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등산 석천리,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나는 집에서도 밖에서도 학교에서도 별로 눈에 띄는 구석이 없는 외톨박이 소년이었다. 가족의 생계를 꾸려가시는 혼자되신 엄마는 잔잔한 손길로 나와 동생을 돌볼 쳐 지가 아니었을 정도로 가난했기에 연명에 몸부림을 치셨다.
아버지의 부재와 가난 때문에 형편대로 건성건성 성장을 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늘 의식 속에 미움을 받는 아이로 소외되어 있었다. 엄마가 밭일을 나가시고 늦게 들어온 날에는 늘 집안이 엉망으로 지저분했고 그럴 때마다 엄마는 나를 혼내곤 했었다.
또 학교에서도 결손 가정의 아이여서 친구들에게 곧잘 놀림을 받았기에 내 마음속에 난 미움덩어리 아이로 인식되어 있었다. 성장하면서 세뱃돈을 받아본 적이 전혀 없었고 누군가에게 귀하다는 느낌의 눈길조차 받아 본 것이 별로 없었다.
엄마에게 젤로 귀한 대접을 받아야 했으나 엄마는 무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자살을 세 번이나 시도하실 정도로 절망적 힘든 삶이 셨으니 세 자녀들을 귀하게 여길 겨를이 없었다.
어느 날 엄마에게 심한 꾸지람을 듣고 갈 데가 없는 나는 앞동산엘 올라갔다. 텅만골에 대고 [미워] [미워]하고 크게 소리를 지르니 털만 골도 네게 [미워] [미워] 하고 맞대 답을 하는 바람
나는 정말 산조차 나를 미워하는 것에 놀랐다. 충격을 받고 그 길로 집에 들어와 방구석에서 저녁도 먹지 않고 잠들어 버렸다.
학교친구들이 미워하는 것도 알고 있었고 엄마가 날 미워하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털만골 조차도 나를 미워하는 사실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 충격으로 나는 다음날도 풀이 죽어 있으니까 엄마가 왜 그러느냐고 물으셨다. [엄마도 나를 미워하고 친구들도 나를 미워하는 것을 알겠는데 텅만골산도 나를 미워해] 그러고 보니까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나 사물은 정말 없었다. 일곱 살 여동생과 다섯 살 남동생만 아무것도 몰라 나하고 놀뿐이었다.
내가 심심하면 올라가서 혼자 노는 산조차 나를 미워하는 게 나는 너무나 싫었고 이 세상에 완전 혼자 동떨어진 적막감 같은 것이 어린 가슴에 밀려들어
왔던 것이다. 엄마의 매질에도 늘 꼬리만 치던 충견 같았던 체념적 긍정은 온데간데없고 나는 시종일관 시무룩해져 있었던 것이다.
내 이야기를 들은 엄마는 갑자기 나를 숨도 못 쉴 정도로 꼭 껴 않으셨다. 엄마 내 심각한 절연감의 실체를 파악하신 모양이셨다. [네가 얼마나 귀여운 내 자식인데....]
엄마의 눈에 이슬 같은 물기들이 번져있었다.
눈물을 찍으시던 엄마는 곧 내 손을 잡고 앞동산엘 오르셨다. 그리고 텅만골을 향해 [좋아][좋아] 다시 크게 외쳐보
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엄마가 시키는 대로 텅만골에 대고 [좋아][좋아][좋아] 외치자 털만 골도 나에게 [좋아] [좋아] [좋아] 하고 메아리가 꼬리가 길게 외쳐주었다. 그 메아
리는 산골 속으로 작아지면서 사라져 갔다. [봐라 산도 너를 좋아하지]..........
그날부터 엄마도 존귀한 하나의 인격체로 대해주기 시작했고 우리 집 주변을 둘러싼 청등산의 행병골, 작은 도독골, 큰 도독골, 검은 동굴, 재피골, 털만골, 사실골 등이 나를 좋아한다고 믿게 되었다. 그 산골에 대고 청아하고도 큰 소리로 [좋아] [좋아] 하고 외치면 그 골자기들도 나를 향해 [좋아] [좋아] 외쳐주니 나는 골짜
기들과도 아주 친한 친구가 되었다.
학교에서 친구들이 날 놀려도 나는 그때부터 외롭지 않았다. 산골짜기들이 모두 나를 좋아하고 있었고 또 일에 지치신 엄마도 나를 아주 귀하게 대해주는 날이 많았다.
그리고 며칠뒤 엄마는 두 동생들을 몰래 떼어놓고 나만 동네 구판장에 데리고 갔다. 라면 한 봉지를 구판장에서 끓여 주셨는데 꼬들꼬들한 라면이 입에서 살살 녹는 맛이었다. 국물도 생경하고도 맛깔스러운 맛이었다. 비로소 엄마의 깊은 사랑을 절절하게 확인한 것이다. 구판장 아줌마가 라면 먹는 걸 보면서 한마디 하셨다. [ 얼른 먹고 커서 고생하는 엄마를 도와드려라. 쯪쯪]
그러나 나는 동생들과 함께 먹지 못하는 죄스러움을 어렴풋이 느끼며 먹은 게 지금도 기억이 난다. 집에 가서 라면맛을 절대로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엄마와 나만 간직한 비밀이었다. 지금도 동
생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 그 메아리사건으로 나는 어머니의 지대한 장남에 사랑을 확인하게 되었고 그때 그 라면맛은 내게 각인되어 지금도 밤참으로 또는
술안주로 네게 사랑을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다. 지금도 그 시골 동네에는 내 어릴 적과 똑같은 메아리가 있어 내가 가면 [좋아] [좋아] 반겨줄 것이다.
문예춘추에 실렸던 어린 시절의 석천리에서 추억 에세이랍니다. 아픈 유년이지만 아프지 않게 컸던 시절이지요. 그때 무한긍정의 씨앗이 제 어린 가슴에 깊이 박혔던 것입니다. 이달이 어머니 기일이 담긴 달이라 몆 편의 이야기들이 생각나 올려봅니다. 지금 세상을 살면서 무한긍정, 세상을 즐겁게 살아가는, 사랑을 찾아가는 이유는 이런 어머니의 사랑을 기본으로 참 부지런히 살았던 이유랍니다. 며칠 전 영양 반딧불이 여행을 다녀오며 멋진 형님과 나눈 고향이야기들 속에 한 소절이라 이렇게 게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