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미리는 어려운가요

by 날마다 하루살이
녀석은 중1성장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표정이 무채색이고 대답도 간결한 보통의 날이었다. 이제 점점 익숙해지는 표정과 말투이다. '보통'이라 표현하고 받아들일 만큼 난 적응했다. 아침까지만 해도 살랑거릴 정도는 아니어도 가벼운 목소리였는데 왜 그럴까.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나? 왜 자꾸만 녀석의 눈치를 살피게 되는지 이런 시간이 언제쯤 끝이 나려는지 궁금하기만 한 시간들이었다.


나의 궁금증을 풀어준 건 저녁을 먹고 난 뒤였다. 녀석이 조용해 방을 들여다보니 잠. 들. 었. 다! 아.. 피곤해서였구나~! 지난밤.. 그러니까 일요일 밤늦게까지 사회 수행 평가가 있다며 공부방에 들어가 있더니 피곤했나 보다. 녀석이 해야 할 일을 밤 늦.게.까.지 성실히 수행하고 몸을 누인 것이니 참 기특하고 안쓰럽다...라고 여겨지는 마음이 든다면 얼마나 좋을까. 녀석은 주말 토, 일 이틀을 실컷 폰만 보다가 일요일 저녁에서야 수행평가 준비를 시작했다. 기말고사가 다가오지만 마음이 조급하고 불안한 건 엄마 마음이니 이를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수행평가 준비도 미리 조금이라도 일찍 시작했더라면 남는 시간에 다른 공부를 더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아쉬움을 남기고 휴일은 그렇게 지나갔다. 녀석에게서 참견을 거두고 나니 집안에 돌던 긴장감은 사라졌지만 이게 맞는 건지에 대한 의문은 남았다.


어제 월요일도 학교 마치고 돌아와 한숨 자고 일어나 실컷 폰도 보고, 저녁 먹고 나서 샤워도 마치고 밤 9시가 넘어서 겨우 공부방으로 들어갔다. 이제라도 들어가니.. 게다가 학교 마치고 잠이라도 잤으니 제대로 공부 좀 하려나보다... 했더니 잠시 후 다시 나와 무언가 하고 있다. 그 무언가는 바로 치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상황이지만 절대로 내 맘 속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슬쩍 한 마디 해본다.


"○○.. 있잖아.. 너하고 엄마는 우선순위가 참 다른 거 같아~!"


말이 길어지면 서로에게 좋지 않은 상황으로 이어질까 하여 짧게 말을 끊고 들어와 폰을 보고 있었다. 녀석이 평소와 다르게 쪼르르 따라와 한마디 한다. 나름 억울했나 보다.


"엄마가 내 맘을 어떻게 알겠어~!"


어라? 요 녀석 봐라~ 평소 같으면 맘 상해서 말도 안 하고 그냥 토라져 있을 줄 알았는데 나에게 말을 붙인다고?


"뭐야~~ 그럼 네 생각이 뭔지 얘기해 봐~ 듣고 싶어."


녀석이 무슨 말이든 자꾸 하도록 하는 게 요즘 내가 건네는 대화의 주된 목적이다. 입 꾹 닫고 회색빛 표정으로 있는 것은 더는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말을 받아줄지 궁금 궁금.. 조마조마.. 잠깐의 1초가 지나자 기적같이 바로 답변이 이어졌다.


"공부 마치고 나오면.. 으이.. 가족들이 모두 잠든 시간이어서 내가 치카한다고 뚝딱거리면 ..으이.. 방해될까봐..으이..지금 하는 건데 엄마는 내 맘을 몰라주고~"


아니.. 이렇게 긴~~~~ 말을 그것도 이렇게 부드럽게 네가 할 수 있다구?


그래.. 그 배려심도 기특하게 여겨지는 상황이라면 얼마나 좋겠니... 왜 그런 감정이 생기지 않는 건지 요즘 참 이상한 엄마 맘이다. 그치? 1년 전까지만해도 이런 상황에 이런 말이었다면 엄마의 감정 주머니가 울렁거리면서 마구 감동했을 텐데 말이야.


조금 더 집중하는 시간이 길어졌으면...

폰 놓는 시간이 좀 더 앞당겨졌으면...

밥 먹는 시간도 더 단축되었으면...

샤워하는 시간도 더 짧아졌으면...


내가 녀석에게 바라는 모든 것이 결국에는 '공부 시간 늘리기'로 집결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지 않냐고 항변하고 싶다. 쿨하게 믿어주던 날이 먼 옛날 같았다.


양치를 하는지 그 뒤에 다음날 발표해야 하는 과학 수행평가는 온전히 잘 마무리하려는지 그저 내 마음을 다스리느라 한숨만 쉬었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새벽에 깨어보니 새벽 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이었다. 녀석이 아직도 공부방에 있었다.

아직도..

안 자고...


해야 할 일을 끝까지 마무리하려는 모습을 기특해해야 하는데 미리미리 하지 않는 습관이 거슬려 고운 마음이 생기질 않는다. 그래도 내 마음 내가 다스려야겠지. 녀석에게는 언제나 이쁜 말만 건네주기로 다짐하지 않았던가.


그래, 그래..

오늘은 수행평가를 무사히 마친 것으로 만족하자.

하루에 하나씩만 만족하면 만족 통장에 만족감이 차곡차곡 쌓이는 날이 오겠지...

기다려 보자.

오늘도 기다리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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