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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백살공주 Sep 21. 2024

정선의 인정을 던져준 두 남매

정선의 인정을 던져준 두 남매


강원도 정선 하면 빠르게 먼저 떠 오르는 것은, 기묘한 산의 굴곡과 계곡을 굽이굽이 흐르는 동강의 절경도 뛰어나지만 절대로, 절대로 아니다. 내게 먼저 떠 오르는 이미지는 그런 정경이 아닌 내가 청주에 살기 시작하면서 만난 정선사람들이다. 본인들도 넉넉하거나 풍요롭지 않으면서 따듯한 인정을 내가 청주에 적응하던 시절에  베풀어 주었다. 눈물겹도록 고맙고 따듯한 이야기다. 청주 이야기, 무심천의 이야기,를 쓰면서 꼭 언급하고 싶었다.  마침 오늘이 그날인가 보다.


그 두 남매는 고향이 정선이었다. 그래서 정선하면 먼저  두 남매가 떠 오른다. 내가 48 년 전 연고도 인척관계도 없는 청주에 불쑥 발을 들여놓으면서 우리들 인연은 시작되었다.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그 두 분의 은혜가 오십 년이 흐른 지금도 잊히지 않고 현재 가슴에 남아있다. 그분들은 남매로 둘이었고 나는 혼자였기에 몆 년 까지는 고마움을 갚다가 이제 삶의 파도 같은 여울에 밀려 자주 만나지는 못 하고 있다. 그래도 마음 가짐으로라도 감사한 생각을 버린 적이 없다.


청소년 시절, 청주로 처음 진출하고 살림살이의 구색도 갖추지 못한 채 혼자 자취로 생활을 시작했었다. 낮엔 건축일을 하고 밤에는 검정고시를 보기 위해 야학을 다닐 때부터 우리들의 깊은 인연은 시작되었다. 상당히 늦게 시작한 공부였다. 스물일곱 살에 내가 중학교 검정고시를 합격하고 고등부를 과정을 공부할 때 그는(남매 중 남동생) 야학의 국어선생으로 나타났다.


그는 키도 컸고 성격도 시골스럽게 시원해서 좋았다. 충북대 중문어과 학생이었다. 고향이 강원도 정선이었고, 정선 출신답게 투박한 인정이 많았다. 나보다 나이가 여섯 살 정도 어렸지만 시골 특유의 속성 때문에 눈빛으로 통하는 것도 많았다.


가난한 처지의 상황을 서로 잘 알아서 빨리 친해졌었다. 검정고시가 멀리 남았을 때는 수업을 마치고 곧잘 외상 단골 술집을 만들어 놓고는 마실 정도가 되었다. 무엇 보다도 솔선수범하고 결코 위선적이지 않았으며 가난한 나 같은 나이 많은 학생들을 정말 존중해 주어서 나도 빠르게 감화되어갔다. 학생과 선생님이었지만 수업이 끝나면 형과 동생이 되었다. 그에게 수학풀이가 있었다면 내게는 눈물로 살아온 세상에 대한 경험이 있었기에 은근히 보완 관계가 잘 되었다.  


그는 정선에서 청주로 시집을 온 친누나네 집 옆방에 세를 얻어 놓고는 누나에게 빨래와 식사를 위탁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누나도 단칸 셋방의 어린 자녀 둘을 키우며 월세를 사는 처지였다. 가끔 나도 식객으로 누나의 밥상을 축 내기도 했는데 한 번도 눈치를 주눈 법이 없었다. 늘 따듯했었다.  어릴 때부터 눈칫밥으로 세상을 살아온 나였기에 나는 대번에 알 수 있는 노릇이었다.


겨울이 끝나가는 어느 봄날이었다. 나는 뜻하지 않은 일로 급하게 돈이 필요한 일이 발생했다. 사실 난 그때 청주에서 도움받을 만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내 본생에도 학연, 지연, 혈연이 원래 없는 단신의 외톨박이였다. 도저히 구할 곳이 없어 그냥 포기를 하고 말았다. 기댈 곳이 없는 처지가 너무 아팠다. 속이 무너져서 선생님과 술이나 마시면서 마음이나 풀기 위해 그 선생님 댁을 늦은 밤에 찾아갔다. 그날은 수업이 없어서 야학에도 안 나오셨다. 막걸리 서너 병을 사든 채로.  지금 생각하면 참 못된 학생이었다.


술을 본 선생님은 너무나 좋아했다. 누나를 불러서 같이 마셨는데 내 안색이 안 좋으니까 그 선생님이 연유를 물었다. 나는 며칠 돈 때문에 곤란했던 이야기를 툭 터 놓고 다했다. 다 듣고 난 누나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 뭐 젊은 사람이 그런 일 가지고 고민을 하나. 진작에 나한테 오지 그랬어”

그러시더니 밖으로 나가셨다. 한 참 만에 들어온 누나는 통장으로 보이는 것과 도장까지 툭 던져 주셨다.

“ 우리 주택청약 통장이거든. 필요한 만큼 찾아 쓰고 오월에 청약이 있으니까 그때 줘. 비밀번호도 적어놨어”


집에 총재산이라는 거였다. 내가 필요한 돈의 세배가 넘게 들어있는 통장이었다. 나는 누나의 피를 수혈받는 심정이었다. 누나는 피를 나에게 수혈해 주는 것 이상이었다. 누나네의 빠듯한 살림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내게는 아픈 인정이었다. 그 뒤로 나는 누나와의 약속을 정확하게 지켰다. 낯선 청주라는 도시에서 냉정함에 얼어가던 내 가슴에 훈훈한 인정이 도래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렇게 난감했던 어려움을 해결하면서 청주에 정을 붙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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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 선생님은 내가 고등학교 과정을 마칠 때까지 엄청난 수고를 했었다. 고시를 한 달 남았을 때면 새벽까지 선생님은 싫은 기색 하나 없이 내가 막히는 문제를 풀어 주어서 아마도 쉽게 마칠 수가 있었다.


나는 지금도 선생님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이제는 확실하게 형과 동생으로 되어 있기는 하지만 나는 언제나 그 선생님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고 함부로 대해 본 적이 없었다. 자주는 못 만나지만 내게는 영원한 은사이고 또 동생이다.


그 남매들도 정선의 그 아름다운 절경처럼 아름다운 인성이 변하지 않아서 너무나 좋았다. 나도 천등산 정서를 지니고 있어 변하지 않게 살지만 삶이 사람들의 관계를 흔든다. 늘 내가 많은 빚을 지며 살고 있다.  그만큼 뭔가 넉넉하게 받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분들의 고향 정선을 일 년에 두세 번 정도는 가게 되었다. 그렇게 가다가 정선시장이 정이 듬뿍 들었고 정선시장의 배추 전은 이유를 불문하고 좋아하게 되었다. 일단 배추 전, 메밀전병은 집에 올 때 사 가지고 올 정도로 푹 빠져 버렸다. 우리 식구들도 정선 배추 전과 전병, 올챙이국수를 잘 먹는다.


집은 정선 읍내였고 집대문 밖에만 나가도 주변의 경치가 경이로웠다. 그 남매를 알게 되고부터 강원도는 꼭 내 고향처럼 그렇게 느껴진다. 그래서 정선이나 강원도 사람이라면 모든 걸 믿고 내 쓸개까지 맡기는 편이다. 그 두 남매 덕분에 청주에 정을 생각보다 빨리 붙이고 살게 된 것이다. 저번에 [청주에서 살아남기]를 쓰는데 두 남매 이야기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도 청주에 처음 와서 뻘쭘한 상태였을 때라서 그분들 아니었으면 충주나 아님 포항으로 다시 갔을지 모른다. 청주에는 그렇게 따듯한 사람들 때문에 흥미를 잃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렇게 해서 청주에 마음을 붙였고 결혼하고 다녀들을 키우다 이전 청주의 마니아가 되어있다. 무심천, 미호천, 우암산, 그리고 청주 사람들...... 그 두 분은 나를 그렇게 만든 사람들이다. 앞으로도 나는 청주, 천등산 석천리, 그리고 강원도 정선의 고향이려니 하고 죽는 날까지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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