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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백살공주 Sep 20. 2024

소년에게 해변에 여인을 가져다준 형님

해변의 여인을 가져다준 형님


내가 천등산 석천리 마을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 이야기다. 화전마을의 우리 집과 마을 중심에 있던 외갓집이 오밀조밀 한 길을 따라 2킬로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때 외갓집의 주농은 담배 농사를 지었고 외갓집과 우리 집 사이의 중간에 담배밭이 있었다. 나는 나보다 나이가 네 살이 많은, 중학교 2학년이었던 외사 춘 형님께서 빡빡머리에 약간 큰 밀짚모자로 뜨거운 햇빛을 가리고 형님보다 키가 큰 담배밭에서 담배겹순을 따며 해변의 여인을 부르는 모습이 너무나 보기 좋았다. 나도 모르게 형님을 따라 담배 겹순을 따며 해변의 여인이란 노래에 푹 빠졌다.


목소리를 제법 구성지게 뿜으며 부르는 그 광경이 너무나 좋아서 뜨거운 것도 모른 채 담배겹순을 따라서 땄던 일들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소년가장이었고 외사 춘 형님은 막연히 든든한 유일한 일가였다. 그냥 내게 자랑이었던 형님이었다. 나의 본 친척은 아버지가 이북사람이라 한분도 없었고 오직 외가의 외삼촌 댁과 외가 친척들만 있었다. 따라서 외사 춘 형님은 내게 절대적이고 남에게 자랑하고 싶은 그런 형님이었다.


그런 형님께서 일요일 쉬지도 않고 동생들과 담배일손을 도우며 부르는 해변의 여인은 나를 해변에서 놀고 있는 착각을 주었고 가락과 노랫말들이 뼛속을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그 광경들이 좋아서 나도 그 열기 가득한 담배고랑에 들어가 형님을 따라 담배겹순을 땄던 것이다. 암튼 그 멋있는 형님이 일속에 빠진 째 부르는 해변의 여인은 나를 끝 모르게 깊이 빠져들게 만들었고 그날 이후 며칠이 지나서 그 노래가사와 리듬을 다 외워 버렸다. 그 노래를 듣다 보면 내가 해변의 여인이 되어 버리곤 했다.


그렇게 초등 고학년시절 담배겹순을 따며 외사 춘 형님에게 배운 해변의 여인은, 열네 살에 담배농사에 시작해 스물네 살이 되어 도시로 나올 때까지 절었던 담배밭에 담배겹순 따기, 그리고 담뱃잎을 따던 날에는 언제나 불려졌던 것이다. 목청을 가다듬고 구성지게 부르면서 담배일을 하면 더위도 덜했고 무엇보다 독한 담배냄새가 덜 맡아져 왔다. 그리고 힘들고 지겨운 고통들을 해변의 여인으로 토해내곤 했던 것이다. 담배밭과 해변의 여인을 떼려야 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 성장의 찌든 시절을 고스란히 녹아내던 그 해변의 여인과 그냥 말없이 풍부하게 희망을 주고 내게 우상 같았던 반듯한 범생이 외사 춘 형님은

구질구질하고 힘들었던 내 삶의 앞에 구세주 같은 표상이었고 삐꼼같은 비타민이었다. 적어도 한해 여름날 담배밭 농사일에 빠질 적엔 반드시 그 오아시스 같은 해변의 여인을 수백 번 불렀다. 보면 여름과 담배일이 끝나 있곤 했다. 그 덕분에 열일곱 살 추석날에 면단위 4-H 콩쿠르대회에서 해변의 여인을 불러 장려상품으로 손목시계를 받기도 했었다. 해변의 여인은 그렇게 내 덥고 힘들고 벅차고 고독했던 담배밭 시절들을 오아시스로 만들어 준 것이다.


그렇게 살던 내 고달픈 삶도 스물네 살에 도시로 진출하면서 담배밭일도 종식을 했고 열네 살에 배웠던 담배도 끊었고 도시적 삶에 끼워 살다 보니 목놓고 노래 부를 장소도, 겨를들도 생기지 않았고

생존의 치열들만 사방에서 나를 갉아먹어 들곤 했다. 해변의 여인은 내게 멀어져 간 사치품에 불과했다. 다만 외사 춘 형님과 형제들은 유일한 혈족이라 정서적 혈연적 유대로 내 삶에 가장 큰 우군들로 힘이 되어 주었다. 형님도 사정이 어느새 가장이 되어 직장 생활하며 야간 대학을 다녔고 나는 돈을 벌면서 중고등을 검정고시를 하느라 뭐 취미나 즐길 겨를이 없었다.


그렇게 치열하게 살다 중년을 넘기고 나니 다시 노래가 그리워지기 시작했고 남성찹창단, 교회성가대, 그리고 막연하게 동경했던 친구들의 교과서 노래(가곡)들을 다시 불러보기 시작했다. 이젠 조금 생긴 여유 속에 노래를 흥얼거리다 보면 그 담배농사 시절이 올라오고 해변의 여인과 함께 외사 춘 형님의 자주 생각난다. 그래서 가끔 전화를 드린다. 마르고 빈곤해 가던 내 영혼을 그윽하게 만들어준 노래와 형님이시다.


2023년 3월, 두바이 수중에 떠있는 고급호텔 아틀라티스 파티, 200명 앞에서 마이크 잡고 부른 노래가 해변의 여인이다. 호텔이 페르시아만 해수 위에 위치한 고급 호텔이라 꼭 그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해변이었고 내 아름다운 여인, 아내가 있었다. 관객들보다도   동행해 준 아내가 정말 잘 어울리는, 잘 부르는 노래였다고 칭찬을 해 주는 게 아닌가?


구수한 애환이 묻어난단다. 내가 인생의 쓰디쓴 입문을 버티게 해 주고 나가게 해 주고 역경을 이기게 해 준 노래이니까 절절한 애환이 묻어나는 것이다. 이제 외사 춘 형님과 고상한 자리가 마련되면 따듯한 선물 한아름과 막걸리 한잔, 그리고 형님에게서 은근슬쩍 배운 해변의 여인을 구성지게 불러드릴 생각이다. 난 늘 분위기가 있는 노래꾼이 맞다. 잘하는 것 보다도 그냥 영혼을 쏟으며 부르는 것이다.


외사 춘 형님은 부평에서 일하는 노후를 보내시고 있고 나는 청주에 있어도 통화는 자주 한다. 내게는 삶의 언덕이신 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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