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할 수 없던 순간들을 위한 변명
“Call me by your name, and then I'll call you by mine"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두 주인공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후, 올리버가 엘리오에게 속삭이는 대사이다. 영화 자체에 대한 선호와 무관하게, 이 대사는 내가 이제껏 본 모든 영화를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대사이다.
이 대사를 곱씹기 위해 난 매해 여름이면 이 영화를 보아왔다. 이 영화는 쉽게 말해 사랑 영화이다. 그러나 그 흔한 'I love you' 같은 사랑 고백은 들을 수 없다. (난 이 점이 저 대사와 영화를 내가 매해 찾는 이유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사랑한단 말이 없이도, 저 대사는 그야말로 완벽한 사랑 고백이다. 만일 누군가 나에게 저런 고백을 했다면 난 아마 속절없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이해해 보겠노라, 내 온 마음을 주겠노라 결심했을 것이다.
당신만은 진정한 날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 알 수 없이 샘이 나고 닮고 싶은 감정, 종일 미워하기에 그 사람만을 떠올리는 하루. 동경인가 싶다가도 벗어나고 싶은 울렁거림. 미운 행동을 해서라도 날 거슬려 했으면 하는 삐그덕거림. 소중한 것들을 나누고 싶은 팽팽한 공기, 무거워지는 마음이 두려워 애써 가벼이 하는 행동. 끝없이 이어지기만 하는 궁금증.
그뿐인가 달콤하게 끈적이는 복숭아의 향기, 차갑게 번지는 계곡의 물. 설익은 달빛과 나무 바닥의 거칠함. 한낮의 반짝임과 바스락거리는 종이의 감촉. 사늘하게 목을 간지럽히는 목걸이의 진동. 공연히 피워보던 담배의 연기. 출렁이던 저녁의 바다. 부서지듯 엇나가던 피아노의 선율.... 이 모든 것과 함께 박제된, 순간과 마음들을 단순히 ’사랑‘이란 이름으로는 가둬둘 수 없다. 이름 짓기에는 내가 너무 작은 그런 것들이 이 세상엔 존재한다. 그렇기에 나에게 저 대사는 가장 완연한 사랑의 표현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점차 어떤 감정과 관계, 존재에 이름 붙이는 게 두려운 것 같다. 나에게 의미 있는 무엇이 생기는 부담감, 적절한 이름을 지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날 비겁하게 만든다. 이 기분은 슬픔일까. 분노일까. 아니면 그저 안타까움일까. 분노라 이름한다면 난 그걸 감당할 수 있을까. 슬픔이라 이름하면 난 이 감정을 위로할 수 있을까. 안타까움이라 하기엔 이 마음들은 너무나 다채롭다.
나에게 이름을 붙이는 일은 연신 오답만을 내뱉는 퀴즈쇼와 같다. 답을 고민하는 순간은 모든 것이 답일 수 있었지만 내가 말을 내뱉는 순간 나에게 내려지는 선고와 같은 오답! 어딘가에는 있을 정답을 맞혀야 한다는 절박함이 도리어 그럴듯한 오답만을 만들어내는 이 퀴즈쇼의 출제자는 웃기게도 나이지만.
일단 잘 모르겠으니 미뤄보자. 자신이 없으니 유예하자.... 한참 가이 없는 마음과 상태를 떠돌다가 마침내 이름을 붙일 수조차 없는 작음을 발견하는 날이면 영화 속 두 사람이 자신의 이름으로 상대를 부르는 장면을 떠올리곤 했다. 사랑이라 차마 이름할 수 없던 거대한 감정 앞에 선 두 사람의 선택은 서로의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었다. 올리버의 저 완벽한 고백을 구차한 말로 풀어쓰자면 “모든 순간의 너와 나를 그대로, 온전히 느낄게” 라는 의미겠지. 그 순간 두 사람은 온전한 서로를 느꼈을까. 영화 마지막 공중을 표류하는 서로의 이름은 여전히 원래의 주인을 닮았을까.
두 사람의 이름 끝에서 난 어디에도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나를 부끄러워했다. 나에겐 나의 이름을 붙여줄 온전한 나조차 없었기에 다른 것에 이름을 붙이지 못하는 것일까. 나에게 민감한 만큼이나 마음의 바깥에는 무신경해서 수많은 무명의 하루를 보내는 것이겠지. 나만의 것에는 이름이 필요없으니까. 나의 무의미는 이렇게나 비겁하구나...
애초에 적확한 이름을 짓는 건 어려운 일임을 알고있다. 내가 지은 어떤 이름도 내 성에 차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그러니 오늘도 어쩔 수 없다. 이 애매하고도 황홀한 심사를 이겨낼 도리가 없는 작은 나는 그저 그런 이름 하나를 정답으로 내고 패자부활전을 기다리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