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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 나 Dec 28. 2023

이상한 정상

얼마 전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나오다 그를 만났다. 일명 '인문대 신양 래퍼(인신 래퍼)'로 불리던 그는 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는지 도서관 라운지에 앉아있었다. 학생들이 자주 모여 조별 과제를 하는 인문대 신양 건물에 상주하는 그를 모르는 인문대 학생은 없었다. 그는 늘 같은 자리에 앉아 중얼중얼 염불을 외듯 알 수 없는 말들을 내뱉는 사람이었다. 그는 한 마디로 말해 이상한 사람이었다. 계절에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것은 물론이었다.

그는 학생들이 등교하는 시간보다도 이른 시간에 등교해 인문대 한 켠 자기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항상 하는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을 시작한다. 그는 학교가 여는 모든 요일에 등교했으며 도서관 운영 종료를 알리는 음악 소리와 함께 자리를 떴다. 부지런하게도 이상한 이 사람에게 궁금증이 생긴 건 나만이 아니었다.

인문대 학생 모두가 알고 있는 그의 별명이 증명하듯, 그는 우리 모두의 관심을 받는 존재였다. 그가 볕도 잘 들지 않는 건물 한 켠에서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말들을 중얼거리게 된 사연에 대해 여러 말들이 도는 것은 그의 존재감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은 오래전에 학교를 졸업한 선배인데, 오랜 고시 실패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인문대에 남았다더라, 원래 우리 학교를 오고 싶어 하던 장수생이었는데 끝내 성공하지 못해서 유령처럼 학교를 떠돈다더라. 그를 둘러싼 소문은 이런 것이었다. 그가 설정한 이상이 그의 현실에 비해 너무 높아 그가 현실 부적응자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 그는 타산지석처럼 우리에게 높은 이상을 품는 것의 위험을 경고하는 '이상'의 화신이었다. 졸업이 가까워질수록 우리들은 우리보다 성실히 자리를 지키는 그를 보며 그의 좌절된 꿈을 애도하고 드높은 이상을 경계했다.

졸업과 함께 그의 존재는 희미해졌다. 나는 내 나름대로 삶이 바빴고 코로나로 학교 대부분의 건물들이 폐쇄되면서 그가 있을 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가 가벼이 만들어낸 추문처럼 그는 쉽게 잊혔다. 그랬던 그가 무대를 옮겨 도서관 라운지에 다시 나타난 것이었다. 다시 마주친 그는 놀라울 만큼 똑같았다. 마치 기억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동일한 복장, 같은 등의 각도, 일정한 템포로 흔들거리는 팔, 심지어 머리가 헝클어진 정도까지. 과거 경계의 대상이었던 그는 이제 어딘지 모르게 대단해 보였다. 부지런하게 이상한 그에게 다시 시선이 갔다. 알 수 없는 연민 같은 것도 느껴졌다.

그를 보면서 이상이란 무엇일까 불현듯 생각했다. 김종길의 <고고>라는 시에서는 얕게 내린 눈이 한 겹 덮인 산의 높이가 얼마나 고고한가를 이야기했다. 많은 눈도 아닌 어느 겨울의 아침 잠깐 쌓인 한 꺼풀의 눈으로만 회복할 수 있는 높이. 살다 보니 내가 느낀 이상이란 그런 것이었다. 얕은 한 겹의 눈이라 어렵지 않게 이룰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래서 이루기 어려운. 왕창 내린 눈으로 쌓인 높이가 아니라서 장밋빛의 햇살이 닿는 것만으로도 변질되어 버리는. 그런 것이 고고한 이상이었다.

그를 경계하던 우리는 몰랐다. ‘이상’이란 어떤 것인지. 그는 거대한 이상의 화신으로 여겨졌지만, 사실 이상이란 거대해서 먼 것이 아님을 몰랐다. 이상이란 대단하지 않아서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의 여운이었다. 이상주의자가 현실에서 느끼는 간극은 거대해서가 아니라 종이 한 장의 차이라서 잔인한 것이었다. 좋은 딸, 다정한 언니, 멋진 친구, 똑똑한 학생, 사랑스러운 여자친구. 나의 이상들은 대체로 이런 모습이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던 이상 속에서 난 불을 향해 뛰어드는 나방의 그것을 희망하며 침잠해 왔다. 난 이상과 현실의 종이 한 겹을 어쩔 줄 몰라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를 너무 오래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른 시선을 돌렸다. 그는 이상한 사람이다. 정말로. 이상한 사람이다.. 몸을 돌려 도서관을 나서는데 유달리 내가 입은 정상의 옷이 크게만 느껴졌다. 내가 지어 입은 정상은 기실 어쩔 수 없던 종이 한 겹을 오리고 붙여 만들어낸 옷에 불과했으니까.  그의 이상함을, 좌절된 꿈을 비웃을 자격이 내겐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아니 그의 꿈이 좌절되었던 적 있었나. 나의 고고한 이상은 그의 이상과 얼마나 다른 걸까. 한 겹의 종이를 어쩌지도 못하면서 한 겹의 이상, 그 고고한 높이를 찾아 헤매는 난 이상한 정상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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