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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백살공주 Sep 18. 2024

가장 짝사랑했던 형님에게  말실수

키 작은 거인 형님에게 무거운 말실수


철없던 소년시절 석천리 시절의 무거운 소묘 하나 올립니다. 당시 무심코 했던 말이 지금 중년이 되어 생각해도 가슴에 못으로 남아 있음을 고백하면서, 그 어려웠던 시절 제 인생관이 바르게 설 수 있도록 끈끈하고도 편견 없는 애정으로 저의 젊은 날을 건져주신 *** 형님께 이 글을 드립니다. 그리고 제 가슴에 오래도록 박혀있는 녹슨 못 하나를 뺀답니다. 진짜 그 형님은 제게 가장 키가 작았지만 가장 큰 거인으로 우뚝 남은 형님이십니다.


내가 석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열다섯이 되던 해에 **형은 충주실업계 고등학교 임업과를 졸업하고 농사를 짓기 위해 곧바로 지게를 같이 진 농군 형님이다. 우리 집과 가까운 이웃집의 형이어서 쉽게 가까워졌다. 그 형은 정말이지 모르는 게 없었던 멋있는 형이었다. 그 형에게 는 어쩔 수 없는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었는데 키가 너무 작아 군대 까지도 면제가 될 정도였다. 야무지고 똑똑하고 사리가 분명해서 아무도 무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언제나 덩치보다 품성 인성이 컸던 분이다.


처음에 그 형이 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줄은 몰랐다. 단지 그 형님은 앞뒤를 훑어 봐도 [볼] 건더기가 없던 초라한 나를 하나의 인격체를 가지고 대해 주는 덕분에 나는 마냥 형이 좋았다. 뭔가 내가 존중받는 느낌을 처음 받아본 사람이었다. 그 당시 한국일보 신문도 꼭 보고 나면 나를 주었고 보고 읽을 만한 책이라도 있으면 항상 내게 읽어 보라고 권했다. 나는 그 형이 추천하면 두말없이 마치 물을 빨아들이듯 읽고 소화해 냈다.


아마도 희망 없고 부질없던 그 시절 나는 그 형님을 통해서 내 인생관을 올바르게 형성하게 되었다. 형은 대체로 모든 사람들에게 편견이 없어서 어렵게 생활하던 청소년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나는 형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짝사랑을 할 정도였고 형이 다른 내 또래 친구들에게 지나친 관심만 보여도 질투를 했었다. 청소년 시절 내가 담배를 피우다가 형님에게 들키기도 했는데 나보다 키가 작은 형이었지만 나는 꼼짝 못 하고 맞았다. 만약 다른 형들이 마을군기 잡는다고 그랬다면 나는 칼이고 뭐고 들고 당당히 버티며 싸웠을 것이다.  내게 인격을 부여해 주시던 형님이었기 때문에 꼼짝없이 맞았다. 내 뺨에 유일하게 손바닥을 휘두른 형님이었다. 그만큼 형님은 내게 절대적인 정신세계를 지배했다. 어쩌면 흐트러질 수도 있었던 젊은 날에 인생을 건져준 거였다.


그 형님과 나는 한  십여 년을 한동네에서 농사를 지으며, 그 외의 많은 일들에도 함께 했었는데 일일이 다 열거도 어렵거니와 지면상도 만만치 않지만 그래도 몇 가지는 꼭 열거를 해야만 이해가 쉬울 터였다. 충주시내 영화관에서 좋은 영화가 오면 함께 보러 가기, 심훈의 [상록수]는 십여 년 함께 생활하며 가장 많이 곱씹어 먹어서 문학적 소양을 일깨워주었고 박동혁과 채영신을 모델 삼아 농촌의 미래를 함께 건설하기도 했다.  우리는 정말 미래를 짊어진 청년들처럼 그렇게 진지하게 농촌문제를 생각하고 솔선수범 했었다.


상록수라는 소설 하나만 가지고도 내 문학적 역량의 뼈대를 세웠고 나는 정말 상록수 이상의 소설을 한 번은 쓰리라.  형님 앞에 자신 있게 말을 하면 형님은 너는 하고도 남을 놈이야, 라며 용기를 주곤 했다.  나는 정말 그런 줄 알고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내가 소설이라고 써서 보여주면 되지도 않은 글임에도 인상 찌푸리지 않고 칭찬을 먼저 해 줘서 나를 우쭐하게 만들곤 했었다. 그때부터 소질이 생겨나 버린 것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진 스칼렛과 레트버틀러를 이야기하고, 황야에 무법자를 이야기하고,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이야기하고  주홍글씨를 이야기하고, 테스를 이야기했었으니 형은 분명 나를 남과 다르게 대해 주었다. 나는 이미 그 스트리들을  책으로 독파를 했던 것이다. 한 번도 너는 안돼, 를 이야기하지 않았고 시인을 꿈꿀 때도 나를 비웃지 않았다. 때문에 나는 시골 동네에서 웃쭐하게 시인처럼 설치기도 했었다. 동네 형님들 연애편지도 대필할 정도였다.  정말이지 내 꿈을 어머니보다 더 열렬히 칭찬해 줬다. 모든 고민을 형에게만 했었다. 또 나보다 덩치가 작았음에도 언제나 의지하게 되었다. 내가 담배 피우다 형님에게 걸린 일 말고는 한 번도 짜증을 보여 준 적이 없었다. 형은 사랑의 대상이었고 경외의 대상이었고 존경했었다. 그리고 스승이었다.


우리 동네에 세종대에서 농활을 왔을 때 멋진 여학생이 있었는데 형과 나는 둘이서 함께 좋아해서 에피소드가 많았다.(그 여대생은 나보다 네 살이 많았음에도 오래도록 나와 편지를 주고받아 내 사춘기의 짝사랑의 대상이었고 나의 문장력을 키워준 장본인임) 그 여대생이 시골 마을 안길에서 우리들 곁을 지나가면 그 여학생의 관심만 유도해서 우리 쪽을 바라보게 만 하여도 형님은 내게 삼십 분씩 막말 놓기를 허용했었다. 나는 별별 수단을 다 부려서 관심을 유도하곤 했었다. 어쩌면 그때부터 나는 미인에게 거리낌 없이 접근하는, 들이대는 법을 배웠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암튼 그때 그 일이 있고부터 나는 미인을 만나면 자신 있게 대시하고 수작을 부릴 줄 알았다. 지금 같이 사는 집사람도 그때의 실력으로 정신없게 만들어 결혼에 이르지 않았나 싶다. 그 여학생의 주의 끄는데만 성공하면 삼십 분 동안 갖은 반말과 막말을 허용해 줘서 재미나기도 했었다. 그때는 형의 말씀이 내게 유일한 법이었다. 내가 동네에 있을 남아 있을 때에 형은 이미 새마을 지도자가 되어 동네를 많이도 살찌웠고 또  대통령상까지 받은 걸로 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내가 천등산 벼랑에 지게를 굴리고 석천리 고향을 떠나 올 때에 형님은 십리나 되는 길을 경운기로 태워다 주었다.  또 주막에서  막걸리 한잔으로 격려해 주고 담배를 찔러 넣어주며 넌 할 수 있을 거라고 격려를 해준, 그런 형이었다. 독고탁 만화처럼 덩치보다도 마음이 무한대로 컸던 형이었다.


그런 형에게 나는 어처구니없게도 치명적인 말실수를 했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아파오는 일이었다. 그 실수는 내 사랑하는 여동생과 관련이 있었다. 나 보다 두 살 어렸고 여섯 살 때부터 어머니가 아프면 밥을 설익게라도 해서 퍼 밥상을 차렸던, 고생바가지를 뒤집어썼던 불쌍한 여동생이었다. (지금은 박달재 그 밑에서 공무원과 결혼하여 알찬 살림을 꾸려가고 있음, 어머니는 그 어린 몸으로 밥을 하던 동생을 오랫동안 이야기 하시며 눈물 흘리기도 했음) 그 동생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도회지 공순이로 진출했다. 동생의 미모에 반했던 그 회사 동료 남자 사원이 우리 집 골짜기까지 찾아와 동생 아니면 자살을 하겠노라며 이틀을 시위를 해서 온 동네 소문이 다 퍼져 버렸다. 화를 내도 소용이 없었고 두들겨 패도 소용이 없었다.  동네 어른들을 모셔다가 야단을 쳐도 상관없이 끈질긴 면모를 보여 골치였고 급기야 나는 형님에게 찾아가 상담을 했다.


"왜? 그 남자 멋지고 괜찮으니까 교제 정도는 함 봐주지 그러니?" 형님은 그 남자를 좋게 본 모양이었다.

그때 나는 무심코 쓸어 담을 수없는 말을 뱉고 말았다. 어머니와 내가 찬성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키가 너무 작아서 우리는 허락할 수 없어"

아, 정말이지 본의 아니게 무심코 나왔지만 , 또 형님과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나는 형의 가장 큰 아킬레스건을 본의 아니게 건드리고 말았다. 형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지만 나는 앗차 싶었다. 후회의 소용돌이가 내 가슴을 쳤지만 담을 수 없는 실수였다. 아주 찰나적인 침묵이 흘렀다. 그때 형과 나 사이에 형성되었던 찰나적 침묵을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편이다. 형은 내색조차 없이 나를 대해 주었다. 우린 그러고도 한 6.7년을 긴밀하게 지냈다.

 

그렇다고 그 이야기를 꺼내 사과하기도 참 어려운 일이었다. 편견 없는 사랑을 나눠 준 형이었기에 더 참담했다. 달리 변명의 여지도 없었다. 그일 뒤로도 형과 나 사이에 별다른 변화는 없었지만 내 가슴에는 커다란 어혈이 들어 버렸다. 내가 동네를 떠나 올 때도 그 말을 한 것이 내게 늘 어혈로 남아 있었다. 가끔 형을 그리워하려면 그때 했던 말이 먼저 떠올라 이빨 사이에 낀 오징어찌꺼기처럼 나를 오글오글 괴롭혔다. 한마디 툭 내뱉은 말이었지만 그 말은 내 가슴에 비수가 되어서 나를 괴롭힌 것이다. 한 번의 실수는 병가지상사,라는 말을 완전하게 습득한 일이었다. 그때일만 생각하면 지금도 식은땀이 목 줄기를 타고 흘러내린다. 어쩜 형은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지만 나는 내가 용서가 안되고 스스로 죄인이 되는 것이다.


형님도 이제는 천등산 석천리 고향을 떠나고 없지만 나는 도시로 나와서 세파가 힘들어 어쩔 줄 모를 때마다 형을 많이 생각을 한다. 적어도 형님과 나의 정서는 비슷했었으니까. 미래지향적인 사고, 함께 쓰는 아름다운 언어, 생경함을 만나면 감동하는 정서, 노래가 좋으면 체득을 하고 마는 열정등이 그렇다. 문학적 감성, 상록수의 그 긴 스토리들만큼 우리도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다.


세상을 살면서 실수가 없지 않겠지만 내 의식 속에 이미 견고한 뿌리를 내리고 있어 괴롭다. 편견 없는 사고와 평등을 몸소 실천해서 나는 지금도 편견과 편식을 모르고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잘 사귀며 살고 있다. 그리고 나보다 더 축 쳐져서 살아가는 이들을 만나면 양지바른 곳에 놓아주고 싶은 것들이 그때 생긴 이상이다. 형의 은혜를 그렇게 갚아 나아가고 있음을 밝히면서 이 글을 언젠가 형님에게 드릴 생각이다. 여자든 남자들이든 상관하지 않고 또 나이를 구분하지 않고 이렇게 가슴에 못을 박는 실수를 만나더라도 그때 그 형님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줄 아는 넓은 가슴의 소유자들이 많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고 싶은 것이다. 그게 내가 그 형님과 생활하며 체득한 인성인 것이다.~~


사십 대 중반, 어느 날 제가 참 반성하며 쓴 글인데요. 그 형님과의 스토리는 또 있어 공개할 겁니다.  어제 추석날 이제 서른이 된 작은딸이 연애를 하며 낱낱이 공유하는데요. 딸의 키가 170인데 자꾸만 신랑 될 녀석 키를 먼저 보는 통에 어제는 그 작은딸과 세 시간을 데이트하며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내가 강조하고 싶은 건 내가 185였지만 그 키로 아내를 행복하게 해 준 게 없다는 사실을 이야기가 주목적이었어요. 딸에게 편안하게 이해시키는데 안 되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나의 돌려 담을 수 없는 실수가 떠 올랐고 이렇게 올립니다. 암튼 딸의 연애도 응원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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