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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호 Jan 30. 2022

[그럼에도 우리는 ②] 나를 봐달라던 신호

- 음악하는 두 여자와 열아홉 살 고양이 두 마리의 이야기

나를 봐달라던 신호


처음엔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이 점차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 오로와 조로는 그렇게 친밀한 사이가 아니었다. 오로는 엄마 시로의 곁에 딱 붙어 있을 때가 많았고 떨어져 있을 때에도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데 익숙해 보였다. 반면 조로는 주로 혼자 있었고 사람들에게 자주 다가왔으며 말이 무척 많았다. 나에게 빨리 다가와 말을 걸고 친해졌던 것 역시 조로였다. 보통 조로가 오로와 시로에게 다가가는 편이었는데 그때마다 오로는 조로를 피해 다른 곳으로 옮겨가곤 했다. 동거인의 말에 의하면 아주 어릴 때부터 이 구도가 이어졌다고 한다. 오로는 엄마 껌딱지, 조로는 천덕꾸러기.


나는 세 자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첫째가 이미 자신의 기반을 다져놓은 세상에 내가 태어났고 막내가 등장해서 집안의 귀여움을 담당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밖으로 돌기 시작했다. 하루 일과를 하나도 남김없이 엄마와 소통하는 언니, 나는 가질 수 없었던 엄마의 치마폭을 거머쥔 동생과 달리 어린 시절의 나는 집안에서 과묵했다. 그 과묵함의 시간만큼 나는 집안에 있는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초등학교 시절엔 어린이 세계명작 시리즈, 추리소설, 위인전 등에 매료되었고 중학생이 되자 젊은 시절의 아버지가 모아두었던 쿰쿰한 냄새를 풍기는 두꺼운 고전들을 읽기 시작했다. 세로로 쓰인 좁쌀만 한 글씨들을 차곡차곡 읽다 보면 어느새 책 속의 등장인물들에 동화되어 밥 먹는 시간도 잊어버리곤 했다. 부모님은 이런 나를 ‘책벌레’, ‘우리 박사’라고 부르며 커서 뭐가 되려고 저렇게 책을 좋아할까라고 칭찬하듯 말씀하셨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나는 '가끔씩'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다. 소설, 철학서적, 만화책을 좋아했고 책은 아니지만 각종 웹툰을 섭렵하기도 했다. 시간을 운용하는 방식은 어린 시절과 많이 달라졌으며 하고 싶은 일만 고집할 수 없지만 나는 간간히 외부와 단절하고 그렇게 가상의 세계에 몰입하곤 했다.


그리고 그 시기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대체로 타인에게 상처를 받았을 때, 나의 쓸모가 너무 미미하게 느껴진 나머지 무기력하고 우울할 때, 혹은 사람들과의 ‘관계 맺음'을 피하고 싶어질 때였다. 가족들보다 바깥세상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교류가 편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조차 온전한 나로서 존재한다는 건 쉽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빠져들 수 있는 가상의 세계는 항상 매력적이었고 안전했다. 다만 요즘은 과거에 비해 시력과 집중력이 현저하게 떨어져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 형편이다.


조로의 울음소리는 여느 고양이들의 소리와 구별하기 쉬웠다. 어쩌면 그렇게 독특한 목소리로 본인의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조로는 워낙 낮은 음역대로 크게 울었고 소리의 종류도 다양했으며 종종 허스키한 발성이 나오기도 했다. 집에 놀러 온 친구들이나 영상을 통해 조로를 만난 사람들 백이면 백, 조로 목소리를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나와 닮았다는 얘기를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사실 나는 처음부터 오로에게 홀딱 반해 마음을 빼앗겼다. 오로와 조로가 내 말을 들을 수 없는 집 밖에서만 얘기할 수 있는 비밀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눈치를 보는 듯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다가와서 다른 종(種)과의 스킨십을 꾀하던 조로가 눈에 밟히는 날이 점점 더 많아졌던 것 같다.


그날의 햇살


너는 오른쪽, 나는 왼쪽


오로와 조로의 집에 드나든 지 일 년 정도 된 어느 날, 나는 그 집으로 이사를 들어갔다. 그 사이 이 녀석들은 열세 살이 되었고 시로는 우리 곁을 떠났다. 작은 유골함은 동동이의 유골함 옆에 자리를 잡았다. 이미 익숙해진 탓일까. 혹은 본인들의 영역에 내가 들어간 모양새라 그런가. 둘 다 내가 주로 생활하는 방에 스스럼없이 드나들었다. 서리가 내려앉는 겨울, 아침볕이 어스름하게 들어올 때 방에 깔아 둔 폭신한 러그 위로 두 마리의 고양이가 마음 편히 뒹구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 방에는 작은 2인용 소파가 있었는데 가운데에 내가 앉으면 언제나 왼쪽에는 오로, 오른쪽에는 조로가 자리를 잡았다. 두 마리의 고양이가 자기 방향을 고수하게 된 건 순전히 오로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오로는 동거인의 왼쪽에 존재하기를 고집했다고 한다. 조로가 다가와 같이 눌러앉으려고 하면 오로는 반대편으로 가는 게 아니라 아예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나의 스무 살 기억 속에는 항상 동기 하나와 2년 터울의 선배 하나가 있다. 그 해 우리 셋은 잘도 붙어 다녔다. 학회실, 서관 잔디, 술집, 학생식당, 주말이면 극장도 함께 다녔다. 하물며 등록금 좀 그만 올리라고 도로에 나선 학생들을 쫓아오는 경찰로부터 달아날 때조차 우리는 함께였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에 선배는 가운데, 동기는 선배의 오른쪽, 나는 선배의 왼쪽에 서 있었다. 선배는 가운데가 싫다고 늘 항변했지만 나와 동기의 고집에 이내 져주곤 했다. 뜨거웠던 여름방학에 농활과 풍물굿 전수를 마치고 셋이 떠난 여행에서도 이 법칙은 예외가 아니었다.


우리는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읽고 남도답사여행을 계획했다. 아쉽게도 책에 나온 코스 전체를 섭렵할 수는 없었지만 그 여행은 지금까지도 나에게 특별한 감각으로 다가온다. 유선여관으로 들어가는 낭구 내내 나무 사이로 부는 흙내 담긴 촉촉한 바람, 장작불을 때는 냄새가 밴 전통한옥의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 그리고 썰물처럼 관광객들이 빠져나간 달마산 미황사에서 주지스님이 내어주시던 차의 풋풋한 향기, 땅 끝 마을 ‘토말(土末)비’에 가려던 우리를 태우고 벤을 몰던 스님의 맨들거리는 뒤통수. 여행은 3박 4일로 계획했지만 모든 게 완벽했던 터라 우리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3일째 되던 밤에 각자의 주머니를 탈탈 털어 이틀 치의 숙박비와 잔돈을 마련했다. 다행히 예약 손님이 없어 유선여관에서 이틀을 더 묵을 수 있었고 이후의 일정은 주로 걸어서 이동하는 경로만 계획했다. 마지막으로 그곳에 머물던 5일째 밤에 누군가가 방 뒷문을 작게 두드렸다. 깜짝 놀란 우리들이 조심히 문을 열어보니 쪽마루 위에 여관을 운영하시던 분이 웃으며 앉아 계셨다. 무심한 듯 내민 쟁반 위에는 커다란 양푼 속 보리밥이 그득하게 담겨있고 푸짐한 대여섯 가지의 나물이 두꺼운 이불처럼 덮여있었다. 참기름 냄새와 고추장 냄새가 코 끝을 간지럽혀 이내 침이 고였다.


    “젊은 양반들이 라면만 먹으면 어째? 이것 좀 잡숴봐.”


눈물이 날 뻔했다. 우리는 염치 불고하고 덥석 쟁반을 받아 들었다. 몇 번씩 머리를 숙이며 감사하다 말씀드렸고 그분은 별 거 아닌 듯 손사래를 치시며 작은 쪽문을 닫고 가셨다. 행복한 얼굴을 하고 쉼 없이 숟가락을 오가던 우리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천상의 맛이었다. 그보다 맛있는 비빔밥은 아직까지 먹어보지 못했다. 이후로도 함께 걸을 때 자신의 위치를 고집하는 사람들을 왕왕 발견한다. 그때마다 선배와 동기와 나, 그리고 남도답사여행을 떠올린다.


우리들의 식사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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