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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이 Aug 30. 2023

빌런은 교육부입니다.

(스포 ㅈㅅ)

내 삶은 그 자체로 멍청이 일대기다.

오늘은 찬란한 멍청이 일화 중 한 가지를 공개하겠다.


나는 교무실에 들어갈 때면 예의 바르게 똑똑, 노크를 했다.

문제는 볼 일을 다 보고 복도로 나갈 때에도 똑똑, 노크를 했다는 거다.

애석하게도 복도에서는 아무도 내 노크에 응답해주지 않았다.

나는 1.5초쯤 기다리다가, '아!' 하는 외마디 소리를 남겨놓곤 헐레벌떡 문 밖으로 나갔다.


혼자 격렬한 바보쑈를 펼친 후에 ‘멍청이 티 좀 그만 내라 이 멍청아.’하고 자책하는 게 내 신규 시절 루틴이었다. 그때의 나는 가슴팍에 ‘☆죄송합니다☆’와 ‘★감사합니다★’의 요란한 LED 자막이 번갈아 나오는 뚝딱이 로봇과 다를 게 없었다. 어쩌다 오른발과 오른손을 나란히 내밀며 걷거나 안에서 밖으로 나갈 때 노크를 하는 건 사소한 코딩오류였다.


교무실 공포증을 극복한 건 연두 덕이다. 그때만 하더라도 나는 내가 열심히 가르치면 아이를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1년쯤 지나고서는 ‘아이를 바꿀 수 있다’는 환상이 깨졌고, 좀 더 지나고서는 ‘열심히 가르치면’이라는 가정 자체가 실현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지만 말이다.


자세히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기억이므로 짓뭉개어 서술하자면 연두는 눈빛 하나, 단어 하나로도 내 복장을 뒤집어놓곤 했다. 학교에는 그 애의 보호자가 집에서 온갖 물건을 집어던지곤 했다는 괴소문이 퍼져나갔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런 집에서 살아남은 애에게 나 따위는 부레옥잠보다도 우스워 보였을 거다.


나는 물건은커녕 말 한마디도 집어던질 수 없는 처지였으므로 그 애를 감당할 방법이 없었다. 국가는 나에게 교육을 명하였으나 교육할 방법은 도려내었으므로, 적법한 교육절차는 내가 강구해야 했다. 연두 부모님은 내 연락에 어떤 응답도 하지 않았다. 악당영화의 빌런만큼 뻔한 클리셰였다. 그러니 여전히 가르칠 의지가 충만했던 나는 일주일에 두세 번을 교무실로 뛰어갔다. 저 애 때문에 수업을 할 수 없으니 이 사태를 해결할 적법한 방법을 만들어달라는 거였다. 교무실을 나갈 때에도 예의 바르게 노크를 하던 과거는 모조리 잊고, 나는 말로 교감선생님 멱살을 잡는 기술을 터득했다. 2급 정교사에서 1급 정교사로의 진화보다도 극적인 순간이었다.


“연두 때문에 수업을 할 수가 없어요. 문제학생을 제재할 학칙이 없으면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수업을 못하겠다니까요? 부모님도 연락 안 받으신다구요. 그 부모님 방임으로 신고해야 해요. 방임도 학대잖아요.”


나는 취사가 완료된 쿠쿠처럼 침을 튀겼고, 그때마다 교감선생님은 분노 따위는 느껴본 적 없는 사람처럼 인자한 표정으로 날 달랬다.


"아유, 알았어, 알았어. 한 번만 더 그러면 교무실로 보내. 내가 얘기해 볼게."

아무리 달래도 내가 교실로 돌아가지 않자, 교감선생님은 결국 협조를 약속했다.


나는 비로소, 연두가 친구를 괴롭힐 때 “안 돼, 연두야. 하지 마.”, “친구 때리면 안 되는 거야!”하고 정색하는 게 전부이던 시절을 벗어났다. 이제 유사시에 "너 계속 친구 괴롭힐 거면 교무실 가. 교감 선생님이랑 얘기해."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거다.


그 애는 교감선생님의 권위가 무섭긴 했던지, 내가 그 말을 할 때마다 뭔가에 질려버린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몸을 뒤로 뺐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어떻게든 혼자 해결해보려 했다. 그건 말 그대로 최후의 보루였다. 모든 선생님들은 교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스스로 처리해 내는 슈퍼히어로들이었다. 그들이 껴안고 있는 게 시한폭탄일지라도 말이다. 그때만 해도 교사라면 그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교사는 사명감이 있어야 한다고, 그러니까 폭탄을 안고 있다가 혼자 터져나가는 것도 감수해야 한다고 세상은 말했다. 나 역시 그런 교사가 되고 싶었다. 아무 제재수단 없이, 오로지 사랑이 담긴 말로, 스물이 넘는 아이들을 완벽하게 통솔하고 심지어 발전시키는 기적을 이뤄보고 싶었던 거다.


쓸데없는 사명감과 불가능한 목표는 정신을 좀먹어갔다. 난 내 속이 다 썩어 없어지도록 그냥 내버려 뒀다. 심신의 가역성은 형편없다는 걸 그땐 몰랐다. 모든 것이 사실, 무능력한 내 책임 같았다.


내가 교감선생님을 협박용으로 언급할 뿐, 결국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연두는 다시 입꼬리를 삐쭉 올리기 시작했다. 사실 내 무기가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아차린 눈빛. 번뜩일 때마다, '니가 뭘 어쩔 거냐'라고 묻고 있던 그 눈빛. 모든 방법이 무용해지자 결국 난 쉬는 시간에 그 애를 교무실로 데려갔다.


 “교감 선생님, 안녕하세요.”


교감 선생님은 옆을 슥 돌아보더니, 내가 연두와 함께 서 있는 걸 확인하자마자 알겠다는 듯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세이 선생님은 교실로 가 계세요."


 “네, 감사합니다.”


그 애를 교무실로 밀어 넣고, 난 복도를 냅다 뛰어 교실로 돌아갔다. 수업을 했다. 연두에겐 미안하지만 밀려 있던 진도를 미친 듯이 뺐다. 간단한 모둠활동을 하는데 아무 분란이 없었다. 감격스러웠다.


오래 지나지 않아, 연두는 알 듯 말 듯한 표정으로 교실로 들어오더니 자리에 앉았다. 나는 별말 없이 수업을 계속했다. 그날 오후, 그 애를 집에 보내고 나서 나는 교감선생님께 찾아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아~ 내가 담임 선생님 말씀 잘 들으라고 했지. 고 놈, 사탕 주니까 좋~다고 먹고 가던데? 선생님 말 잘 듣기로 나랑 약속했어.”


교감선생님은 엄한 엄마가 혼을 내고 다정한 아빠가 사탕을 주며 달래는 육아법을 학교에서 시도하신 거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와 교감 선생님은 부부가 아니었고 그 애는 내 새끼가 아니었으며, 교육의 목적은 그 애를 기분 좋게 만드는 게 아니었다.


학교는 공적인 공간이었고 그 아이는 규칙을 어기고 다른 친구들을 방해했다. 사랑이 담긴 훈육으로 그 아이의 행동이 교정된다면야 뭐가 문제겠냐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는 몇 달이나 경험했고, 그때마다 고스란히 보고했다. 그런데 사탕이라니. 진짜 큰일은, 지금까진 그 애의 머릿속에 '교감-교사'로 이어지던 서열이 존재했는데 이제는 교사보다 대단한 교감이 제 편이 됐단 데 있었다.


이후의 일은 뻔했다. 그 애는 교감선생님을 제 등에 업고서 학교의 특권층이 된 거다.


어느 날 교감선생님은,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연두가 말썽 부렸어?"라고 물으셨다. "네? 어떻게 아셨어요?" 했더니 연두가 본인을 찾아왔단다.


찾아와서 내 흉을 한바탕 보고, 담임 선생님 때문에 못살겠다고 투정을 하고, 사탕을 얻어먹고 갔다는 거였다.


그러니 "너, 교무실로 가자. 교감선생님한테 다 일러버릴 거야." 하는 건 이제 내가 아닌 연두의 무기가 됐다. 연두는 나와 갈등이 있을 때마다, “교감선생님이랑 얘기할래요.”라며 내 앞에서 입을 꾹 닫았다. 그럼 교감선생님은 좋은게 좋은거라며, 봐주라고 했다. 당연히 그 애는 기분나쁜 모든 교육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 해는 내 교직 인생 중 최악의 한 해였다.


그분은 그 일이 자기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거나, 아이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사탕을 내밀었을 거다. 그땐 몹시 분노했으나 이제는 교감선생님을 책망할 생각이 없다. 괴상한 시스템 하에서 살아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소시민의 별 수 없는 한계다.




학교는 특이한 곳이다.


모두에게 아무런 권한도 없다.

그저 아이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되 완벽히 교육하라는, 단 한 줄의 목표만 있다.

그러니 모든 책임은 일개 교사가 진다.

아무도 할 수 없으니 모두가 미루기 때문이다.


어차피 교육할 방법이 없는 상황에, 교감선생님은 아이를 어르고 달랜다는 안전한 선택을 했고

그 뒷감당은 내가 해야 했다.


선생님들이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못하고

교실에서, 집에서 혼자 생을 등지는 건,

그들의 좁은 어깨에 불가능한 책임이 지워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차피 누구도 자신을 구원해주지 않을 거란 걸 깨달았기 때문일 거다.


이것은 대한민국 공교육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다.

일단 밀어 넣으면, 사명감을 강요받는 교사는 어떻게든 그걸 해내왔다.

그러니 자기반성을 해보자면 사실 이 비극은 교사가 자처한 것일지도 모른다.


일부 학부모가 수업을 불법녹음하는 걸 넘어서 실시간 도청을 한다는 말을 들었다. 옹기종기 모여서 교사가 하는 말을 실시간으로 들으며 교사를 욕하는 게 요즘 일부 학부모의 취미생활인가 보다. 나는 시간을 헛되이 쓰기로는 어디 가서 져 본 적이 없으나, 그 소식을 듣고는 겸허히 패배를 인정했다. 그리고 안쓰러웠다. 인생을 의심하는 데 쓰는 마음은 얼마나 괴로울까. 가만히 앉아 수업을 도청할 정도로 교사를 믿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 수업을 도청할 정도로 시간이 많다면, 홈스쿨링이라는 훌륭한 대안이 있다는 걸 꼭 알려주고 싶다.


이처럼 일부 학부모는 제 아이를 남의 손, 특히 교사 손에 맡기는 걸 극도로 불안해하는데 이주호 교육부 장관은 아이를 하루종일 학교에서, 교사가 돌봐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교육'하기 위해 교사가 된 사람들 앞에서, 단순히 부모가 원한다며, 지자체에서 해야 할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학교로 떠미는 거다. 그러나 교사는 보육에 대해 아무런 전문성이 없으며, 교육과 보육은 완전히 다른 영역이다. 교육부 장관이라는 사람이 교육과 보육의 개념조차 구분하지 못하다니 황당하다. 그러나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상황이 이지경임에도 공교육이 아직까지 완전히 망하진 않았다는 건 참으로 고무적이다. 별안간 국뽕이 차오른다.


그런데 심지어 이주호는 그 얘기를 이 시점에 했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낫다며, 목숨을 끊는 교사가 몇 명이라는 기사가 나는 이 시점에.

전국의 교사들이 그 땡볕 무더위에 검은 옷을 입고 모여 울부짖는 그 와중에.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속담을 맹신하는지, 그 사람은 심지어 웃으며 말했다.

"좋은 돌봄을 원하는 학부모 입장에서는 가장 믿을 수 있는 학교에서 해주길 원합니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해주길 원합니다."

그 사람은 감히, 희생 끝에 막내를 잃고 만 초상집에 와서 또다시 교사의 희생을 강요했다.


이주호는 9월 4일에 병가와 연가를 쓰는 교사에게 해임, 파면 조치를 내린다는데,

그 정도 엄벌주의를 고수할 거라면 본인의 눈치 없음과 염치없음도 직을 내려놔야 할 정도의 중죄라는 걸 좀 알면 좋겠다.



학교에선 아이들을 데리고 현장체험학습을 다닌다. 지금의 어른들이 어렸을 때 '소풍'이라고들 하던 거다.


현장체험학습 중에 사고가 나면, 그 책임은 교육부도, 청도, 학교도 아닌, 교사에게 있다.

역시나 또 교사 개인의 책임이다.


교사가 잘못을 했으니 사고가 난 게 아니냐고?

현장체험학습 과정에서 학교와 교사가 체험학습 지침을 '모두 준수'했을 경우에도 사고가 나면 교사의 업무상 과실치사죄가 성립할 수 있다.

부모가 제 아이 하나만 데리고 나가도 발생할 수 있는 게 사고인데, 교사가 수십, 수백 명의 아이를 데리고 체험학습을 나갔다가 사고가 나면, 적법한 절차를 따랐더라도 교사의 잘못이란 거다.


교사에게 모든 도로환경과 우연, 사고가능성, 어린아이들을 완벽히 컨트롤하라는 게 국가의 요구다. 아이들의 견문을 넓혀주기 위한 교육활동이며, 교사가 원한 것도 아니나, 모든 책임은 교사에게 돌아간다.


얼마 전 법제처는 초등 현장체험학습에 노란 버스를 이용해야 한다는 유권해석을 내놓았다.

경찰청에서는 전세버스 이용 중 사건사고가 발생하면 학교 측 책임이 가중된다고 했다.

교사들은 절차와 지침을 준수하고도 법의 심판을 받아왔는데, 알고 보니 버스를 타는 것부터 불법이었던 거다. 당연히 많은 학교에서 현장체험학습을 취소하거나 연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교육부는, "현장체험학습을 정상적으로 추진하라."라고 말했다.


우습다. 


교사의 적법한 교육활동조차 보호해주지 못하던 교육부가.

교사가 학부모 갑질로 죽어나가도 학부모 눈치를 보며 늘봄을 들이밀던 교육부가.

교사가 말도 안 되는 화풀이식 아동학대로 고소당할 때 곧장 직위해제를 시키는 게 전부이던 그들이. 

이젠 불법으로 규정된 일마저 교사더러 하라고 한다.

과연 그들이 지시한 불법행위를 저지르다가 사고가 났을 때, 그들은 교사를 보호할까?


교사들은 해야 할 일을 하게 해 달라고 투쟁하고 있다. 그것조차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육부는 그 요구엔 귀를 닫고, 불법인 일을 종용하고 있다.

이게 이 나라 교육부의 수준이다.




9월 4일에 연가와 병가를 쓰는 교사는 해임과 파면을 각오해야 한다.

북한, 이란처럼 교사의 정치참여권을 빼앗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교사에게서 최소한의 인권마저 빼앗아가겠다는 게 그들의 목표인가 보다. 


평범한 학생들의 학부모마저, 이런 교육환경에서는 보통의 아이들이 피해를 보게 된다며 제도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현직 교사들이 TF를 꾸려 300쪽이 넘는 보고서를 떠먹여 줘도, 교육부는 한 달이 넘도록 어떠한 실효적 대책도 내놓지 못했다.

그런데 '교육하게 해 달라는' 교사의 외침에, 연가와 병가라는 당연한 권리행사에, 파면과 해임이라는 즉각적이고 폭력적인 대책을 내놓았다.  


이러니 나는 어느 집단이 제 식구 감싸기를 했다는 도시 전설을 들으면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오... 제 식구를 감싸준다고?

제 식구 내팽개치기가 아니라?


뭐, 그러나 식구의 범위는 사람마다 다른 거니까 그러려니 한다.

대감님과 노예가 같은 건물에서 일한다고 해서

대감이 노예를 식구로 여기란 법은 없으니까.


그런데 그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그들이 내게 지불하는 월급 몇 푼에 내 인권을 판 적은 없다.


어떤 날에는 절대로 아프지 말아야 할 이유가,

내 쉴 권리를 참아야 할 이유가,

타당한 이유 없이 위치 추적을 당해야 할 이유가 없다.


나는 내 몫의 일을 다 하고 정당하게 월급을 받고 있으며,

내가 해야 할 교육을 못하게 막고 있는 건 교육부다.


교사가 원하는 건 겨우, 맡은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달라는 게 전부다. 

인권까지 탄압당해야 할 만큼 무리한 요구를 한 적이 없다.


9월 4일에 정상적 학사운영을 고집함으로써 학부모를 위하고 공교육을 지키겠다는 그들의 말은 모두 거짓말이다.

그들이 진짜 학부모를 위하고 공교육이 안정화되길 원했다면

그날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재량휴업일을 지정하겠다는 학교 의견을 존중했을 것이고

나아가 애초에 공교육 현장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방치하지도 않았을 거다.


공교육은 무너졌다.

박살 났다.

짓이겨지고 뭉개지고 으깨졌다.


공교육을 바로 세워달라는 게 교사가 멈추는 이유다.

애들이 다칠까 봐 체육수업을 이론 수업으로 대체하는 내 모습이 치사해서

배움이 느린 아이를 보고도 남겨서 지도하는 것조차 못하는 상황이 답답해서

폭력을 행사하고 흉기를 휘둘러도 "그러면 안 돼!"밖에 못하는 처지가 우스워서

학부모 민원을 받을 때마다 학급특색교육활동을 없애나가는 내가 너무 비겁해서

문제학생과 씨름하는 동안 방치당하는 다른 아이들한테 미안해서.


교사는 그래서 투쟁하고 있다.

그리고 그걸 막고 있는 건 교육부다. 


9월 4일에 병가를 쓰지 말라고?

정신병을 비롯한 온갖 질환을 주렁주렁 달고서

그래도 선생은 출근을 해야 한다며, 보결은 다른 선생님께 죄송하다며

꾸역꾸역 출근해 왔던 교사들에게,

그러나 진짜 아프면 9월 4일만큼은 참지 않고 병가를 쓰겠다는 교사들에게,

교육부는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


선량한 학생과 학부모와 교사를 사지로 내몰고 있는 건,

9월 4일에 아픈 교사가 아니라

교육부다.


그리고 이 무저갱에서조차 교사가 바라는 건 겨우,

교육을 하게 해달라는 것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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