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가기 위한 성장의 길목에서
삶이란 개인을 규정지으려는 수많은 폭력의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고, 끝없는 변화 속에서도 단단한 나 자신을 찾아가기 위한 여정이다.
톰보이는 '나'를 찾아가는 여정 속에 놓인 다양한 여성들을 섬세한 시선으로 담아내는 셀린 시아마의 성장시리즈 중 한 편으로, 성장의 의미와 우리를 연결하는 관계, 개인의 정체성에 관한 끝없는 질문을 던진다.
정체성과 판단, 그리고 범주
우리는 세상을 이분법적 인식론의 토대에서 상상하고 판단한다. 이때 소위 사회가 말하는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젠더를 수행하지 않는 개인들에게는 또 다른 범주를 생성하여 정체성을 규정한다.
'그래서 미카엘은 레즈비언인가? 트렌스젠더인가? 안드로진인가? 스스로를 남자라고 인식하는건가? 그럼 리사를 좋아하는 미카엘은 이성애자가 되는건가? 리사는? 레즈비언인가? 남성인 미카엘을 좋아하는걸까? 여성인 미카엘을 좋아하는걸까? 바이섹슈얼인가? 범성애인가?'
이 영화는 이런 질문들로 생각을 가득 채운 사람들에게 녹아들어 있는 성별고정관념과 정체성에 대한 단선적인 판단들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리고 우리는 '미카엘'을 ‘어떤 사람’으로 함부로 정의 내리려고 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
진입할 수 있는 몸과 거부되는 몸
<톰보이>는 신체에 따라 진입하고 허용될 수 있는 공간을 그려내며, 굳건한 경계를 통과할 수 있는 혹은 통과할 수 없는 몸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 개인이 특정한 젠더를 지향하더라도 소위 문화가 규정해놓은 ‘합당한 몸’의 조건을 갖추지 못하는 순간 그 공간에서 배제되는 신체의 경험을 풀어낸다. 미카엘은 남자 아이들과 운동을 하며 자연스럽게 그들의 문화 속에 동화된다. 그러나 페니스를 지니지 못한 미카엘은 남자 아이들과 자신의 차이를 인지하게 되고, 페니스를 볼록하게 만드는 행위를 한다. 이는 한 개인의 성별정체성을 넘어 어떤 공간에 진입하기 위해, 배제되지 않기 위해 갖추어야 하는 하나의 조건이 된다. ‘어떠한 신체’는 누군가에게 당연하게 주어져 진입하려는 문화에 섞일 수 있는 자연화된 특권이지만, 누군가에는 이 신체를 갈망하게 만드는 사회구조적인 맥락들이 존재한다. 특히 젠더화가 일상화된 사회일수록 두드러진다. 젠더화는 다시 신체로 연결된다. 젠더와 섹스는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젠더가 곧 섹스'라는 버틀러의 담론을 떠올리게 만든다. 페니스가 있는 신체와 없는 신체는 그 자체만으로는 어떠한 가치도 지니지 않는다. 그러나 페니스가 있는 신체와 젠더가 연결되면서 남성성과 남성문화를 구축하는 중심에 페니스라는 신체가 놓이게 된다.
'톰보이'의 다층성
영화제목인 ‘톰보이’는 다층적으로 읽히고 다양한 맥락에서 해석가능한 단어이다. 레즈비언에게 붙기도 하고, ftm에게도 붙기도 하며, 여성이라는 젠더를 수행하지 않는 여성들에게 붙기도 하고, 남성들에게 붙기도 한다. 이분법적 인식론이 골조가 되는 현실에서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그 이분법적 틀에 온전하게 고정되어 살아가는 존재들은 없다. 여성 안에서도 내부의 수많은 차이들이 존재하고, 남성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을 내면화하면서도 동시에 이것에 대한 혼란과 억압을 느끼며 살아간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지금 우리가 서있는 현실 내에서 마주하는 정체성과 연결된 억압과 혼란, 저항들을 보여준다. '톰보이'라는 단어의 다층성 또한 이런 혼란과 중층적인 정체성을 잘 드러낸다.
우리 모두가 걸어가는 성장의 길목에서
영화 마지막 장면. 리사는 로레에게 ‘진짜 너의 이름은 무엇’인지 물어본다. 미카엘, 그리고 로레는 자신의 이름을 말한 채 웃음을 보였고, 영화는 막을 내린다. 리사가 로레에게 이름을 묻는 마지막 장면은 그가 로레이든 미카엘이든 그를 규정지으려는 수많은 장벽과 구조적 경계들을 넘어, 로레 스스로가 자신을 무엇으로 이해하고 있는지 질문하고, 완성되지 않을 그 성장의 여정에 함께할 것임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누군가에게는 어떤 정체성을 상징하는 이미지에 대한 획득과 여러 정체성 중 하나를 대표적으로 발화하고 자신을 그것으로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 정치적 의제이다. 이는 내가 속할 수 있는 공간과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온전한 자신의 이름을 말하기까지, 완성되지 않을 성장의 길에선 우리 모두에게 연대와 환대의 마음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