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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백살공주 Sep 27. 2024

아, 시바~ 야학 스토리

젊은 날에 초상 (꽁트)

성암자활  야학스토리~♡♡(긴 글주의)

하늘은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처럼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었고 나는 오늘 같은 크리스마스 날 눈이 펑펑 내려 온 세상을 하얗게 될 것 같았다. 그렇다면 오늘 저녁에 약속된 만남이 하얗게 즐거울 터였다. 사실 시골에서 스물네 살이 되어서야 청주로 나와서 뒤늦게 공부한답시고 덜렁덜렁 바쁘게 살았다. 직장 다니며 야간학교에 적의를 두고 바쁘게 살아서 아직 도시 특유의 생리와 깊은 내면은 모른다. 다만 농촌보다는 심한 이기주의가 있어서 순진한 내게 오히려 도움이 되는 부분이 많았다. 나는 허허실실 하면서 많이도 속아주며 겸손해하기만 했다. 어쩌면 바둑으로 치면 몆 수는 넘겨보듯 그들의 잔꾀를 읽으면서도 내색은커녕 어리숙하게 속는 척 도시를 읽고 넘어갔다.


성암, 이란 야학이었고 지방 국립대 학생들이 봉사 서클을 만들어서 운영하는 자활학교였고 스물다섯의 내 나이보다 노학생이 많아서 쑥스럽거나 창피하지도 않았다. 순수 문학을 전공하고 싶어서 뒤늦게 들어왔지, 먹고사는 문제였다면 나는 공부에 관심 없이도 환경에 맞게 적응하며 살 것이다.  야학에 선생님들이 모두 나보다 어렸으며 친절했고 성의가 넘쳤으며 눈빛들이 탱글탱글 살아 있었다.  그런 분위기가 좋았고 나 또한 중등과정 일 학년 과정을 공부하고 있었고 세 명의 동기생들은 셋 다 어려서 나를 몹시도  어려워했다. 밤에만 수업이 진행되었고 우리 반에만 배정된 선생님만 과목별로 일곱 명이었다. 대단한 열정들이었다.


특히 국어 선생님이 나보다 다섯 살이나 어렸다. 선생님이셨지만 이미 내가 읽은 책이 선생님보다 많았기에 통 하는 데가 많았다. 그래도 내가 이해의 폭을 넓게 가지고 있어 가끔 밖에서 술도 함께 마시는 일이 많았다. 학교  바깥에서는 내가 형이었다.


그 선생님과 오늘 생맥주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기로 약속해 뒀었다. 한 사람이 더 약속되어 있었는데 다름 아닌 가끔 가는 생맥주집주인의 여동생이었다. 삼십 중반을 바라보는 주인의 미모도 뛰어나서 대체적으로 남자 손님들이 항상 많았다. 흰옷을 즐겨 입었고 단정했으며 미소마저 일품이었다. 그런데 그 주인 여자의 여동생이 중등학교 임용고시를 합격하고 교직 발령을 기다리며 가끔 가게에 나와서 언니를 도와주고 있었다. 얼마나 미모였냐면 태백산 미스 철쭉제에서 진을 수상했다고 했다.

하루는 맥주를 마시는데 카페벽에 없던 시화가 걸려있었다.


여름의 끝

이제 여름은 가고

육림공원 빈 의자에

노란 페인트가 마르고 있다.

낮은 음악이 등로 다가와

등넝쿨을 가만히 흔들고 있다

구관조 새장 앞에서

조그만 아이 하나가 말을 가르치는 소리

햇빛 속에 한 줄로 피어있다


“나도 저 작가를 아는데 너무 너무 좋아한답니다”

“저도 좋아해요”

그래서 그 예쁜 동생과 말문을 열었고 문학의 좋아하는 장르는 시조라고 했다. 나도 시조에 관심을 두고 있었으니까 곧바로 죽이 맞았고 일요일마다 술이 고프면 그리로 달려갔다. 동생님도 꽤나 이외수 님에게 반해 있었고 나도 그 못지않았으므로 자연히 죽이 맞았다.

우리는 춘천을 이야기하고 리얼한 선생님의 문체를 이야기하고 선생님의 소설 [훈장]을 수없이 닦았으며 마치 자유롭게 살아가는 [들개]를 본 것처럼 이야기하곤 했었다. 또 나에게 궁금하게 묻는 것도 많았는데 나는 처음으로 가방끈이 짧은 것에 수치를 느끼게 되어 지방사립대 야간 국문과를 막 졸업 했노라고 본의 아니게 꾸며 놓고야 말았다. 그렇게 해서 사건이 시작되었다.


눈만 펄펄 내린다면 멋진 술자리가 될 소지가 있었다.


어젯밤 수업을 마치고 국어선생님을 따로 불러서 시간이 되면 술을 같이 마시자고 하니까 흔쾌히 약속해 주셨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날이라서 수업이 없었고 나는 낯선 도시에서 처음으로 맞는 성탄을 외롭지 않게 보낼 수가 있었다. 도시로 낯설게 이식한 꿈만 말똥말똥했지 상황은 모든 게 불리한 상태였고 따라서 지구력은 필수가 되었다. 아마도 선생님과 맥줏집 여동생만 아니면 삭막하기 그지없을 터였다. 약속시간은 아직 많이 남았음에도 공연히 기분이 좋았고 마음이 들떠 책이라도 보려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약속시간이 다가오면서 갑자기 띄엄띄엄 눈들이 날리기 시작했다. 멋진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당연했고 이방인의 가슴을 달래줄 술판이 기다리고 있어 나는 외출준비를 했다. 대문 밖에만 나가도 캐럴송들이 반짝이는 조명과 더불어 신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외사 춘 형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은. 외삼촌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도립의료원에 입원했는데 위급하니 고모를 모시고 오라는 전화였다.  어머니와 병원을 택시 타고 갔을 때는 이미 숨을 거두신 뒤였다. 아, 안타까운 교통사고, 왜 하필이면 나를 사랑해 주는 외삼촌이냐? 어느새 약속은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성탄의 밤을 가장 슬프게 보내야 했다. 외삼촌은 내게 가장 가까운 친척이어서 슬픔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눈은 어두워지자마자 함박눈으로 변했고 약속을 떠 올렸을 때는 이미 약속시간 두 시간이 넘어 전화를 하기도 그랬다.

아, 그런데 머리에 번쩍 스쳐가는 불행한 생각이 있었다. 국어 선생님에게 내가 카페주인 여동생에게 내 학력을 둘러댄 상황을 설명해 놓지 않아 걱정이었다. 그 동생과 이야기 속에 나를 야학의 중등부 학생이라고 이야기하면 큰일이었다. 아직 세상의 때가 덜 타서 있는 그대로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할 확률이 높았다. 그러면 나는 다시 그 맥주집에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었다. 다른 것은 괜찮은데 중학교 과정을 공부하면서 대학을 졸업했다는 그것은 내게 치명적이었다. 나는 이미 눈치가 광속도 이상이라서 그런 일에 별로 실수가 없었지만 국어 선생님은 달랐다. 꼭 주의를 줘야 했는데 큰일이었다.


그 일이 참으로 걱정이었다. 미리 힌트를 줬어야 했는데, 미칠 일이었다. 다행히 장례를 치를 때는 눈이 멎었고 날씨도 포근해서 별다른 고생들은 없었다. 대다수가 그랬다. 성탄의 밤에

죽는 일은 천사가 좋은 날 택해서 모시고 간 거라고. 수긍이 가는 말이었다.


학교는 수업 중이었고 나는 조용히 뒷자리에 앉았다. 부담임 선생님 수업시간이었다. 사회과목 담당이었고 경영학과 삼 학년인데도 나를 참 좋아했다. 내가 좋아서 나중에도 고삼반까지 부담임을 직책을 유지했는데 검정고시에서 중학교 사회와 고등학교 사회를 다 백점으로 보답을 해 버렸다. 나는 마음이 동하지 않아 더러 힘들기도 했던 선생님이었다. 종례는 그래도 담임이었던 국어 선생님께서 늦게 나와해 주셨다. 수업을 마친 우리는 학교 앞 포장마차로 갔다. 삼일동안 잠을 못 잤지만 그날밤이 궁금해서 졸리지도 않았다.

“와 그분 너무나 잘 생기셨고 정병국 님이 없어서 둘만의 술맛 그만이었습니다.”

“혹시 저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셨나요?”

“성실한 야학 학생이라고 많이 좋게 이야기했어요”

역시 예감했던 대로 일이 진행되고 말았다. 빌어먹을 이었다. 술이 마셔지기 시작했고 국어

선생님을 원망할 수없었다. 다시는 그 맥주집과 그 미모의 자매들에게 다가갈 수가 없음이 커다란 슬픔이었다. 아, 가슴 떨리던 문학과 이외수 님에 대한 이야기들. 그때까지도 누군가와 그토록 진지하게 문학을 이야기한 상대가 없었다. 국어선생님도 실수를 인식하시고 나서 연신 죄송스러워하시며 엎질러진 물을 퍼담지 못해 안타까워했다. 이미 실추된 내 이미지

는 구축하기가 어려울 일이었고 나는 다시 그 맥줏집 쪽으로도 가기가 두려웠다. 길에서라도 마주칠까 봐 무지 걱정하는 신세가 되었다.


겨울은 지루하게 흘러가고 있었고 나는 그저 공부에만 몰두하려고 노력했다. 첫 검시에 중등과정은 합격해야 했으므로. 나이가 있으니 빨리 대입자격을 획득해서 사립지방대 야간 국문학과라도 들어가야 했다. 더러 술을 마실 때는 맥줏집 자체를 멀리하고 오직 포장마차만 애용하게 되었다. 바람만 싸늘하게 불어 가고 나는 추위만 가린 야학의 건물에서 난방도 없이 공부에 몰두했고 전깃줄을 켜는 바람 소리에 이를 덜덜 떨며 일과 공부를 차질 없이 하고 있었다. 노학생의 비애 따위는 야식 라면에 삶아 먹은 지 오래였다.


사락 눈이 내리는 토요일 수업이 끝난 교실에서 모두 돌아간 뒤 나는 졸린 눈으로 책을 펴놓고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교실 뒷문이 드르륵 열린 것은. 뒤 돌아본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눈을 하얗게 맞고 손에는 장미꽃을 한 아름들고 서 있는 여자를 본 것이다. 뒤에 국어 선생님도 함께였다.

“왜 저희 집에 안 오세요. 언니가 기다린다고요.”

나는 할 말을 잊었다. 가슴에 까닥 모를 희망들만 마치 안개처럼 가득 몰려오고 있었지만 꼭 현장을 들킨 사람처럼 쥐구멍을 찾는 심정이었다.


훗날 내가 일 년을 간격으로 중등과 고등부를 합격하고 대입 시험을 치를 때까지 연인사이가 되었고 내가 대입을 낙방하자 그녀는 지방에 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하자마자 신규 체육교사와 결혼해 버렸다. 아, 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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