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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이 Jul 12. 2023

소설 집필의 시기입니다.

(=학기말 통지표를 쓰겠다는 말)


재작년에 학창 시절 생활기록부를 조회해 본 일이 있다. 

나는 내내 존재감 없는 모범생이었으니 매해의 생기부에는 '성실, 조용, 꼼꼼, 진지' 등의 재미없는 단어들이 키워드로 등장했는데, 그중 멀끔한 니트에 풀려 버린 한 가닥의 올처럼 툭 튀어나온 표현을 발견했다. 

중학교 생기부였다.



나는 선생님의 의견을 대부분 신뢰하나,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한 면이 있었다. 

소리에 민감한 편이라 친구들이 떠드는 소리에 선생님들보다 더 예민했고 수업 중 들리는 거의 모든 말을 필기하는 게 미덕인 줄 알던, 선생님 대뇌 복사기 같은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고로 '집중은 잘하나 열심히 참여하진 않음'이라는 한줄평이라면 고개를 끄덕였을 테지만 그 반대는 인정할 수 없었다.

 

나는 동창생들에게 이 사태를 알려주며, 아무래도 선생님이 다른 친구와 헷갈려서 내 생기부를 잘못 쓰신 것 같다고 얘기했다. 


그러자 친구는 사뭇 진지하게, "혹시 덩치가 산(山)만하다는 거 아닐까?"라고 대답했고, 

나는 그 친구를 죽일지 살릴지 고민하다가 '그것이 알고 싶다'로 방송데뷔를 하는 건 아무래도 자랑거리가 아닐 것 같아 아직은 살려 두고 있다.


어쨌거나 클릭 몇 번의 수고로 몇십 년 전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걸 보면 학교생활기록부는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퍽 의미 있는 기록물이다. 

그러나 의미 '있는' 기록물인지 의미 '있었던' 기록물인지는 이 글을 끝까지 읽고 난 뒤 개인의 판단에 맡기겠다.

술(述)보다 감정이 중요해진 시대에 선생질을 하며, 어떤 순간에는 '생활기록부'라는 다섯 글자를 빨간 펜으로 죽죽 긋고 '용비어천가' 쯤으로 수정하고 싶기 때문이다.




몇 년 전 회의에서는, 교과평가를  '매우 잘함', '잘함', '보통', '노력요함'의 4단계에서 3단계로 줄이면서 용어를 어떻게 내보내야 하느냐를 두고 치열한 갑론을박이 오갔다. 80% 이상의 성취를 한 학생에게 '매우 잘함'의 영광을 부여하자는 데에는 모두가 이견이 없었으나, 늘 그렇듯 80점 미만의 경우가 문제였다. 60% 이상, 80% 미만의 성취를 한 학생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어떤 선생님은 70점을 받았는데 잘했다고 할 순 없으나 '보통'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셨고, 또 어떤 선생님은 '매우 잘함' 다음이 '보통'인 게 이상하다는 근거로 이를 반대하셨다. 


다음 타겟은 '노력요함'이라는 표현이었다. 노력이 필요한 학생에게 노력요함이라는 표현을 적어야 할지, 그 아이의 감정을 생각해서 다른 표현으로 순화해야 할지를 두고 회의는 끝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학습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진짜로 노력해야 하는(=학습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학생들에게, 그네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진실을 고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오라는 걸로 그 회의는 끝이 났다. 


나는 결국 '불편한 진실을 몰래 전달하는 방법'에 대해 골몰한 이 회의 자체가 촌극이라고 생각했으나 이젠 진짜, 3단계든 4단계든, 그 표현이 '못함'이든 '노력요함'이든, 제일 아랫단계의 평가를 하는 건 조심스러운 세상이 됐다. 성적표에 '양'과 '가'가 가득하니 양갓집 규수냐며 서로 깔깔거리던 시대는 애저녁에 지났고, 내 자식이 양갓집 규수가 된 것은 잘 가르치지 못한 선생의 탓인 시대다. 그러므로 나는 잘하지 못한 학생에게 가장 낮은 단계의 성적을 부여할 때마다 그 애 부모님을 떠올리고 야비하게 그 학부모의 공격력을 가늠한다. 


그러나 물론 그 학부모의 성정이 분노한 치와와 같다고 해서 성적을 거짓으로 줄 순 없으니, 나는 한 학기 내도록 수행평가지를 내지 않은 학생에게 새로 뽑은 수행평가지를 팔락거리며 "너 제출 안 하면 '노력 요함'이야. 제발 제출만 해."라고 당사자보다도 더 안달을 낸다. (요즘은 학생 개개인의 변화와 성장을 다각도로 관찰하고 재평가 기회를 부여할 수 있다.) 






교과평가보단 덜 예민하지만, 창의적 체험활동도 아주 골 때리는 항목이다. 창의적 체험활동의 누가기록은 아이의 특성을 고려해서 모두 다르게 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교를 다녀 본 사람이라면 모두 알겠지만, 스무 명을 모아놓고 하는 수업에서 남는 건 언제나 '안전교육을 다 같이 열심히 들었다.'는 건조한 팩트뿐이다. 이걸 어떻게, 아니 애초에 어째서 스무 가지 버전으로 써야 하는 건지 난 잘 모르겠으나 나는 충실한 공무원이므로 잠깐 입을 삐쭉 내민 후 곧장,

1. 안전교육에 참여하여 심폐소생술, 교통안전 등에 대하여 익히고 안전한 생활을 위한 의지를 다짐. 

2. 소방안전, 심폐소생술, 교통안전의 중요성을 알고 안전교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함.

3. 심폐소생술의 방법을 익히고 교통안전과 소방안전을 지키는 생활을 하고자 다짐함.

등 한 가지 팩트를 열댓 가지 버전으로 신명 나게 써제낀다. 평생을 까라면 까는 소시민으로 살아감에도 정말 이걸, 굳이 왜 이래야 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은 무한동력 두더지처럼 계속해서 고개를 드는데 그럴 땐 공무원 망치로 죽지 않을 정도로 후려치면 된다. 




그러나 생기부 작업의 화룡점정은 뭐니 뭐니 해도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이다. 한 학기나 일 년을 지내고 나면, 그 애의 특징을 세네 줄 정도 적는 일쯤은 수나로운 일이나, 교사는 단점을 단점이라 말할 수 없는 21세기 홍길동이므로 나는 마뜩잖아도 아이의 단점을 장점화하여 적는다. 좋아하는 활동'만' 하는 아이에겐 좋아하는 활동'에는'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한다고 적고, 자기주장을 좀체 굽히지 않으며 친구들과 선생님께 막서는 아이에겐 자신만의 신념이 확고하다며 묘하게 기인 듯 아닌 듯 적는다. 백퍼센트의 진실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결코 거짓이라고 할 수도 없는 그런 표현들로 비열하게 피해가는 거다.


그럼에도 좋은 소리로 치환하는 과정 자체가 직업인으로서의 내 양심을 쿡쿡 쑤실 때에는, 단점을 은근슬쩍 적되 그 뒤에 곧바로 그 애의 행동을 정반대로 적고 '~한다면 더 큰 발전이 기대됨.'으로 무마한다. '수업 시간에 좀 더 집중한다면 앞으로 더 큰 발전이 기대됨.'은 지금은 수업시간에 집중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좋은 말인 듯하다가 뒤통수를 후려치는 문장으로, 모스부호보다도 더 긴밀하고 비밀스러운 메시지 전달인데 이걸 학부모가 알아들어도 문제, 못 알아들어도 문제다. 


폭력적인 아이에게 폭력적이라는 표현을 하지 않고 책임감이 없는 아이에게 무책임하단 표현을 하지 않는 건 어찌 보면 비겁한 일이다. 그러나 정말로 솔직하게 아이의 장단점을 기술했다가 결재단계에서 '빠꾸'를 먹어 보면, 어차피 진실엔 아무도 관심이 없을 테니 일을 두 번 하지 말자는 게 지상최대의 목표가 된다. 


한 땐 그게 진짜 그 애의 모습인데, 단점을 얘기했다고 그걸 수정하라는 관리자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에 진짜로 그 애의 행동특성을 적어버렸다가 학부모가 그 통지표를 학교에 들고 와서는 담임 얼굴에 집어던졌다는 얘기를 들은 후로는, 내 솔직한 통지표를 반려해 버리는 관리자의 행동을 그냥 인생 편하게 살라는 배려 정도라고 생각하기로 했고 나는 이제 양심의 가책도 없이 아이들의 단점을 뇌 한 구석에 꾹꾹 파묻어 둔다. 물론 그걸 지금 꺼내지 않으면 속에서 쿰쿰하게 썩어갈지도 모를 일이나 행동특성란에 행동특성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모욕까지 당해야 한다면 나는 기꺼이 하고 싶은 말을 싹 지우고 그 아이를 위한 찬가를 부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렇게 기도문인지 통지표인지 모를 것을 양면으로 예쁘게 뽑아내고, 내 이름 석자 옆에 정자로 서명을 할 때면 때로 사인회를 여는 소설가가 된 기분이다.


'김짱구 고객님, 맞춤형 소설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하하' 


이 훌륭한 소설을 용비어천가 초판 인쇄본 옆에 수줍게 전시하면 대충 조선 몇 대 왕의 훌륭하신 인덕을 서술해 놓은 거라고 대중을 속일 수도 있을 거다. 그런데 요즘처럼 아동학대 소송이 유행인 시대에, 학부모가 이 용비어천가를 아이 인성을 증빙하는 근거자료로 활용한다는 얘기가 들려오니, 이제 학부모가 통지표를 담임 얼굴에 집어던지든 찢든 진실을 써야 할 때가 아닌지, 스스로에게, 세상에 묻고 싶다. 


20년 전 담임선생님께서는 내게 글 쓰는 직업을 가지라고 하셨었고 

그 말씀은 어느 초등학교 교실에서 매 학기 실현되고 있다. 


내 꿈은 그게 아니었으나 비겁한 소설가로 잘도 컸다.





(*글에 쓴 통지표 문구는 모두 가상의 문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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