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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백살공주 Sep 18. 2024

농활 누나를 사랑한 천등산골 소년

열일곱 살의 여름으로 돌아갑니다. 저의 사춘기를 짝사랑으로 살찌워 주신 아름답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올려 봅니다. 너무 긴 글이니 시간이 좀 있으신 분만 읽으시기를요^^

내가 무척이나 따르고 존경했던 형님과 함께 담뱃잎을 따서 말리고, 소풀을 베며 무덥게 나던 여름날에 시리고 아프고 아름다웠던 짝사랑을 배웠답니다.^^


제가 살던 고향은 천등산 동쪽기슭으로 해발 오백 미터쯤은 되는 벽지 산골 마을이라서 그해 여름에 세종대학교 합창반 서클에서 농활을 왔었다. 자고나고 자고나도 별 일들이 생기지 않는 마을에 대학생들이 남녀 같은 비율로 사십여 명이 왔으니 동네에서는 대단한 사건이고 별 볼일이 넘치는 일이었다. 한 열흘 정도 봉사활동이었고 그 열흘 동안 마을 곳곳마다 생기가 초여름의 녹음처럼 돌았다. 마을 청년들은 지성적이고도 흰 피부의 여학생들 때문에 그 열흘 동안 몹시도 설레는 모습 이면서도 길을 가다가 여학생들이, 안녕하세요, 하고 깜찍한 인사를 하면 얼굴이 붉히며 말을 잃고 허둥거리며 도망치듯 피해 갔었다.


​대학생들은 낮이면 노력봉사로 마을의 망가진 도로나 회관등을 고치고 밤이면 학생반 청년반 부녀회반 장년반등으로 나누어 교육활동을 했었다.


우리 청소년 반에 배정된 두 명의 남학생과 세 명의 여학생이 있었는데 그 세명 중에 한 명이 내 마음을 송두리 채 뺏어버렸다. 약간 작은 키에 통통한 이미지를 지녔고 도시의 냄새를 풍기면서도 몸빼 바지를 입으면 시골스러움을 풍기는 모습과 붙임성 넘치는 성격, 격의 없는 인간성에 매료되어 첫날 첫 대면 통성명 소개하는 시간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더벅머리 시골 총각이었던 내게 기이한 관심을 나타내 주었고 내 첫 이미지가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주인공소년 같다고 평가해 주어서 까닭 모를 설렘이 가슴을 헤집고 들어와 버렸다. 밤마다 만나서 나누는 주제는 농촌의 미래와 전망이었고 그들은 진정으로 농촌의 현실을 아파하고 국가의 미래를 끄집어내며 의식화(?) 교육을 병행해 나갔다. 나는 이미 그 세종대 역사학과 이학년 누나에게 홀딱 빠져서 적극적으로 내 미약한 국가관과 사회관을 개진했고 뽀얐고 신선한 이미지에서 쏟아지는 언어에서 배우는 것이 좋고도 또 많았다. 대학생이 주는 신선함과 그 경이로운 하얀 지식들이 내겐 황홀경들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스물여섯에서야 공부를 시작했고 이 년 정도에 중등과정과 고등과정을 모두 마치고 선망하던 대학 시험을 치름) 세상 밖의 일들을 제대로 공부하게 되었고 아직 세상 사회를 베우고 겪어본 일이 없던 나는 대학생형과 누나들이 간간히 토해 놓는 저 바깥세상의 이야기를 빼놓지 않고 습득해 두었다. 또 그 누나는 농촌의 일상들에 남다른 듯한 애정을 보여주었고 조금의 시간이라도 나면 나의 누추한 집에 까지 와서 동생으로 인정해 줄 때 나는 묘한 흥분의 비행기를 탔었고 또 가난한 만큼 부끄러웠었다. 처음 우리 집을 찾아왔을 때에는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픈 심정이었었다.

렇게 열흘이 모두 지나고 마지막 날 밤 농민위안의 잔치를 축제처럼 마치던 날 모두 술에 취하고 작별과 이별가 부름을 끝으로 그들은 잔치 뒤의 허무를 남기고 서울로 모두 돌아갔다. 내게 남은 허망함은 씁쓸하기 짝이 없었으며 그들이 떠나던 그날로 그 누나에게 사춘기 냄새 가득한 편지를 썼었다. 동네 청년들도 각자 뜻이 맞았던 학생들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고 누가 답장을 제일 먼저 받느냐로 내기를 걸었다. 답장이 늦게 오는 사람이나 못 받는 사람이 막걸리 통으로 사는 내기였었다.


제일 먼저 답장을 받은 것은 무섭형도 청년회회장도 아닌 바로 나였다. 누나가 떠나가던 날 부친 편지였고 그 편지를 받은 누나도 헤어짐이 너무나 아쉬웠다면서 시골스러운 멋을 지닌 동생으로 삼을 테니 총명하게 열심히 살고 그리고 기회가 되면 꼭 [공부]를 하라고 신신당부를 남기는 답장을 곧바로 보내 주어서 가슴에 용 솟는 그 무엇이 있었다. 저 덥기만 여름과 푸르름이 가득한 하늘도 다 내 것처럼 보였고 힘든 일조차도 다 땅 짚고 헤엄치기처럼 수월해져 버렸다.

그렇게 해서 환상 같은 짝사랑이 시작되었다. 일주일이나 열흘을 편지 쓰는데 몰두를 했고 총명한 의식으로 살고자 노력했으며 항상 책을 읽는 성실한 시골 청년으로 완전하게 자릴잡게 되었다. 그러면 누나도 나를 시골스런 동생이 아닌 멋진 남자로 생각할 것 같은 생각이 나를 시종일관 지배하게 되었다. 사랑은 국경도 초월하고 나이도 초월하니까 지식도 초월하게 될 거야--- 정말이지 나는 거침없게 항상 편지를 써서 보냈다. 보 낼 적마다 누나의 답장도 곧바로 와서 산과 하늘도 다 내편이 되었고 동네 청년형님들도 부러워하는 눈치였고 동네에는 적당히 소문도 돌고 있었다.


 편지는 열흘 정도의 간격으로 탁구공처럼 왔다 갔다 했고 그 누나의 편지를 전해 주는 집배원 아저씨도 내게 편지를 건네 줄적마다 시골총각 바람이 단단히 났다고 웃으며 말을 했었다. 마음도 간사해져서 우리 동창끼리 연애를 하는 친구들이 시시하고 어려 보였고 동네서 공개적으로 연애를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었다. 나는 적어도 서울에 소재하는 대학의 아름다운 여학생과 연애를 하니 얼마나 겪이 다른가, 하늘 높은줄 모르고 기고만장해서 어깨에 힘을 꽤나 주고 다녔었다.


가을에 나는 토실토실하게 살찐 알밤을 모아서 보내주었고 머루 다래도 따서 보내주었고 철쭉나무뿌리가 몹시도 뒤틀려 관목이 된 괴목도 손질을 하고 니스칠을 곱게 해서 보내주었다. 모두 온갖 정성을 들여서 보내 준 것이다. 그럴 때마다 누나는 답례로 꼭 읽어야 한다며 명작의 책들을 보내주었다. 세종대 총장님께서 쓰셨다는 평양함락, 죄와 벌, 대지, 이광수 님의 꿈과 무정, 배따라기,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폭풍의 언덕 등을 내게 보내 주었고 나는 충성스러운 부하처럼 빠르게 몆 번이나 읽고 어설픈 감상문을 꼭 보내주었다.


그래야 점수를 후하게 딸 것 같았으니까. 그때부터 나는 시인이 되어 조락해 가는 가을을 노래하며 충만함을 어쩌지 못해 글을 남기기 시작했었다. 특히 문학적 소질 너무나 농후하다는 누나의 언질에 엄청난 자극을 받았다. 어쩌면 그때 소질이 개발된 것이 아닌가 늘 생각을 한다. 그때까지의 성장기에서는 최고의 가을을 경영했었다.


내 환상이 무참하게 깨진 것은 겨울 초입이었다. 보고 싶으니까 시간이 되면 가을걷이 다 마치고 서울을 다녀가라는 누나의 편지에 눈물까지 글썽였고 그동안 너무나 집착한 나머지 누나의 모습을 생각할 려고 해도 모습이 잘 떠오르지 않았기에 더 감격했었다. 사랑하니까 더 가물가물하고 보고 싶을 적마다 손때가 묻을 정도로 편지를 읽었었다. 그리움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늦가을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마땅한 신발이 없던 시골 사람들이나 신는 털신을 신고 서울 세종대를 들어가니 지나가는 학생들이 모두 내 신발을 보며 웃으며 지나가곤 했다. 그러나 내가 누구인가. 몸을 꾸미는 것은 쥐뿔도 관심이 없는 시골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라서 눈곱만큼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합창 반 서클로 찾아가니 누나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리고 반원들에게 시골에서 사귄 동생이라며 소개를 시켜주고...... 때 내 가슴에 흘러가던 행복의 물비늘들 위로 초겨울의 햇빛이 반짝이고 있었고 시골 속에 묻혀서 고생 속에 철없이 살던 지난날들도 다 보상처럼 빛나고 있었다. 데이트로 학교건너편에 있는 어린이 대공원을 거닐었고 난생처음으로 돈가스를 먹어본 날이었다. 저녁을 먹고 나니 만날 사람이 또 있다며 소개를 해 준 사람 있었는데 나의 환상을 깨고 현실로 돌아가게 만들어버렸다. 바로 누나의 애인이었던 것이다.


"이쪽은 누구냐 하면 순수하고 시골스런 더벅머리 내 동생이고..."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편지를 잘 쓰셔서 시골에 두기는 아까운 사람이라고"


속으로는 형편없이 무너지고 있었지만 냉정을 잃지 않고 형이라고 불러주었었다. 그 두 분과 서둘러 헤어지고 서울에서 취직하여 살고 있는 고향친구를 찾아가서 무너지는 가슴에 기절하도록 술을 퍼 마셨고 다음날 서둘러 서울을 빠져나오고 말았다.


얼마를 지난 눈이 펑 펑 내리던 겨울에서야 정상으로 돌아온 나는 진정한 누나로 새롭게 인정하고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오랜 착각이었지만 사춘기를 아주 근사하고 멋지게 보냈음을 인정하였다. 그 뒤로 무려 사 년 정도를 편지 내왕을 하면서 문학적 소양을 많이도 쌓았었다. 그 누나가 결혼을 하면서 내가 잠시 고향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부재의 시절이 있어 편지가 두절되었고 그 이후로 나도 이미 스무 살이 넘는 청년이 되어 청소년회일로 바쁘게 살았고 누나의 당부처럼 독서에 게을리하지 않았고 우리 마을에 마을문고도 만들어 놓고 있었다.


​그때 편지를 얼마나 썼느냐 하면 지금도 서울 성동구 모진동 하고 외울 정도였었으니 정말 열심히 썼던 기억입니다. 누나의 당부처럼 총명하게 열심히 살아왔고 글도 틈틈이 써와서 얼마 전에는 수필가로 추천을 받아 정식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 이렇게 당당하게 첫사랑을 올려 봅니다. 제 인생에 가장 아름다운 정신적 청량한 토양을 제공해 주신 분이라 이렇게 밝히고 당당하게 찾아 나섭니다.


여러분 중에 있을지도 모르고...... 또 아니더라도 알고 계시는 분들은 제게 꼭 댓글을 주시기를요. 정말 많은 것을 남겨 주었거든요. 그때부터 쓰는 일은 습관화되어 지금까지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답니다.


이제 더위도 추석을 깃점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릴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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