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본 영화의 감상평을 나누고 애인에게 물었다. "내가 남성으로 정체화한다면 너는 그래도 나를 사랑할까?" 한참을 말 없이 고민하던 애인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러기는 힘들 것 같아." 나 또한 자신에게 질문했다. 지금 애인이 여성으로 정체화를 한다면 나는 여전히 애인을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남성인 이 사람을 사랑하는걸까, 아니면 성별을 떠나 이 사람 자체를 온전히 사랑하고 있는걸까. 이 둘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일까? 혹은 분리할 수 없는 것일까.
자비에 돌란은 <로렌스 애니웨이>를 통해 이성애적 사랑의 근원을 질문한다. 내가 사랑하는 너, 나를 사랑하는 너에게 각자가 무엇으로 이해되고 있는지 질문한다. 사랑의 낭만성에 우리가 도취되는 이유는 에로스적 욕망을 넘어 상대를 통해 나의 결여가 보완되고, 각 개인의 부족함을 완전함으로 만들어주는 신화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자아는 타인의 존재로 완성된다. 타인의 존재, 타인에 대한 비교없이 세상에 덩그러니 놓인 개인은 자아를 고민하고, 인지할 수 있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사랑은 개인의 자아를 비춰보고 이를 채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다. 배타적인 두 사람의 사랑은 우리의 부족함을 완전하게 만들어준다는 환상을 불러 일으킨다. 구조에 대한 저항보다 적응을 강요하고, 각자도생의 논리를 설파하는 신자유주의 구조 속에서 낭만적 사랑의 개념은 그 관계에 참여하는 개인들에게 안전감과 포근함, 안락함을 제공한다.
이성애적 연애 양식에 기초하는 낭만적 사랑의 환상에 로렌스는 찬물을 끼얹고, 질문의 방향을 내면으로 돌린다. 자신을 속이지 않고, 억누르지 않고, 진짜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과정을 향하고 결정하고 적응하는 모든 길에서 로렌스는 '나'를 얻고 프레드를 잃는다. 그 결말이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로렌스는 온전함을 얻었다. 완전하지 않은 것이 온전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 복도를 지나가며 군중 속에 섞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때로 우리는 시선만으로 작은 차이를 차별로 구성하고, 의도한 혹은 의도하지 않는 폭력을 가하기도 한다. 그런 폭력없는 시선과 자연스러움이 유난히도 기억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