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만이지.. 이렇게 널브러져.. 하루 온종일을..
시간에 쫓기지 않고 지낼 수 있는 하루'라며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일요일이지만 집안에는 나 혼자다. 아이들은 친구 찾아 나섰고 남편은 어머님 점심 사드리러 나갔다. 오래간만에 찾아온 여유를 깬 것은 오후 2시가 거의 다가오는 시각이었다. 슬슬 머리를 굴려 저녁 거리를 생각하고 있었다.
"윤정아~~ 뭐 하나?"
오랜 친구 Y의 전화다. 만나면 반갑고 늘 날 기분 좋게 해 주는 웃음을 가진 친구이다. 일 년에 한두 번 마주치는 우연이 주는 만남이라도 마치 어제 만난 듯 편안한 친구. Y는 가끔 다른 친구들과 모일 때 나를 불러내곤 했었는데 난 그때마다 거절했었다. 물론 사정이 있기도 했지만 새롭게 얽히는 관계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 당시 난 외출이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었다. 아파 누워계신 엄마가 늘 집안에 계셨고, 친구들과는 달리 뒤늦은 결혼과 출산으로 내겐 어린 녀석들이 꼬물꼬물 내 치맛자락에 붙어 지내던 시절이었다. 난 만나고 싶은 친구가 있으면 집으로 초대했고, 친구들은 의례히 그런 줄 알고 날 만나려면 조용히 우리 집을 찾아오곤 했었다. Y는 애들 먹을 과자 보따리를 들고 우리 집 계단을 오르던 친구였다.
이젠 엄마도 안 계시고 아이들도 내 손이 많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자랐다. Y는 나의 사정에 변화가 생긴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굳이 집에서 못 나갈 타당한 핑곗거리를 찾긴 더 힘들어졌다. 하지만 난 또 망설여진다. 잘 알고 지낸 Y를 넘어서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내게 별개의 문제다.
흔히들 말하는 '차 한잔 해~'라든가 '밥 한번 먹자~'가 내게는 가벼운 인사가 아님을 안다. 입 밖으로 나온 말은 공중으로 흩어지지 않고 내 가슴에 박힌다. 그리곤 꼭 지켜야 할 약속으로 자리 잡는다. 그러기에 말 한마디도 신중하게 하도록 난 이미 프로그램되어있다.
"Y야, 지금 혼자 있긴 한데 조금 있으면 저녁 준비도 해야 하고.. 나, 저녁에 김밥 싸려고 김밥거리 사다 놨거든. 미안해~"
전화를 끊고 더 미안해졌다. 저녁 준비해야한다 하니 '더 일찍 만날까?'라고 날 위한 배려 섞인 말을 들었을 땐 또 거절의 말을 이어가기가 난감했다.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친구 E의 얘기도 전해 듣고 친구 E와 다시 만날 때 같이 보자는 다음을 기약했다.
못 나간다고 하면 조용히 내 얘길 들어주던 친구. 어제는 평소와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래도 끝내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맘이 불편했지만 거절의 순간을 피한 댓가로 그 너머의 감당해야할 시간까지 불편해지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도 나는 선택할 것이다. 내가 그 순간 더 원하는 버튼을 누를 것이다. 선택권이 내게 있는 이상 더이상 "잠깐만 참자"는 버튼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