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봄과 여름의 일기

by 조이

3월. 매해 세 번째 달의 첫날은 삼일절, 둘째 날은 개학식이다. 아쉬움이 남는 겨울방학을 뒤로하고 구두 위에 발을 얹는다. 또각 – 또각 - 익숙하지 않은 발걸음으로 익숙한 길을 나선다. 세탁소에서 잘 다려놓은 정장 원피스와 함께, 전투복을 입고 전장에 나서는 전사의 마음으로. 몇 년간 간헐적으로 앓아 온 족저근막염으로 밑창 두툼한 운동화만 고집하는 내가 구두를 신는 날은 몇 되지 않는다. 오늘은 새로운 어린이 120여 명과 그들의 부모를 한 자리에서 만난다. 식순에 따라 학교 설립 정신을 낭독하고 일어나서 인사도 해야 할 것이다. 벌써 4년째 이어지고 있지만 익숙해지지 않는다. 결국, 낭독은 떨리는 끝 음으로 마무리 짓고 인사는 붉어진 얼굴을 들키지 않기 위해 허리만 깊게 숙였다가 펴는 것으로 한다. 구두와 운동화 사이의 거리에서 틀 안에 담겨있는 나와 그렇지 않은 나를 본다.


4월. 봄의 한 가운데. 한껏 피워지던 꽃이 사그라들고 사랑이 만개하는 시기. 결혼의 계절이다. 다들 어디서 그렇게 믿을만한 타인을 찾고, 언제 그렇게 든든한 기반을 갖추었는지. 덕분에 주말은 청첩장 모임과 결혼식으로 가득 찼다. 많게는 달에 한 번, 적게는 연에 한 번 만나는 지인들과 한 곳에 모여 안부를 나눈다. 10명으로 시작했던 결혼식 투어는 몇 년 새 4명으로 줄었다. 나머지의 안부는 SNS 속 아기 사진과 함께 확인할 수 있다. 축하해 – 입 밖으로 나와 부서지는 말들. 진심은 담겨있다만 눈앞의 신랑 신부를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물음표가 지워지지 않는다. 한 가정의 버팀목, 한 아이의 엄마 그리고 아빠. 갈수록 무거워지는 어깨에 자연스레 멀어졌다가 먼 훗날 다시 가까워지는, 그것이 의리이고 어른으로서 암묵적 예의이리라.


5월. 어버이날과 스승의 날. 어버이날에는 부모님의 마음에 카네이션 같은 봉투를 달아드리고, 스승의 날에는 왼쪽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주는 어린이의 손가락을 본다. 자랑스러운 딸로 성장하는 여정에 직업적 안정과 성취가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혼자서도 잘 살아냄을 증명해 보이는 자식이 부모에겐 가장 든든하고 멋진 자식이리라. 서른 즈음, 버겁게 넘어대던 허들 앞에 멈춰섰다. 엄마, 어른이 되는 일은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일이래. 어떻게 생각해? 이런 나라도 사랑해줄 수 있겠어? 어른이 되기 위해 어린이가 되었다. 나이가 들수록 가족 앞에서는 점점 어려진다. 어린 날엔 뛰쳐나가고 싶기만 하던 울타리가 지금은 이보다 든든할 수 없다.


6월. 가장 해맑은 표정으로 케이크 앞에 선다. 숨 쉬어온 것만으로도 축하를 받는 날. 아끼는 사람들에게 잔뜩 둘러싸여 박수갈채를 받아도 이상하지 않은 날. 만취해 길에서 넘어져도 용서받을 수 있는 날. 한 그릇에 다섯 점 나오는 광어 지느러미를 혼자 세 점 먹어도 될 것만 같은 날! 기쁨을 나눠 온 얼굴들이 떠오른다. 삶의 희로애락을 함께하는 벗들. 서른이 넘도록 아주 얇은 페르소나 한 장만으로도 버틸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들이다. 나를 나로 있게 해준 사람들. 모나기 싫어 스스로 뾰족한 부분들을 깎아낼 때, 옆에서 기꺼이 특별한 굴곡을 발견해주고 매만져 주었다. 기꺼이 솔직해질 수 있도록 안전지대가 되어준 사람들에게 나도 안락한 쿠션이 되어줄 수 있기를. 덕분에 덜 아프게 자랄 수 있었다고 올해 생일 축하 편지에 몇 자 적어볼까.


투명한 유리구슬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쉽게 깨지진 않을 거야 – 3월과 4월에 여전히 어색하기만 한 역할극의 일부를 끝내고 5월과 6월을 앞두고 있다. 그새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 더 늘었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의심의 여지 없는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 실수했나 걱정하며 불안했던 시간이 무색하게 각자의 자리에서 언제나 그렇듯 손을 씩씩하게 흔들어 주는 사람들 덕에 재능 없는 지루한 역할극을 잠시 멈춘다. 숨을 내쉰다. 역할극의 인터미션은 매일 곳곳에 있다. 한 시기에 한 작품만 집중하며 우아하게 극을 올릴 수 있었던 시기를 지나, 카메오는 물론이고 연속 출연과 동시 출연으로 뒤엉킬 미래가 기다린다. 크고 작은 울타리 안에서 나를 잃지 않고 무사히 극을 올려낼 수 있겠지? 이대로라면. 앞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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