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어먹을 완벽주의

by 조이

페미니스트면 남자를 싫어해야 하는 거 아니야? 연애하는 건 위선이지. 누가 정해놓은 건지도 모를 편견에 충실하던 때가 있었다. 페미니즘에 ‘남자를 싫어해라’라는 강령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양성평등주의를 지향하는 이론에서 배척할 대상은 불평등주의자일 뿐, 남자라는 생물학적 개념이 아닐 텐데. 원칙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완벽하게 믿음에 부합하지 않으면 반역자가 된 것 같았다. 믿음이 부족하면 지옥에 간다는 어느 종교의 교리처럼.


10년 넘게 좋아해 온 연예인이 있었다. 야무지고 똑부러져 닮고 싶은 그녀는 내 일상을 밝혀주었다. 열심히 사는 사람은 늘 영감을 주기에 그녀의 행보를 응원하며 생활의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어 좋았다. 페미니즘이 유행처럼 흐르던 어느 날, 그녀의 주요 콘셉트가 여성 인권을 하락시키고 약자에 대한 혐오를 강화한다며 이슈가 되었다. 그날부터 그녀를 좋아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여전히 동경했으나 그 마음을 외면하고 그녀를 싫어하기 위해 노력했다. 마음이 흐르는 방향에 둑을 세웠다. 신념이 욕구에 우선했다. 완벽히 그래야만 했다. 예외는 피곤하니까.


학창 시절에는 틀에 잘 담겨있는 모범생이었다.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 검은색 수성 사인펜으로 한 번 쓱 그으면 칠해질 만큼 자그마한 OMR 답안지의 타원형 칸에 정답을 마킹할 때면, 꼼꼼히 테두리를 그리고 난 후에 그 안을 메꾸어야만 안심이 되는 강박적 완벽주의를 가진 학생이었다. 연필을 잡고 글씨를 쓸 땐 손가락에 힘이 잔뜩 들어가 HB처럼 흐린 연필심이 아니면 쓸 수 없었다. 꼼꼼함에 들이는 시간을 벌기 위해 정답을 도출해 내는 과정을 축약해야 했다. 더 열심히 연습했다. 하나의 문제를 풀기 위해 거치는 모든 과정을 완벽히 통과해야 안심이 됐으니까. 모든 요소에서 완벽할 수 있는 생은 없음에도, 닥쳐오는 허들을 유연한 폼으로 넘기 위해 스스로를 다그쳐야만 직성이 풀리는 어른으로 성장했다. 아주 나중에야 깨달았다. 우아한 포즈를 유지하는 일엔 굉장한 운이 따라야 하고 노력만으로 되는 일은 많지 않다는 것을.


충성스럽고 융통성 없는 어른으로 자라나, 나이에 맞게 생애 과업을 허겁지겁 달성하며 살아왔다. 남들이 말하는 적절한 나이에 대학을 가고 취업을 했다. 시기는 딱 맞춰야 했고 결과물은 만족할만해야 했다. 정상성에서 벗어나는 것은 사회적 매장과 다름없는 형벌이었다. 평범의 기준은 타인의 욕망이 뒤섞인 허상일 뿐임에도, 나의 욕망과 세상의 욕망은 찰싹 붙어 있었다. 20대 후반에 접어들며 맞닥뜨린 생애 과업은 결혼이었다. 여기부터 내적 갈등이 시작되었다. 가부장제에 투쟁하기 위해서는 4B(비연애, 비혼, 비출산, 비섹스)를 실천해야 하는데, 생애 과업의 굴레는 결혼을 빨리 해야 한다고 보챘다. 페미니스트로서의 자아와 유교걸로서의 자아가 충돌하기 시작했다.


이상적인 합의점은 유니콘 남성을 만나는 일이었다. 전설 속에나 등장할 법한 완벽한 인간을 쟁취하기 위해 구직 활동을 하듯 구애 활동을 시작했다. 뭐든 최선의 성실함으로 임하는 기질 탓에 전투적으로 연애 시장에 뛰어들었다. 손에 쥔 촘촘한 거름망을 통과하는 사람이 몇 있긴 했다. 구직자를 거르는 여러 수식이 적용된 기업의 엑셀 파일처럼 똑같은 듯 다르게 반복되는 여러 테스트를 거친 끝에 남는 사람이 꼭 있었다. 문제는 이렇게 까다로운 선택의 과정을 거치고 나면 관계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든 ‘내가 선택한 사람’에 집착을 하게 된다는 거다. 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덧붙인 ‘그가 아니면 안 되는 이유‘가 두루마리 휴지처럼 길게 늘어져 두 눈을 가렸다. 상대가 내 마음을 다치게 할 때면 모든 관계에서 상처는 필연적이라고 생각하며 넘어갔고, 상대의 단점이 깊게 박히는 날이면 장점이 가득 담긴 연고로 서둘러 응급처치를 했다. 그렇게 넘어가면 내가 선택한 완벽한 관계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으니까. 완벽이라는 오만이 나를 더 깊은 골짜기로 밀어 넣었다.


연애는 오답 노트를 푼다고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는 분야가 아니었다. 노력을 했는데도 마음대로 일이 풀리지 않자 나를 자책하는 것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주변 사람들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부러운 감정을 동력으로 삼지 못하고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적은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어제는 페미니즘을 옹호하는 글을 올려놓고, 오늘은 남자친구와 알콩달콩하는 사진을 올리는 저 친구는 위선적이네. 페미니즘이 액세서리인가? 지적인 여성처럼 굴고 싶으나, 행복한 연애를 하는 본인의 모습도 전시하고 싶은 건가. 저런 사람들 때문에 여성 인권이 후퇴하는 건데. 나만의 유니콘을 찾지 못해 생겨난 속상함이 열등감으로 바뀌어 나의 속내는 점점 비좁아져 갔다.


내내 소란스러웠던 내적 갈등에 브레이크를 걸게 된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내가 지금 행복한가?’ 내면의 욕구를 수면 위로 올려본다. 사람은 본인의 행복을 위해 살아간다. 부모님을 만족시키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스스로 만든 기준을 충족시키려고 사는 게 아니다. 그저 나의 행복을 위해 산다. 행복하려면 무엇보다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어제의 멋진 모습도 오늘의 우스운 모습도 전부 나니까. 메리 올리버가 검은 그루터기에서 발견한 검은 뱀조차 ‘봄’의 일부로 받아들인 것처럼 내 안의 모난 부분과 오만함도 결국 ’나‘의 일부인 것을 받아들여야 비로소 번뇌에서 해방될 수 있다. 필연적인 더러움과 두려움마저 끌어안고 나의 행복을 위해 살고 싶다. 이미 만들어진 기준에 구겨 넣지 않고 흐르는 강물처럼 유유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