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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토리 Aug 17. 2021

여성, 에로티시즘, 페미니즘

넷플릭스 드라마 '섹스/라이프'와 『그녀, 아델』

나른한 주말, 멍한 눈으로 넷플릭스가 제공하는 추천작들을 넘기다가 우연히 <섹스/라이프>를 보게 되었다. 여자주인공인 '빌리'를 중심으로 양 옆에 남자주인공들이 배치된 구도와 <섹스/라이프>라는 제목에서 대략적인 결말까지 파악되었으나 궁금했다. 이 이야기의 결말이. 신선하고도 새로운 시각으로 그 경계 자체를 전복하는 결말이 나올지, 혹은 둘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둘 다 얻겠어!'라는 다소 뻔한 결말에 도달할 것인지.



일상의 도피처로써 에로티시즘

<섹스/라이프>는 누구나 선망할만한 두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인공 빌리와 그녀의 성적 욕망을 다룬다. 이 드라마의 핵심은 지루하고 안정적인 삶에서 자극과 쾌락을 선사하는 유일한 경험이 '에로티시즘'이라는 것이며, 이 에로티시즘의 대척점에는 이성애 결혼이 있다는 것이다. 즉 이성애 결혼은 안정적이지만 지루하고 따분한 일상이며, 섹스는 이성애 결혼 파트너와의 안정적이고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자극과 쾌락을 선사하는 도피처이다.


이 익숙한 이야기는 레일라 슬리마니의『그녀, 아델』에도 등장한다.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의사 남편과 자녀가 있는 아델에게 지루하고 따분한 도시의 일상을 견뎌내게 만드는 원동력은 성적 욕망이다. <섹스/라이프>가 따분한 일상을 벗어난 쾌락으로써의 성적 욕망을 로맨스로 풀어냈다면『그녀, 아델』은 성적욕망을 '살아있음'이라는 감각으로 풀어낸다. 아델이 지루하고 따분한 일상 속에서 누군가의 아내이자 엄마가 아닌 '아델'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는 감각은 오직 성적 행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두 주인공에게 섹스와 에로티시즘은 여성들에게 주어진 아내이자 엄마라는 사회적 책무의 이행에 따라오는 강요된 금욕주의를 자각하고, 자신의 물리적인 신체성과 욕구 그 자체를 감각하게 하는 도피처이다. 여성의 행복이 젠더에 따른 사회적 책무를 올바르게 수행하는 '안정적인 삶'에 있음을 끝없이 주지하는 사회에서 에로티시즘은 거세되고 지워져야만 하는 여성의 욕망을 의미하는 동시에 '짜릿한 도피처'로써만 존재하며 채워질 수 없는 갈증과 욕망을 추동한다.   


여성 주체성과 성적욕망

에바 일루즈는『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에서 자본주의 시장 안에서 섹스는 항상 환상이자 도피처로써 기능함을 설명한다. 끊임없는 노동과 효율을 추구해야 하는 현대 도시인의 삶 속에서 연애의 낭만성은 연애 당사자인 두 사람을 중심으로 경계를 재설정하고, 그 어떤 구조도 개입될 수 없는 유토피아적 공간으로 낭만적 연애를 개념화한다. 현대의 낭만적 사랑에 수많은 소비주의적 개입이 공존함에도, 이 경계 속에서 연애에 참여하는 개인들은 구조에서 벗어난 안전공간으로써 해방감을 느낀다. 이때 섹스는 낭만적 연애의 다양한 실천 중에서도 자신과 타자의 물리적 신체성, 원초적 욕망을 자극하여 쾌락을 선사하는 유일한 유토피아로 기능한다.  


<섹스/라이프> 속 빌리는 안정된 삶이라는 규범을 선택하여 쿠퍼와 결혼하지만, 일상에서 벗어난 쾌락의 정점으로써 섹스를 갈망한다. 아델 또한 자녀, 상사, 남편에 의해 억압당해야만 하는 자신의 욕망과 주어진 역할에서 벗어나 상황을 장악하고 이끌어가는 권력을 맛볼 수 있는 순간은 낯선 남성과 섹스하는 것뿐이다. 


"그녀가 갈망했던 건 그들의 살갗이 아니라 상황 자체였다. 장악당하는 것, 쾌락에 빠진 남자들의 얼굴을 관찰하는 것, 스스로를 꽉 채우는 것, 타액을 맛보는 것, 간질처럼 휘몰아치는 오르가슴을, 관능적 쾌락을, 동물적 유희를 흉내 내는 것, 손톱을 피와 정액으로 물들인 채 떠나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 에로티시즘은 모든 걸 위장해주었다. 사물의 평범함, 덧없음을 에로티시즘이 가려주었다. 여고생의 오후에, 생일 파티에서, 아델의 가슴을 곁눈질하던 노총각 삼촌이 빠지지 않고 참석하던 가족모임에 탄력을 준 것도 에로티시즘이었다. 에로티시즘의 추구가 모든 종류의 규율과 체계를 제거시켰다. 우정, 야망, 일상적인 계획, 모든게 에로티시즘 앞에서 무너졌다." 그녀, 아델 p.167



여성, 공간, 페미니즘

<섹스/라이프>에서 안정적인 삶을 선택한 빌리가 놓이는 공간은 도심을 벗어난 교외의 아늑한 주택이다.『그녀, 아델』에서 아델 또한 도심을 벗어난 교외에 배치된다. 아델의 성적욕망과 일탈을 인지한 아델의 남편이 교외로의 이주를 강제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도시는 욕망을 의미한다. 화려함, 쾌락, 유흥이 가득한 공간은 다양한 욕망을 지속적으로 자극하고 재생산한다. 원초적 쾌락은 한 명의 주체로서 '살아있음'을 감각하게 하는 유일한 감각이며, 이러한 욕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쾌락과 위험의 공간은 곧 도시이다. 안정적이고 지루한 삶을 의미하는 교외의 공간은 성적욕망을 비롯한 여성들의 다양한 욕망을 억누르고,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에 순응할 것을 강요한다. 결국 교외로 배치된 그녀들에게 허락된 '안정적인 삶'은 도시와 교외의 이분법적 경계 속에서 구성되며, 이들이 배치되는 공간은 곧 여성이라는 젠더에 부과된 모성으로써의 역할과 책임을 강제한다. 안정적인 삶에 부과된 역할과 책무에 따라 개인으로서의 성적 욕망은 거세당한다. 억압된 욕망 속에서 도시는 곧 쾌락과 자아, '살아있음'을 감각하게 하는 유토피아이자 도피처로 기능한다.   


기존의 공사분리 안에서 사적 공간은 휴식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여성에게 사적공간은 또 다른 '노동의 공간'이다. '여성'으로서의 역할과 책무가 강조되는 사적공간 안에서 여성들은 '온전한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이때 <섹스/라이프>는 페미니즘 서사를 차용하여 두 공간을 오가겠다는 빌리의 다짐으로 서사를 마무리한다. 이 결말은 베티 프리단이『여성의 신비』에서 말한 '이름 붙일 수 없는 병' 그 이상을 넘어가지 못한다.  

여성들이 배치되는 공간의 경계가 해체되고 재배열되지 않은 채 분리된 두 공간을 오가는 빌리를 '주체적이고 충실한 욕망을 지닌 존재'로 내세우는 것은 결국 이 문제의 해결을 개인의 선택 영역으로 자리하게 한다. 페미니즘 서사를 차용한 <섹스/라이프>의 결말은 여성의 주체성과 선택, 자유의 문제가 마치 '성적욕망'을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선택하면 완성될 수 있는 것으로 페미니즘과 여성해방, 자유의 문제를 축소한다. 이는 왜 여성들의 안정적인 삶의 이상에 성적 욕망이 제거되어야만 하는지, 왜 여성들에게 부과되는 책무와 성적 쾌락은 공존할 수 없는지, 성적쾌락과 욕망과 원동력이 여성억압과 어떤 연결선상에 있는지의 내용들을 다루지 못한다. 


두 명의 남성과 한 명의 여성이 등장하는 로맨스물은 일견 뻔해 보이지만, 여성의 성적욕망이 남성을 선택하는 주요한 기제가 된다는 지점에서 <섹스/라이프>는 일견 신선해 보인다. 안정적인 삶에서 벗어나 채워지지 않는 욕망과 쾌락을 탐닉하는『그녀, 아델』이 그려내는 어두운 분위기 또한 낯선 이야기로 다가온다. 그러나 페미니즘을 서사의 축으로 엮어내고 싶다면 적어도 여성의 성적 욕망을 취사선택의 문제로 배치하지 않고, 분리된 영역 그 자체를 해체하고 넘어서는 무언가가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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