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는데 그 식탐은 내게서 한 번도 떨어져 나간 적이 없어 행복함도 많았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덩치의 비애들을 느낄 때는 식탐, 식도락, 한 번도 잃어본 적이 없는 입맛 중에 어느 것 하나라도 내게서 멀어지기를 긴절하게 바란 적도 많다.
항상 키가 크고 옆으로의 부피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시선이 버거울 정도로 육중해 보이는데 내게는 아주 쓸모가 없다. 그런데 빌어먹을 거대풍채 때문에 아주 곤란한 일들이 발생하는데 그것이 단체 체육대회에서 팔씨름 선수나 씨름 선수로 뽑힐 때이다. 힘 겨루는 것에 뽑혀 나가 봐야 항상 상대 선수는 나보다 작은 체구가 거의 다여서 나는 잘해야 본전에 불과하고 지면 창피가 남들보다 두 배가 된다. 이기면 당연하고 지면 창피한 일이라 되도록이면 나서지 않는 게 속 편한 일이다.
나는 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한다. 살아오면서 남을 건드리지도 않지만 시비를 받아본 적도 없다. 맞아본 적이 별로 없다. 일단 싸움이 생기면 나를 포기해 버린다. 그러면 자연스레 두려움도 사라지고 겁을 상실해 버려서 영혼이 자유로운 싸움이 되니 내가 이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그런데 원하지 않는 팔씨름에서 체구는 작지만 신체의 불균형에서 발생한 팔사용의 빈도로 힘이 기형적으로 늘어난 친구를 만나면 지는 일도 많은데 그때 덩치의 비애가 상대적으로 크게 작용한다. 싸울 명분이 없는, 단지 이기는 게임을 위한 게임이라서 나를 가지고 싸우게 된다. 그냥 겨뤄서 이겨봐야 아주 당연시되기에 특별하게 나서는 일은 아예 없다. 완전 손해를 보는 장사인셈이다. 그런 상황을 피하지 못하고 나서서 하게 되어지는 날이면 나는 아, 키는 임의적으로 줄이지 못하더라도 무게는 줄여야 한다는 다짐을 꼭 한다.
그러나 그런 상황을 지나고 나면 야명조라는 새처럼 까맣게 잊어버리고 덩치를불리는 그 먹는 맛의 순례에 빠져든다. 야맹조는 밤만 되면 돌아갈 집이 없어 밤새 울다가도 아침해만 떠 오르면 지난밤의 비애는 까맣게 잊고 노는데만 치중하는 새인데 꼭 내가 그 꼴이어서 맛이 좋은 음식을 만나면 팔씨름에서 졌을 때의 망신은 홀랑 잊어버리고 오직 그 맛을 먹는 것에 치중해 버린다. 다행인 것은 몸에 좋은 것은 선호해 본 적이 없을 정도지만 값싸고 맛이 살아있는 음식점은 꼭 찾아가서 먹어 봐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다. 사는 맛 중에 먹는 맛이 차지하는 비중에 인생사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큰 사람이다.
며칠 전부터 덩치를 줄여야 한다면서 긴장을 일깨우고 일부러 입맛이 동하지 않는 곳을 의식적으로 찾곤 했었는데, 그러다 보면 내가 왜 이러지, 하고 놀라기도 한다. 육십 년 동안의 식욕이 쉽게 변할리 만무하다. 입맛, 밥맛이 한꺼번에 떨어진 적이 한 번도 없다, 입맛이 실종되면 밥맛이 살아나고 밥맛이 실종되면 입맛이 살아나 닥치는 대로 먹는다. 문제는 경건한 맛이던 교회밥도 맛으로 다가와서 이젠 조금 걱정이 된다. 도대체 못 먹는 것이 없다. 그러니 106~110의 무게는 줄어들지 않는다. 영토는 언제는 그 육중함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지면 당연해지는 그런 초연함은 나이가 더 들어가니 조금 낮아지는 것 같기는 한데도 지기는 싫은 게 여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