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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백살공주 Sep 21. 2024

라면이 내게 사랑받는 이유, 어머니......

라면이 내게 사랑받는 이유

천등산 석천리,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나는 집에서도 밖에서도 학교에서도 별로 눈에 띄는 구석이 없는 외톨박이 소년이었다. 가족의 생계를 꾸려가시는 혼자되신 엄마는 잔잔한 손길로 나와 동생을 돌볼 쳐 지가 아니었을 정도로 가난했기에 연명에 몸부림을 치셨다.


아버지의 부재와 가난 때문에 형편대로 건성건성 성장을 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늘 의식 속에 미움을 받는 아이로 소외되어 있었다. 엄마가 밭일을 나가시고 늦게 들어온 날에는 늘 집안이 엉망으로 지저분했고 그럴 때마다 엄마는 나를 혼내곤 했었다.


또 학교에서도 결손 가정의 아이여서 친구들에게 곧잘 놀림을 받았기에 내 마음속에 난 미움덩어리 아이로 인식되어 있었다. 성장하면서 세뱃돈을 받아본 적이 전혀 없었고 누군가에게 귀하다는 느낌의 눈길조차 받아 본 것이 별로 없었다.


엄마에게 젤로 귀한 대접을 받아야 했으나 엄마는 무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자살을 세 번이나 시도하실 정도로 절망적 힘든 삶이 셨으니 세 자녀들을 귀하게 여길 겨를이 없었다.

 

어느 날 엄마에게 심한 꾸지람을 듣고 갈 데가 없는 나는 앞동산엘 올라갔다. 텅만골에 대고 [미워] [미워]하고 크게 소리를 지르니 털만 골도 네게 [미워] [미워] 하고 맞대 답을 하는 바람

나는 정말 산조차 나를 미워하는 것에 놀랐다. 충격을 받고 그 길로 집에 들어와 방구석에서 저녁도 먹지 않고 잠들어 버렸다.


학교친구들이 미워하는 것도 알고 있었고 엄마가 날 미워하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털만골 조차도 나를 미워하는 사실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 충격으로 나는 다음날도 풀이 죽어 있으니까 엄마가 왜 그러느냐고 물으셨다. [엄마도 나를 미워하고 친구들도 나를 미워하는 것을 알겠는데 텅만골산도 나를 미워해] 그러고 보니까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나 사물은 정말 없었다. 일곱 살 여동생과 다섯 살 남동생만 아무것도 몰라 나하고 놀뿐이었다.


 내가 심심하면 올라가서 혼자 노는 산조차 나를 미워하는 게 나는 너무나 싫었고 이 세상에 완전 혼자 동떨어진 적막감 같은 것이 어린 가슴에 밀려들어

왔던 것이다. 엄마의 매질에도 늘 꼬리만 치던 충견 같았던 체념적 긍정은 온데간데없고 나는 시종일관 시무룩해져 있었던 것이다.

 

내 이야기를 들은 엄마는 갑자기 나를 숨도 못 쉴 정도로 꼭 껴 않으셨다.  엄마 내 심각한 절연감의 실체를 파악하신 모양이셨다. [네가 얼마나 귀여운 내 자식인데....]

엄마의 눈에 이슬 같은 물기들이 번져있었다.  


눈물을 찍으시던 엄마는 곧 내 손을 잡고 앞동산엘 오르셨다.  그리고 텅만골을 향해 [좋아][좋아] 다시 크게 외쳐보

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엄마가 시키는 대로 텅만골에 대고 [좋아][좋아][좋아] 외치자 털만 골도 나에게 [좋아] [좋아] [좋아] 하고 메아리가 꼬리가 길게 외쳐주었다. 그 메아

리는 산골 속으로 작아지면서 사라져 갔다. [봐라 산도 너를 좋아하지]..........

 

그날부터 엄마도 존귀한 하나의 인격체로 대해주기 시작했고 우리 집 주변을 둘러싼 청등산의 행병골, 작은 도독골, 큰 도독골, 검은 동굴, 재피골, 털만골, 사실골 등이 나를 좋아한다고 믿게 되었다. 그 산골에 대고 청아하고도 큰 소리로 [좋아] [좋아] 하고 외치면 그 골자기들도 나를 향해 [좋아] [좋아] 외쳐주니 나는 골짜

기들과도 아주 친한  친구가 되었다.


학교에서 친구들이 날 놀려도 나는 그때부터 외롭지 않았다. 산골짜기들이 모두 나를 좋아하고 있었고 또 일에 지치신 엄마도 나를 아주 귀하게 대해주는 날이 많았다.

 

그리고 며칠뒤 엄마는 두 동생들을 몰래 떼어놓고 나만 동네 구판장에 데리고 갔다. 라면 한 봉지를 구판장에서 끓여 주셨는데 꼬들꼬들한 라면이 입에서 살살 녹는 맛이었다. 국물도 생경하고도 맛깔스러운 맛이었다. 비로소 엄마의 깊은 사랑을 절절하게 확인한 것이다. 구판장 아줌마가 라면 먹는 걸 보면서 한마디 하셨다. [ 얼른 먹고 커서 고생하는 엄마를 도와드려라. 쯪쯪]

 

그러나 나는 동생들과 함께 먹지 못하는 죄스러움을 어렴풋이 느끼며 먹은 게 지금도 기억이 난다. 집에 가서 라면맛을 절대로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엄마와 나만 간직한 비밀이었다. 지금도 동

생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 그 메아리사건으로 나는 어머니의 지대한 장남에 사랑을 확인하게 되었고 그때 그 라면맛은 내게 각인되어 지금도 밤참으로 또는

술안주로 네게 사랑을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다. 지금도 그 시골 동네에는 내 어릴 적과 똑같은 메아리가 있어 내가 가면 [좋아] [좋아] 반겨줄 것이다.


문예춘추에 실렸던 어린 시절의 석천리에서 추억 에세이랍니다. 아픈 유년이지만 아프지 않게 컸던 시절이지요. 그때 무한긍정의 씨앗이 제 어린 가슴에 깊이 박혔던 것입니다. 이달이 어머니 기일이 담긴 달이라 몆 편의 이야기들이 생각나 올려봅니다. 지금 세상을 살면서 무한긍정, 세상을 즐겁게 살아가는, 사랑을 찾아가는 이유는 이런 어머니의 사랑을 기본으로 참 부지런히 살았던 이유랍니다. 며칠 전 영양 반딧불이 여행을 다녀오며 멋진 형님과 나눈 고향이야기들 속에 한 소절이라 이렇게 게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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