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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 나 Nov 07. 2023

버스정류장

  본가에서 자취 방으로 돌아오는 길, 버스를 기다리는데 누가 말을 걸었다. 전도를 하시는 분들의 표적이 잘 되는 나는 습관적으로 경계 태세를 취했다. 몸을 잔뜩 움츠린 채 고개를 돌리자 한 노년의 여성분이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분은 나에게 학생이냐고 물었다. 버스 정류장에는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있었고 여기는 사람이 많이 오가는 길이고, 여차하면 오는 아무 버스나 타면 되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호의 정도는 보여도 되겠지. 나는 대학원생이니 뭐니 하는 상세한 상황은 전하지 않고 ‘네..’라고 답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분은 어떤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나에게 접근한 사람은 아니었다. 말을 건 분은 요즘 학생들이 참 힘든 것만 같다고 말했다. 세상에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데 그 문제에 어느 누구도 화내지 않고 어느 누구도 슬퍼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젊은 사람들이 화내지 않는 건 너무 자기 삶이 힘들어서 그런 것 아니겠냐고도 했다. 당신의 청춘이 힘들어서 누군가 응원해 주기를 바랐다면서, 학생들만 보이면 괜한 오지랖처럼 말을 걸어본다고 했다. 젊은 시절의 당신에게는 어른들이 해주지 못했으니 당신이 어른이 되어 해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나이 든 사람이 하는 응원이지만, 힘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이윽고 오는 버스에 몸을 싣고서 홀홀 내 곁을 떠났다. 

   그분이 떠나시자 내가 앉은 버스 정류장의 자리가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난 얼마나 죽은 눈으로 그분을 돌아보았을까. 그분이 전한 말들을 곱씹자 알 수 없는 뜨거운 것들이 목 언저리에서 찰랑거렸다. 꾹꾹 나를 누르며 버스를 기다리면서 난 얼마나 무감각한 사람이 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얼마 전, 우리 학교 도서관에서 어느 대학원생 한 명이 하늘의 별이 되었다. 공부가 힘들다는 글과 함께였다. 뉴스에서도 곧 그 죽음은 다뤄졌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우리 학교는 고요했다. 커뮤니티도 도서관에도 어떤 추모의 말도 관심도 없었다. 내 주변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렇게 고요해도 되는 것일까. 

   ‘누군가의 죽음을 내 멋대로 기억하자고 말할 수는 없다. 때론 망각이 최선의 애도다…’ 같은 말을 잘근 잘근 씹으면서도 어째서 우리는 이토록 남의 비극에 무감각한가를 생각했다. 도서관 벽면에는 취업 박람회 포스터, 웃음기 가득한 사진을 얹은 동아리 홍보물, 인권에 대해 논하는 한바닥의 글들이 덕지 덕지 붙어있었다. 벽면을 가득 메운 청춘의 조각들에는 이제 누군가의 아픔 같은 것들은 발 디딜 자리가 없는 것 같다. 

   도서관에서 있었던 사건을 들은 내 지인의 첫 반응은 “그 사람도 이기적이다… 하필이면 도서관이냐? 발견할 사람들은?”였다. 뉴스 기사의 댓글도 비슷했다. “그렇게 힘들면 일하지.. 누가 등 떠밀었나..? “와 같은. 흠칫했다. 너무 차가웠다.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간다고 그랬는데, 이토록 식어버린 마음들이 너무 잔인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잘못된 것일까. 잔뜩 굳어버린 말을 내뱉기까지 저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감각들을 도려내야 했을까. 이런 생각 속을 방황하다 보니 또 다시 버스 정류장에서 느꼈던 울멍진 감정들이 떠올랐다. 우리는 아마 힘들어서, 분노도 슬픔도 표현할 에너지가 없는 건가보다. 

   나의 기자 친구는 나에게 이 사건들에 대해 아는 것이 없냐고 물었다.  난 ‘아쉽게도 아는 게 없다.’고 답했다.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기보다 아는 것이 없어서 아쉬웠던 나는 얼마나 무감각한 사람일까. 나의 무감각함이, 공감의 여지가 없는 이 세상이 날 울컥하게 만든다. 우리의 감정들은 얼마나 스러져야 했을까, 앞으로도 더 닳아야 할 감정이 남아있을까? 더욱 시간이 지나면 나도 젊은 누군가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을까. 난 아마 아직도 그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지 못한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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