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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백살공주 Oct 05. 2024

난해한 아버지

아버지.. (14년 전 쓴 단편소설) 자전적 이야기


나는 지금 한 집안의 가장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고 미취학 작은딸과 초등학교 이학년의 큰딸을 둔 아버지가 되어 살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나의 아버지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이제 아버지가 되고 나니까 생각이 깊어지면서 조상에 대한 핏줄의 내력과 아버지를 이해하는 마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어머니와 살아오면서 아버지를 증오하기만 했지 그리워하거나 보고 싶거나 하지 않았다. 평생 동안 잊고 지낼 생각을 했었는데 이제는 달랐다. 저 북한의 평안북도 소식만 있어도 할아버지나 아니면 아버지의 누이나 동생들이 살고 있을 거 란 생각을 하면서 조상의 뿌리에 대한 집착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다음 주면 나는 중국을 거쳐서 북한의 접경지대를 찾아가 국경에서 가까운 아버지의 고향을 건너다보고 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어릴 때 아버지에 대해서 기억나는 게 있다면 얼굴 모양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엉성한 사람의 형체가 기억의 전부였었다. 내가 초등학교 일 학년을 다니던 초봄, 밭에 옥수수를 파종하는 바쁜 시기에 아버지는 그토록 갈망하시던 자살을 성공하셨고 어머니와 두 동생들과도 동반 자살을 시도하셨는데 본인만 성공을 하시고 말았다. 식구들이 모두 잠든 새벽에 도끼를 휘둘러 어머니와 두 동생들에게 살인을 저지르고는 본인은 뒷산 밤나무에 목을 매서 목숨을 거두는데 성공을 했었다. 나는 장남이라 종족보존의 유일한 씨로 여기셨는지 나는 온전하게 그날 아침을 맞았다. 코에서 비릿한 냄새를 맡으며 잠에서 깼을 때는 방안 장판은 온통 피가 흘러 다녔고 어머니와 동생들은 상처투성이로 쓰러져 의식을 잃고 있었다. 아버지의 자리는 베개만 남은 채 텅 비어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울음을 터트리며 외갓집을 향해서 뛰었다. 내 옷에는 피들이 흥건하게 묻어있었다.


그리고는 이상하게 내 기억의 필름들이 끊겨버리고 나는 약 사 개월 동안을 외가에서 학교를 다녔다. 집에는 절대로 못 가게 외 삼촌과 외숙모가 말렸고 웬일인지 내 앞에서는 우리 집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다. 어머니와 두 동생들은 목숨을 건지고 아버지는 돌아가셨다는 소식 정도를 학교를 오고 가며 다른 사람들에게서 듣곤 했는데 또렷하게 기억나는 것은 지금까지도 없었다. 다만 내가 외갓집 생활을 청산하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는 엄마의 머리에 하얀 붕대가 감겨 있었고 두 동생들과 저녁을 먹을 때였다. 다들 온전해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만 기억이 선명했었다.


아버지의 난해한 살인미수와 본인의 자살 때문에 나는 학교에서 곧 잘 놀림을 받았고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내 얼굴에는 피 멍이 마를 새가 없었다. 워낙에 내게 치욕적이고도 창피한 일이어서 어린 나이에 감당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를 입에 올리는 적도 없었고 깝죽대며 놀리는 녀석들이 있으면 그날로 녀석의 코피가 터졌다. 조금 큰 형들이 놀리면 나는 짱돌을 집어 들고 정면으로 던져 골통을 깨서 매를 맞기도 여러 번이었다. 집에서고 외갓집에서고 또 동네에서도 아버지에 대한 언급은 철저한 금기 사항이었고 집안 구석에 아버지와 연관된 물품이나 사진, 아버지가 창호지로 만든 얇은 족보조차도 다 외가 어른들에 의해 태워져 버렸다. 아버지의 흔적이라고 남은 것은 하나도 없었고 농사에 필요한 지게나 연모 정도만 남아 있었다.


아버지의 고향은 이북의 평안북도 신의주 부근의 시골마을이었다. 나중에 내가 커서 면사무소에 가서 나의 호적을 떼어 보니까 주소가 그렇게 되어있었다. 육이오 사변 전쟁당시 인민군으로 전쟁에 참가했다가 포로가 되었고 반공포로 석방 때 남한을 선택을 하셨는데 그날부터 망향에 한을 가슴에 품고 사시게 되었다. 살면서 어머니도 만나시고 외로움에 처가 근처에 살림을 차리셨다. 날마다 장인과 장모를 마치 부모님 이상으로 공경하셔서 아들보다 더 잘한다고 소문이 났고 딸 시집을 잘 보냈다고 소문이 마을을 돌아다녔다. 그 두 분이 돌아가시면서 정신에 문제가 오기 시작했다. 북에 두 고온 부모님도 돌아가실 때가 되었다며 미쳐가기 시작했고 특히 외아들이라서 더 못 견뎌했고 급기야 정신 이상이 오고 말았다. 시도 때도 없이 자살을 시도하시고 기회만 도래하면 줄을 가지고 나무에 올랐고 그때마다 미수에 그치고 말았는데 돌아가시던 그 무렵은 좀 나아진 상황이라서 마음을 놓을 때였었다.


그때 아버지의 도끼에 이마를 맞은 어머니의 이마는 지금도 두개골 일부가 손가락 한 마디정도 함몰되어 흉터로 남아있었다. 정말이지 기적적으로 살아남으신 분이었다. 피를 워낙에 많이 흘리셔서 그때부터 겨울이나 환절기가 되면 앓아누우시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어지러워 아무것도 못 하시는 거였다. 두 동생들은 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거적 위에 아무렇게나 방치하고 오직 어머니 살리기에 몰두를 했는데 기적적으로 동생들이 살아났다는 거였다. 그래서 생명은 아무나 버리고 싶어도 못 버린다는 말이 동네에서 몇 년 동안 돌아다녔다. 동생들은 기적의 생환이었고 그중에 남동생은 이번에 같이 중국으로 나와 출국을 해서 아버지의 고향을 압록강 변에서 아버지의 고향을 살피고 올 거였다. 그때 어머니와 동생들을 살려내느라 약간 있던 재산을 모두 소진을 해버렸고 초가집만 덩그러니 남았었다. 부쳐 먹을 밭조차 변변치 못했고 또 밭이나 논이 있어도 일손이 없어서 헛일이었다. 가난 속에서 가장의 부재는 너무나 삭막한 상황을 초래했고 어머니마저 건강이 연약해서 나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노동에 흑사를 당하게 되었다. 지게 일도 내게는 벅찼고 밭에 김매는 일에 지칠 때마다 나는 아버지에 대해 원망을 넘어서서 증오까지 하였다. 일이 너무나 힘들면 왜 목숨을 다 거둬 갈 일이지 본인만 가서 이렇게 나를 고생시키고 있나 자누 한탄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고단하게 소년기와 오직 무거운 지게질로 얼룩진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아버지에 대한 악의적 감정은 쌓여만 갔고 고생으로 얼룩진 자신을 돌아볼 때마다 조상에 대한 미련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방송국에서 이상가족 찾기 방송을 연일 내 보낼 때 그래도 어머니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혹시 모를 아버지의 친척들이 아버지를 찾을 것 같아서 텔레비전 앞에서 눈을 떼지 못하셨는데 나는 거들 떠 보지도 않았다. 외가집안 친척들이 조상을 끔찍하게 섬기는 것을 보면서, 또는 친구들이 조상들의 제사를 챙기며 엄숙하게 가정의례 준칙을 행하는 것을 보면서도 나는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내게 부여된 생활고들을 헤쳐 나가기 급급한 날들이었기에 예민한 청소년기에는 까닭 모를 반항기에 불량한 생활을 해 보기도 했었다. 그렇게 쉽게 생을 포기하고 가족들의 목숨까지 쉽게 접어 버릴 거면서 왜 결혼을 하고 우리들을 낳아 놓았을까. 참으로 답답했고 아버지가 계신 친구들이 상급학교 교복을 입은 모습을 볼 때마다 목이 메어져 왔고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 얼마나 농사의 그 고된 일들이 나를 혹사시켰는지 사춘기 성장 호르몬의 진액들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때로는 땀과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면 하늘은 참으로 무표정하게 나와 상관없이 아름다운 구름들을 하얗게 풀어 양 떼도 만들고 푹신한 솜을 만들면서 마냥 아름답게 연출을 해 가고 있어 약이 오르기도 했다. 구겨지는 내 청춘과는 상관도 없이.


농촌에서의 내 삶을 펼치기가 너무나 아쉬워 끝내 도시로 진출을 하고 도시에서 오직 돈을 버는 데만 모든 신경세포들을 모아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남다르게 살았다. 조상과 뿌리도 변변찮은 놈이니 당연히 돈이라도 있어야만 사람취급을 받을 것 같았었기 때문이다. 부지런하게 살았고 단 한 푼이라도 소홀하게 하지 않으니까 당연하게 돈이 모였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는 여전했으나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하나 둘 낳고 보니 나도 어느새 아버지가 되고 삶에 대한 성찰과 커 나가야 자식들을 생각을 하니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서서히 허물어져 가게 되었다. 망향에 대한 상실감과 끝없는 외로움, 절망 따위들이 아버지의 의식들을 오래도록 휘감고 있었을 테고 포로석방 때 남은 사람이라서 정부의 은근한 감시 또한 갑갑했을 수도 있었다. 극도의 외로움이나 고독들이 때로 사람을 변화를 시키기도 하는데 아버지의 처지는 알게 모르게 나도 이해와 용서로 흘러가고 있었다.


따라서 늘 형식적으로 지내고 있던 제사도 온 정성을 들여 지내게 되고 북한에서 이제는 돌아가셨을 조부모님들의 젯밥도 명절 제사상에 떠 놓고 지내게 되었다. 아버지가 외아들이었기에 당연히 지내 줄 사람이 없었고 나도 나이가 들면서 저 북한 소식만 들어도 혹시 조상님들이나 아버지 친척들 소식이 없을까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피를 못 속이고 때가 되면 다 조상을 찾게 된다는 사실에 나 스스로도 놀라고 있었다. 젊었을 때 외가 친척들이 나에게 그런 말을 하면 나는 피식 웃었었다. 내 불행한 유년은 모두 아버지가 망쳤다고 철저하게 믿어 왔었다. 그런데 자식들을 낳고 나이가 들면서 달라지기 시작한 거였다.


동생과 나는 중국을 거쳐 장백산(백두산) 여행을 하러 가고 있었다. 나보다 두 살 어린 동생은 아버지가 휘두른 도끼에 맞아서 죽었다고 방치를 했었는데 살아났고 커 가면서 왼쪽 어깨와 팔을 잘 못썼었다. 어깨를 도끼에 맞은 거였다. 아무리 미치고 독해도 도끼로 자식 머리는 못 때리는 모양이었다. 다 성장하니까 통증이 멎는 듯하더니 요즈음은 다시 통증이 도진다고 출발을 하면서 말을 했었다. 연변 쪽으로는 탈북자나 북한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아서 조금 웃돈만 주면 얼마든지 신의주 주변 소식은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준비를 해 왔다.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다섯 분의 고모들 중에 분명 살아 계시는 분이 있을 거였다. 그리고 조상들의 줄기를 찾을 수 있으면 이번 여행은 성공이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내가 오랫동안 증오를 해 왔던 아버지에게 그 망향에 한을 풀어드리는 셈이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산소에 가서 봉분의 흙을 조금 퍼왔다. 고향이 보이는 강변에서 흙을 뿌려드리고 할아버지에게 술잔을 부으며 제사를 지내드리고 갈 생각이었다.


장백산 관광을 마치고 신의주가 건너다 보이는 강변의 마을로 우리 형제는 향했다. 일행들은 모두 다른 일정의 여행이 있었으나 우리 형제는 이제부터가 진짜였다. 강변이 가까워지면서 우리 형제는 긴장을 했고 안내 가이드만 압록강 주변을 수시로 이야기를 해 주었다. 돈으로 미리 북한을 드나드는 사람을 수배해서 다녀오게 했으니까 강변에 도착과 동시에 그곳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가이드들이 보낸 우리보다 먼저 북한을 다녀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십 대 조선족 사람이었는데 북한과 중국을 오가며 밀수를 한다는 사람이었는데 우리에게 엄청난 소식을 전해 주었다. 놀랍게도 우리 아버지가 저 땅에 살아있다는 거였다. 우리 형제는 깜짝 놀랐으나 그는 사진까지 가지고 온 거였다. 정황으로는 분명 아버지였고 함자도 같았고 살아 계시면 나이도 딱 맞아떨어지는 거였다. 조부모님들은 모두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남한에서 십이 년 정도 살아 있다가 돌아와 살고 있다는 거였다.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래서 우리 형제는 국제 전화가 가능한 곳으로 인근의 마을로 찾아갔다.


삼십 년 전에 나무에 목을 매고 돌아가셔서 고향뒷산에 묻혀있는 아버지가 이곳에서 살아계신다니 우선 외삼촌에게 전화를 드려봐야 할 것 같았다. 멀쩡하게 살아계신 아버지에게 우리 형제는 어릴 때부터 제사를 지낸 꼴이었다. 사진의 모습은 분명 아버지였고 또 돌아가신 것도 분명했다.


마침 이제는 바깥출입도 못 하시는 외 삼촌께서 전화를 받으셨다. 나는 이곳의 상황을 전해드리면서 떨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모르는 음모들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의 무덤을 놓고 뭔가 석연하지 않은 일들이 꼬리를 물고 나왔다.


“얘야 거기까지 갔구나. 너의 아버지 무덤은 허묘란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단다. 너희 아버지가 식구들을 다 그렇게 망쳐놓고 이북으로 도망을 갔고 우리는 너희를 위해 얼른 너희 아버지를 새벽에 묻은 것처럼 작은 외 삼촌이랑 서둘러 봉분을 만들었단다. 월북자의 아들로 너희가 크는 것보다는 사망자로 해 두면 아무런 제재가 없었던 거다. 그리고 너희 아버지가 각본을 짜놓고 일을 저질러 우리는 수습만 했을 뿐이다. 오해는 하지 마라. 내가 죽기 전에 다 이야기를 해 주려고 했는데 먼저 알았구나. 그 사실을 너희 엄마도 모르니 절대로 이야기하지 말고 또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어머니도 동생들도 다 살아 있는 이유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아버지는 처자식들에게 도끼를 휘두르면서도 결코 악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 도끼로 맞으면 다 죽을 터인데 안 죽을 만큼만 맞은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북으로 되돌아가신 거였다. 나는 지금까지 정말이지 무지하게 아버지를 원망해 왔었다. 가족들의 목숨까지 거둬 갈 무서운 사람이라서 어쩌면 인간세상에 태어나지 말아야 할 사람으로 늘 생각해 왔었다. 그런데 저 땅에 살아 계시다니.


동생의 눈에서도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압록강은 우리 형제의 슬픔을 음미하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버지의 운명이나 우리 형제의 운명이나 기묘하고도 기구했다.


한 하늘아래 이런 일들이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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