다. 지긋지긋한 관계가 위태롭게 반복된다.


그런 일들은 마음 한켠에 남아 성격의 일부로 굳어져 인생 속에서 기분 나쁜 영향력을 행사한다. 묻어둔 갈등은 이따금 수면 위로 떠올라 사람을 미치게 만들고 주변인을 당황시키 한다. 그런 스스로가 싫었다가, 다시 가족이 미웠다가 하다 보면 또 시간이 흐르는 것이다. 마치 시간이 해결해 주기라도 할 것처럼.


기본적으로 그런 갈등은 시간 안에서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갈등이 시간이 지나 마치 해소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 정신적으로 성숙한 쪽이 지쳐서 타협하는 과정이다. 그냥 상대가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사는 것이다.


매체에서 다루는 가정의 감정적 합리화는 놀라울 정도다. 미디어 속의 가족의 모습,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그래도 가족이잖아." 하는 위로는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격이다.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사람에게는 영구 면제권을 선사하고, 서운한 마음을 안고 사는 이에게는 영구 이해심을 요구하는 잔인한 말이 되어 의도와 다르게 상대를 감정의 벼랑 끝으로 내몰게 된다.


가정 내부의 미묘한 갈등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집마다 그 양상이 제각각이라 조언을 구하기도 어렵다. 또 소수의 무결한 가정에서 자란 이에게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인 것도 분명하다. 그들에게 부모와의 갈등은 청소년 성장 소설에서나 등장하고, 정서적 성숙과 함께 멋지게 마무리되는 한 때의 해프닝과 같은 것이다. '넌 왜 부모님하고 사이가 나빠?' 글쎄. 간단히 대답하기에는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까.


하지만 언젠가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의 껍데기를 벗기고, 그 적나라한 상처를 마주 볼 용기를 내자. 태어나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사람들과 같이, 가족 또한 인간관계의 한 분류에 지나지 않는다. 부당한 서운함을 참고 사는 것은 당연하지 않다. 서운한 것은 서운한 것이다. 뭔가 이상하면 이상한 것이다. 앞으로 몇 년은 몰라도 평생을 바라본다면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