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드명, 복주머니란 을 찾아라
따스한 기운이 완연합니다. 봄이 점점 완숙미를 자랑하던 을사년 05월 18일. 봄은 뭐가 그리도 급한건지 오자마자 또 어딘가를 향해 떠날 준비에 여념이 없습니다. 봄의 성급함은 플랫폼의 마음까지 더욱 긴장하게 만들고 그 조급함을 애써 숨긴채, 오늘도 어디론가를 향해 떠남을 준비하는 중이랍니다. 오라는데는 없어도 갈데만큼은 무궁무진한 플랫폼. 떠남중독증 환자들의 공통적인 현상이긴 하지만요.
한동안 잠잠하나 싶었는데 떠남중독증이 다시금 도졌습니다. 그 떠남의 이유를 대자면 아마 수십가지도 족히 넘을 듯. 어떤날은 바람난 봄 나비를 만나겠다며 이곳저곳 서너 시간를 달려보기도 하고. 또 어떤날은 봄 꽃마중을 하겠다며 장장 여섯 시간을 달려 멀리 먼 남쪽나라를 오가기도 했답니다. 회색도시 울렁증을 치료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애써 둘러대기도 했었죠. 오늘은 잔머리 좀 굴려 양다리를 걸쳐보기로 했습니다. 일명 꿩먹고 알먹기 전법이랄까요.
2주전엔 정말 환상적이었습니다. 마치 백년된 천종 산삼이라도 하나 발견한 냥, 마음속으로 심봤다,를 연신 외쳤드랬습니다. 무작정 블로그 이웃님 위치정보만을 가지고 백둔봉을 향해 무조건 오름짓을 하였었죠. 해발고도 780미터. 다행히 그 선녀님들이 고맙게도 날 기다려 주었습니다. 난생 처음 만나보는 오리지날 자연산 광릉요강꽃.
자, 그럼 백둔봉에서의 흥분은 잠시 접어둔 채로 오늘은 복주머니란 찾아 삼만리를 시작해 볼까합니다. 떠남중독증 환자를 태운 애마가 스르륵 아지트를 빠져나갑니다. 오늘도 과연 왕년의 그 영광의 순간들이 재현될 수 있기를 바래보면서요. 서론이 너무 길었습니다. 설렘을 가득 안고 이른 아침 도착한 곳은 조무락골. 화악산과 석룡산에서 발원한 천연수들이 졸졸졸 소리내어 흐르는 아늑한 곳입니다.
이곳 깊은 골에도 생명들의 움직임이 모락모락 피어납니다. 점점 산속깊이 침투하는 봄의 기운을 위로삼아 오늘의 최종 목적지 석룡산을 향해서 한발두발 오르는 중. 오름짓하는 동안에도 두눈과 두 귀는 늘 어딘가로 향합니다. 자연속에 들어올 땐 오직 집중만이 살길이라 생각하면서. 오감, 육감을 총동원하는 마음 걷기입니다. 나비가 갑자기 나 잡아보라며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니까요. 이곳저곳에서 봄의 소리들이 요란하게 들려오는 계곡.
모시나비와의 만남은
아주 우연이었습니다
모시나비 한마리 막 세상구경 나온 듯 나무잎새 위에서 조용히 몸을 말리는 중입니다. 몇 컷 찍어주고 금새 헤어집니다. 옆모습을 한번 찍어보려고 잠시 기다려 보았지만 망부석마냥 옴싹달싹도 하지 않아 그냥 패쓰하기로. 이윽고 찰랑찰랑 흐르는 조그만 계곡을 건너주었더니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입니다. 오른쪽은 화악산 중봉, 왼쪽으로 향하면 오늘 내가 찜해둔 석룡산 정상이죠 .
왠지 느낌이 좋습니다. 마음이 두근두근 떨려옵니다. 20여분을 더 걸어 올라왔습니다. 어느새 물소리가 완전 머지는가 싶더니 간간히 새소리만 귓가를 맴돕니다. 이제부터는 정말 집중해야 합니다. 복주머나란을 찾아 삼만리가 드디어 시작되었습니다.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까지도 완전 꺼버렸습니다. 자연의 소리가 노래이자 놀이입니다. 이곳은 통신 불가 지역이기도 하구요. 이따금씩 짝을 찾아 헤매이는 듯한 고라니 울음소리가 산중에 울려 퍼집니다. 내가 찾아 헤매던 님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두리번, 두리번거려 보지만, 그 어디에도 모습 보이지 않습니다.
3대 독초 중 하나로 잘 알려진 박새만이 무성합니다. 처음엔 이파리가 연하게 보여 이것이 복주머니란 인줄 착각까지 했더랬습니다. 헛것이 자꾸 보인다는 건 마음에서 미세하게 흔들림같은 동요가 인다는 것. 이제 머리 좀 식혀줘야 겠습니다. 아담한 개울가에 앉아서 아름답게 피어있느 큰앵초 몇 송이와와의 대화를 이어갑니다. 이어 갈구리나비와 나와의 줄다리도 한참을 이어졌었죠. 순전히 꿩대신 닭의 심정으로.
막 날개를 단듯한 애호랑나비는
날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기에 충분했었죠
이후 얼마를 더 해메였던 걸까요. 산속을 헤매인다는 건 결국, 나를 잃치 않으려는 강한 몸부림이자 집나간 자아를 세상에 다시금 내세우고자하는 간절함입니다. 어느새 뱃속이 꼬르륵거립니다. 가져간 간식 몇 개를 막 먹으려는 찰나 마침 나비 한마리가 내 앞을 스르륵 지나갑니다. 나풀거리며 날아가는 모습에 내 영혼을 이미 빼앗겨 버렸습니다.
드디어 잎새위에 아슬아슬 앉았습니다. 조금만 있어줘. 제발. 애호랑나비. 찍으려고 찰나 그만 개울가로 발이 미끄러져 버렸습니다. 그 사이 애호랑나비도 멀리 도망가버리고, 신발속에 수분들은 가득차 요동을 쳐 댑니다. 몇 분을 미치듯 그렇게 정신없이 뛰어 다녔습니다. 결국엔 7전 8기끝에 겨우 찾아냈었죠. 오늘의 메인 복주머니란이 아닌 미명의 꾸물이 한마리.
애호랑나비도 아닌. 노린재나무 위에서 낮잠자고 있던 애벌레와 내눈이 마주쳤던 순간, 나도 놀라고 애벌레도 놀라고. 바로 이거였습니다. 그렇다면 누굴까. 그게 문제로 보였습니다. 전두엽은 기능이 이미 정지되어 버린 상태. 살다보니 별일이 다있습니다. 어떡하지. 순간 한가지 혜안이 떠올랐습니다. 보쌈하여 모셔오는 걸로. 노린재나무 이파리 한주먹 챙겨오는 것도 잊지 않았구요.
복주머니란 대신에
의기소침한 날 일으켜준
은줄표범나비 애벌레
이제 복주머니란과는 잠시 휴전하기로 했습니다. 이 꾸물이와 난 과연 잘 지낼 수 있는 것일까요. 다시금 조금전 보았던 애호랑나비를 찾으러 또 떠납니다. 오늘은 인증샷 기어코 찍고 말리라. 찾아 헤매이는자에게 복이 온다더니 정말로 나뭇잎 위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그녀와 또 극적으로 마주했습니다. 이번에도 또. 몇 번의 실랑이끝에 결국 성공.
오늘 운수좋은 날이 되려는 순간입니다. 날개편 모습을 찍어줬더니 이제 날개접은 옆모습이 또 궁금해집니다. 애걸복걸 해보았지만 끝내 옆모습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건 나비 세계도 마찬가지로군요. 다시금 훌훌털고 일어났습니다.
그럼, 지금부터는 오늘의 메인 이벤트, 표범나비 애벌레와의 한방살이 이야기를 시작해 보렵니다. 나비는 스스로 집을 짓지 않는다 하니 당연히 아담한 보금자라도 하나 마련해줘야 겠지요. 이리저리 꽃을 찾아 다니긴 하지만 벌과 달리 꿀을 모으지도 않는 답니다.
할일없는 난, 다이소가서 아담한 숙소를 구매해주고 챙겨온 아직 싱싱한 노린재 나무 이파리를 한주먹 넣어 주었습니다. 어인일인지 입도 끔뻑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반항을 하는건지 어떤건지 반찬투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혹시 나한테 불만있는 거니?
은줄표범나비 드디어 날개짓하다
한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그렇다면, 혹시 벌써 용화중인건 아닐까. 사이버 세상에 열씸히 검색도하고 카페에 물어도 보았더니 표범나비 종류 애벌레는 대부분 제비꽃 종류를 먹는답니다. 그럼 그렇치. 다시 시작입니다. 기어코 얼굴을 보고 말겠다는 이 열정을 누가 꺾을 수 있을까요.
주인이 무지해서 미안하다. 난 그것도 모르고. 내가 사는 동네주변을 샅샅이 뒤져봐야겠지요. 제비꽃 찾아 삼만리입니다. 결국 이틀만에 종지나물과 알록제비꽃을 발견하고 승리감에 도취되어 아지트로 향합니다. 반신반의하며 넣어 주었더니 다행스럽게 바로 먹기 시작하더군요. 잘먹고 똥도 잘싸고 설사도 안하고 잘자라 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망부석이 되어 버렸습니다. 나에게 시집온지 10일만이죠. 난, 기도했습니다. 제발, 얼굴좀 보게 해달라고요. 날개짓을 보게 해달라고요. 혹시나 고치벌에게 오염되었으면 어쩌나. 노심초사의 시간이 길어집니다.
그렇게 기다림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죠.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어느날 산책하고 돌아왔더니만 거짓말처럼 날개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내가 망부석이 되어버렸죠. 심장이 머질듯. 순간 제눈을 의심할 뻔 했습니다. 이렇게나 빨리 얼굴보여 주다니. 25년 6월 8일. 그녀의 생일날입니다. 다이어리에 그녀의 생일이라고 메모까지 해놓았답니다.
은줄표범나비. 그녀의 고향은 석룡산 850미터 산중이랍니다. 복주머니란 찾으러 갔다가 만난 그녀. 생일 축하를 외쳐 주었습니다. 마음속으로 깊이깊이 말이죠. 창밖 뽕나무 잎새 위에 올려두었더니 한동안 주저주저하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자신도 사뭇 아쉬웠던 것인지 모델역할 몇 번 더해주더니 멀리멀리 떠나가 버렸습니다. 모델료도 안받고요. 아쉬움입니다.
그녀와 함께했던 20여일의 시간이 꿈만 같았습니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법. 이별은 아픔입니다. 부디 행복하게 잘살아주길, 안 녕.
석룡산 해발고도 850미터는 그녀와 나를 연결해 준 브리지였습니다. 은하수 건너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오작교처럼. 아무 풀잎위에서 조용히 잠을 청하는 흰줄표범나비. 그녀는 어둠속에서 빛나는 별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복주머니란은 이곳에서 보지 못하고 저 멀리 양구땅까지 가서 급기야는 만나고 말았다는.
이어서, 03 제비나비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편이 발행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