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임 교사 시절,
퇴근을 할 때마다 색지를 비롯한 학용품들을 잔뜩 들고 교문을 나섰다.
수업자료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런 건 아무래도 교사 품이 많이 든다.
근무시간엔 수업을 하고 행정업무를 하느라 바빴으니,
수업준비는 퇴근 후의 내가 도맡아 했다.
누구도 그런 걸 시키진 않았다.
그래도 나는 한참을 바빴다.
예쁘게 꾸며진 게시판을 보고, 아이들이 재밌어하는 모습을 보는 게 보람이었다.
2년 차는 그런 시기다.
누가 뭘 시키지 않아도 무언가를 해보고 싶고,
어려운 아이들에게 내가 무슨 의미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시기.
그러다가 한 두 군데에서 좌절을 겪고 조금씩 깎여나가는 시기.
2년 차 선생님이 죽었다.
10년을 가까이 닳고 닳은 내가 아니라, 2년 차 선생님이었다.
나는 3년 차에 다시 수능 기출문제를 풀었는데, 2년 차 선생님은 죽음을 해결책으로 골랐다.
교사에게 2년 차가 어떤 시기인지, 나는 안다.
그래서
심장이 쥐어짜이는 기분이 무엇인지도 새로 알게 됐다.
교사들은 서이초로 화환을 보냈고, 줄을 서서 침묵으로 헌화했다.
그동안 언론에서는 트라우마를 걱정했다.
아이들을 걱정하여 화환을 보내지 말라는 학부모의 글이 세상에 퍼졌다.
진정한 선생이라면 학교밖에서 죽어야 했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어떤 학부모는 교사의 프로필 사진에서 근조 리본을 내리라고 요구했다.
언론에선 서초, 강남 지역의 학부모가 유별나다고 했지만
무엇이 무례인지조차 모르는 학부모들은 모든 곳에 공기처럼 존재해 왔다.
다른 국가적 재난에는 곧바로 애도를 표하고,
심지어 교사에게 검은 리본을 패용할 것 종용하던 어느 기관에서는
점잖게 침묵했다.
교사를 상대하는 사설 기업들의 메인 사이트에는 근조리본이 걸렸다.
국가적 재난마다 새까매지곤 하던 교사용 업무포탈의 메인화면은
지금까지도 소름 끼치도록 알록달록하다.
'생성형 인공지능 기술의 교육적 활용과 윤리적 쟁점을 논의하다.'
사건 이후 교육부 블로그에 가장 먼저 올라온 포스팅의 제목이다.
서울시 관내 교사가 학교에서 자살을 했는데
서울시 교육감은 기사가 나고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서야 현장에 나타났다.
‘아주 극히 일부‘ 학부모의 문제라고 했다.
관련 교육지원청에서는, '그 교사가 개인적 사정으로 자살을 했다'라고 멋대로 결론을 냈다.
"누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학교에서 죽나요?"라는 질문에,
"그럼 한강 가서 자살하는 사람이 한강에 원한이 있어서 죽나요?"라고 답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믿고 싶지 않으므로 뜬소문이길 빈다.
세상은 시끌시끌한데
이 지옥을 만들어 낸 교육부와 교육청의 태도는 이렇다.
교사의 자살은 처음이 아니다.
그동안 모두가 입을 다물어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못 살겠다는 비명은 최근 들어 더더욱, 교사 커뮤니티를 채워왔다.
숨을 쉬기 힘듭니다, 그냥 죽고 싶습니다.
선생님들은 부지런히 지역별 정신과 연락처를 공유했다.
우리들의 연대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최근 일주일 사이에
학생에게 얻어맞아 전치 3주의 부상을 입은 교사의 소식이 알려졌고
교감선생님에게 욕설을 퍼붓고도,
분에 넘치게 금쪽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은 '문제학생'의 이야기가 전파를 탔다.
그리고, 2년 차 선생님이 죽었다.
참을 에너지를 소진한 교사들이 부지런히 언론의 문을 두드렸고
이제야 겨우 한 선생님의 죽음이 알려졌다.
그동안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학교는 침묵했다.
업무회의에서 관리자들은, 자살 사례를 들먹이며 민원 처리를 잘하라는 연수를 해댔다.
민원 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학부모에게 찍히기라도 하는 순간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나은 인생을 살게 될 거라는 경고 같았다.
서이초는 입장문을 냈다.
'학교에는 잘못이 없다'라고 간단하게 요약되었다.
추모를 위해 교문 밖의 땡볕에서 세 시간을 버티고 서 계시던 선생님들은
서이초가 마련한 추모공간에 헌화를 했다.
책상 세 개였다.
그걸 마련하는 데 세 시간이 걸렸다.
아이들은 학교 밖에서 죽어도 교실에서 추모받는데
교사는 학교에서 죽어도 운동장 안으로도 못 들어간다는 글을 읽었다.
괜찮냐는 지인들의 안부연락이 쏟아졌다.
괜찮지 않아서
'괜찮아지겠지'
라고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너만 괜찮으면 돼'
지인이 말했다.
'다른 선생님들이 안 괜찮으면 나도 괜찮을 수가 없어. 나도 교사잖아.'
썼다가 지웠다.
고맙다고 답했다.
침대에 누웠다.
퇴근시간 후에 수업자료를 만들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너무 아파 목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던 날에도 출근을 하여
TV화면을 켜고 타자를 치며 아이들을 가르쳤던 순간들이 스쳤다.
9년의 근무 기간 동안
코로나에 걸렸던 5일을 제외하고, 단 한 시간도, 내가 맡은 수업을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운이 좋아 교직생활 내내 아프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아파도 버티고 일했을 뿐이었다.
멍청하게도
그게 아이를 대하는 선생의 도리라고 생각하며
개처럼 일했다.
그리고 내 상급기관에서는
내가 죽으면 개 취급도 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기어이 눈으로 확인한 날
처지가 비참해서 나는 조금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