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가장 인상 깊은 크리스마스는 어린이집에서 맞이한 첫 크리스마스였다. 어린이집 선생님은 크리스마스가 있는 주에 트리 아래 선물을 쌓아두고 산타 할아버지가 직접 선물을 주실 거라고 하셨다. 정말로 그즈음이 되자 트리 밑에는 상자가 쌓였고 우리는 산타 할아버지가 오는 날만을 기다렸다.
산타 할아버지가 오신다는 그날, 크리스마스트리 밑에서 내 친구들이 나를 불렀다. 선물 중 포장 상태가 미흡해서 안에 내용물이 드러난 선물이 있었던 것이다. 안에 선물은 세상에나 놀랍게도 당시 유행하던 만화 주인공의 요술봉이었다. 흔들면 현란한 불과 반짝이는 소리가 나는 찬란한 요술봉은 나도 정말 갖고 싶은 선물이었다. 난 요술봉을 늘 가지고 싶었지만 부모님은 아쉽게도 쓸모없는 장난감을 왜 사는지 전혀 공감하지 못하시는 편이었고 난 말수가 많지 않은 아이라 조르지도 않았던 탓에 늘 크리스마스 선물로 창의 교구, 책 같은 것들을 받아왔었다. 그런데 이런 나에게 요술봉으로 놀 기회가 생긴 것이다! 산타 할아버지가 내 조용한 소원을 들어주신 것이 틀림없었다. 그때부터 요술봉 생각에 난 정신이 없었다. 점심시간 이후 산타 할아버지가 오신다는 말에 엄청난 속도로 밥을 비우고 복도에 나가 산타 할아버지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상상하던 모습 그대로 산타 할아버지가 어린이집에 등장했을 때는 너무 좋아서 까무러칠 뻔했다. 이제 요술봉은 내 것이다!!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나눠주실 때는 거의 날듯이 뛰어나갔던 것 같다. 내가 얼마나 착하게 살았는지 목이 떨어져라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하고선 선물을 받아 들고 내려왔다. 그런데 잔뜩 기대에 차 포장지를 풀자 나온 것은 목도리였다. 반에 여자아이들 모두 다가 요술봉을 받았는데, 나만 목도리를 받은 것이었다. 울면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도로 가져가실까 봐 눈물을 꾹꾹 참으면서 집에 돌아와 나는 울기 시작했다. 나만 요술봉을 받지 못했다고 사실은 나도 요술봉을 가지고 싶다고 어머니한테 말했다.
아마 어머니는 유치원에 전화를 해봤던 것 같다. 뚝뚝 눈물을 흘리는 나에게 조금 있다 어머니가 돌아와 '우리가 산타 할아버지한테 잘못 전달했나 봐. 네가 요술봉에는 관심이 없는 줄 알았대, ○○이가 의젓해서 아가들이 노는 장난감은 안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셨대'라고 나를 달래기 시작했다. 아마 어머니는 몰랐겠지. 그 말이 나의 서러움 버튼을 눌러버렸을 줄은. 나는 그 말을 듣고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자세히는 기억 안 나지만, 내가 했던 말은 대체로 나도 아가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어린이집 선생님과 부모님을 위한 변을 해보자면, 나는 그때 비록 얄궂은 수준이었지만 형님반으로 책임감을 막중히 느끼고 있었다. 동생은 아파서 부모님께 자주 투정을 부리면 안 된다고 주변 어른들이 말했고, 어린이집에서는 형님반이니까 의젓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인지 유행하는 만화를 엄청 좋아하면서도 좋아한다는 티조차 못 내고 좋아하는 장난감으로 놀고 싶어도 놀고 싶다고 말 한마디 못하는 아이였다. 부모님과 어린이집 선생님은 그러니 당연히 내가 유행하는 만화를 엄청 좋아한다는 것을, 사실 나도 장난감이 엄청 가지고 싶고 어리광도 피우고 싶다는 것을 잘 몰랐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약 1년 간 형님반으로 살면서 서러웠던 내가 크리스마스 선물 앞에서 나도 아가이고 싶다고 엉엉 운 것이다.
나도 아가이고 싶다는 말은 결론적으로 부모님께 엄청난 충격이었던 것 같았다. 여전히 나를 아가라고 부르는 일은 없었지만 그 해 이후로 크리스마스 다음날 머리맡에는 유치하지만 귀여운 장난감들이 놓이기 시작했다. 부모님의 육아 난이도도 올라갔다. 목도리 사건 이후로 산타 할아버지께 직접 내 의사를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나는 산타 할아버지께 전화할 테니 뭐 갖고 싶은지 말해보라는 부모님의 말에 완강히 거부 의사를 표했다. "내가 직접 말할래. 내가 전달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다행히 어린아이의 치밀함은 얕은 것이었다. 전단지에 크게 뭘 가지고 싶은지 동그라미 쳐 놓고 이불 위에 두는 다소 투명한 방식을 택한 덕분에 나와 산타 할아버지의 소통은 성공적으로 끝날 수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나의 동심도, 크리스마스도 지켜질 수 있었다.
시간이 흘렀다. 몇 번의 크리스마스가 지나는 동안 어느새 난 산타가 없다는 것도, 더 이상 어리광을 피울 수 없다는 것도 수월하게 받아들였지만 여전히 난 내가 직접 하겠다는 고집만은 꺾지 않는 어른으로 자랐다. 집에서 나의 별명은 소 힘줄인데 그 별명은 내 일은 내가, 누구의 도움 없이 나만이 하겠다고 우겨 대는 통에 생긴 별명이었다. 좋게 말하자면 독립적이겠지만, 나쁘게 말하자면 누군가의 도움과 마음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으로 자라난 것이다. 이런 강고한 나에게 균열이 생긴 건 지난 겨울의 일이었다.
지난 겨울, 나에게는 작은 사고가 있었다. 사고 후 대학 병원을 가라는 다른 병원의 권고에 따라 응급실로 향했다. 다행히 난 의식은 멀쩡했다. 그래서 제 발로 응급실에 가 수속을 밟고 검사를 받으며 처치를 기다리고 있었다. 혼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응급실에 있다는 것은 알려야 할 것 같아서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약 1분 간 아무 말이 없던 부모님은 조용히 "갈게." 한 마디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코로나로 인해 보호자는 한 사람만 출입 가능했던 응급실에 처음 들어선 건 아버지였다. 부모님이 도착했을 때 난 이미 모든 검사와 처치가 끝났고 검사 결과도 다 괜찮은 상황이었다. 얼마나 부주의했으면 이런 사고를 당하냐는 류의 잔소리를 들을 준비를 하고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아버지는 정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내 얼굴만 한참 보다가 버석 마른 목소리로 "우리 아가.... 괜찮니?"라고 물었다.
28살이나 먹고 아가라는 말을 듣는 이 상황이 어색했다. 웃으면서 "○○쓰.. 28살인디.."같은 장난을 쳤지만 더 했다간 아버지가 울 것 같아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아니 사실 울 것 같은 건 나였다. 수속도, 처치도 모든 절차도 다 혼자서 무사히 잘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아가라는 말에 뭔가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다시 아직 자라지 못한 형님반 ○○이가 되어 그곳에 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그때 느꼈다. 그 크리스마스 이후로도 부모님의 마음속에서 난 자라지 못했구나. 또 내가 혼자 자랐어야 했던 시간만큼 부모님은 무수히 날 아가라고 불렀겠구나.
내가 다친 날은 바람이 차고 공기가 쩡쩡 시린 겨울이었다. 병원 문을 나서면서 정적에 휩싸인 분위기를 깨고자 춥다고 호들갑을 공연히 떨어보던 그런 계절이었다. 말을 하려고 입을 열면 펑펑 입김이 솟아나 구름이 만들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따뜻했다. 내가, 아니 우리가 만들어낸 구름 속에서 나의 시린 계절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요즘 백화점에서는 크리스마스트리를 내놓고, 거리에 서면 코 끝에는 붕어빵의 달큰한 냄새가 감돌기 시작했다.
겨울이다. 추워서, 오히려 따뜻함이 기억에 남는 계절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