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폼의 좌충우돌 백두대간 산행 도전기 08
야심한 밤, 고속도로를 질주하다 말고 갑자기 갓길 수면쉼터에 애마를 세웠다. 그리고, 서쪽하늘을 무심히 바라본다. 행복이 샘솟는 쉼터처럼 마음 편안함이 느껴진다.
저 멀리 서쪽 밤하늘을 수놓으며 졸고있는듯한 초승달이 날 보며 손짓해주는 눈치다. 이윽고 기분이 왠지 으쓱해지는 느낌. 무슨 좋은 일이라도 생기려는 걸까. 그깟 초승달이 뭐라고 내 심장을 이렇듯 콩닥콩닥하게 만드는 건지 모르겠다.
다람쥐 쳇바뀌 돌듯 지루한 일상 속에서 과감히 탈출을 감행한 후, 2주만에 다시 설레임 부여안고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나는 길. 모처럼 다가온 이 시간이 무척 기다려지는 건 새로운 루틴이란게 생겼기 때문이리라.
리무진버스에 몸을 의지한 채 먼길을 떠나기위해 안전밸트를 단단히 조여맸다. 설레임과 기대감이 한껏 부풀어 오른다. 부푼 마음과 노랫가락에 취해 장장 3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복성이재.
중치까지 12.1킬로미터라는 표시기가 헤드렌턴 불빛에 수없이 반짝거린다. 고을과 고을을 잇는 이곳 고개를 뒤덮은 습한 공기가 더 낮게 드리워져 있고 가슴이 점점 두근거린다. 이곳 또한 미지의 길. 여지껏 한번도 가보지 못한 길이다.
꼬부랑재, 매봉, 봉화산, 월경산, 중재, 백운산, 영취산, 그리고 무룡고개. 까마득해 보이는 길이었지만 나에겐 한치의 불평도, 불만도 있을 수 없다. 내가 선택한 길이었으며, 모처럼 내가 주인공이 되어 걸어 보려하기 때문이다.
사방은 쥐죽은듯 고요하고 간간히 이름모를 풀벌레 소리만 귓가에 맴돈다. 산행대장의 애틋한 목소리가 허공을 가르자 모두들 간단히 몸도 풀어주고 마음도 가다듬는다. 이번이 벌써 좋은사람들과 함께하는 세번째 백두대간 산행.
등산화 끈 단단히 조여주고 스틱도 조심조심 폈다. 오늘은 배낭뿐 아니라 설레임까지 함께 어깨에 맸다. 왠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 기분을 부여잡고 또 오름짓이다. 숨이 차온다. 이웃 대간러들의 거친 숨소리가 벌써부터 허공을 가르는 중.
오르면서, 앞전 두번의 산행의 여운이 자꾸 생각난다. 이따금씩 사람사는 마을들을 헤집고 걸어왔던 일들이 내 머리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대간 마루금의 등뼈를 조각조각 억지로 끼워 맞추며 걸었던 일들. 남원땅을 지나는 두번의 산행은 내 머릴 온통 뒤죽박죽 만들어 버리고 말았던 것. 대간이 사람사는 세상이 그리워 속세로 내려왔던 거겠지, 라고 애써 위로하며 끝이없는 오름짓을 계속한다.
새벽바람이 한동안 차갑다 싶더니만 몇 분 오름짓을 계속했더니만,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온다. 바람막이 하나 벗어 배낭에 억지로 쑤셔넣고 물 몇 잔을 연거푸 마셔준다. 미련들 내려놓으려 했지만 철거머리처럼 달라붙으며, 계속 머리속을 흔들어댄다.
도대체, 나에게 마루금이란 무슨 의미인걸까. 난, 왜 하늘길을 고집하는 건지 모르겠다. 남아도는 여가시간을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아서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허구한 날 날 흔들어대는 트라우마로부터 도망쳐버리고 싶었던 걸까.
자아에게 수없이 되묻는 이 의문의 정체. 하늘길이 진정 나에게 전하려는 건 무엇이길래. 백두대간도, 하늘길도, 마루금도 그져그런 산길중의 하나일 건데, 여러 등로들를 연결하는 산길중의 하나일 뿐일텐데,
내가 마루금에, 하늘길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건 아닐까. 생각하면 할수록 혼란만 더 가중된다. 난, 아무것도 아닌 길에서. 아무 의미도 없는 이 길에서 일곱빛깔무지개를 찾아 헤매고 있는 건 아닌지. 정체성과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 서성이고 있는 건 아닌지,
사실, 으즘 마음이 몹씨 힘들고 괴루워했다. 영혼잃은 미아처럼 가끔 일하다가 넋을 잃고 한숨을 내쉬곤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들이 절망이란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았을때 난 그리 대수럽지 않게 생각했다. 코로나때문일거라고 애써 핑계를 댔다. 그들도 사람인지라 일단 숨을곳을 찾은것 뿐일거라고.
아들들이 사회를 멀리하는데도 나름 이유가 다 있었다. 아마도 트라우마로부터 멀리 도망쳐 버리고 싶었을 것이라. 코로나는 그들의 마지막 희망마져 앗아가 버렸다. 학업마져 그만둔채 그들만의 터널속으로 들어가버린것. 삶에 대한 어떤 의지나 꿈같은건 보이지 않았다. 터널속에 틀어박혀 오직 스마트폰에 취해 있기만 하면 되었다.
눈떠서 잠들때까지 그들곁을 지켜내는게 우리부부의 몫이되었다. 잠조차 제대로 잔다는건 사치에 불과했다. 새로운 삶의 의미를 부여해주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되지않음에 마음 미어졌다. 그져 내곁에 있어주는것만으로 위안이 되어주고 안심이 되었다.
우리부부는 늘 불안함을 달고 살았다. 외부활동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었다. 내안에 차오르는 이야기를 배설하고 싶었지만 그것마져 마음대로 되어주지 않았다. 그러던 때, 나에게 구세주가 나타났다.백두대간 마루금.
이런저런 잡념에 쌓여 걷는 중에도 길은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꼬부랑재를 거쳐 몇 발짝 더 올랐더니 매봉이었다. 놀랍게도 도착과 동시에 내마음은 또, 가라앉는다. 마루금에 대한 여러 실망감들이 또다시 나를 엄습한다. 점점 시시하고 지루하고 고리타분한 그런 일들이 꼬리에 꼬물을 물고 계속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여러번, 환상일까. 그냥 허울뿐 인걸까.
지리산과 헤어짐이후 세번째 산행. 내가 그토록 그리던 봉화산은 분명 아니었다. 난, 봉우리가 철쭉으로 피범벅이 될 줄 믿었다.
나에게,
마루금이 주는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내 머릿속이 온통 혼돈이다. 머릿속을 휘젓고 있는 잡념들에 휩싸여 걷고 있다지만, 내가 주도적으로 걷는건지 아니면 억지로 걸어지는 것인지도 불문명해진다. 내가 눈높이가 너무 높았던 걸까, 대간 완주한다는데 더이상 무슨 의미일까,
매봉을 뒤로 한 채, 봉화산으로 향한다. 그져 마음 무덤덤해졌다. 강박관념에 사로잡힌다. 어디선가 가냐린 바람이 불어왔다. 간간히 나뭇가지에 매달린 형형색색의 리본들도 바람에 흔들거렸다.
기기묘묘해진 마음을 억지로 진정시켜려 해보지만 몸과 마음이 따로따로다. 마치 유체이탈인 것처럼,
계속 어두컴컴한 철쭉 터널을 따라서 걷는다. 걷는게 아닌 걸어지듯 말이다.
참나무들의 두런거리는 소리가 머릿속을 가늘게 맴돌기 시작할 무렵, 길바닥에 휴식을 취하고 있는 긴꼬리산누에나방 한마리와 조우한다. 이제 생명을 다하기라도 한듯 꼼짝조차 하지 않는다.
초연한 삶이다. 마치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걸 나에게 알려주려는 듯. 내가 그리 셔터를 눌러대도 전혀 개의치 않는 분위기. 곤충들의 존재란 곧 인간들의 존재자체와 직결되는 것이라서, 그냥 한낱 미물이라 치부해 버리고 떠나기엔 왠지 두발과 전두엽이 거부한다.
산은 나에게 영원한
안식처를 주는 곳이었다
세시간 반여동안 온통 마음속에 의문부호를 달고 오르고 또 내렸더니, 먼 동녘에서부터 뭔가 미묘한 움직임이 감지된다. 여명이다. 세상이 꿈틀대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모든 생명의 원천인 빛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봉화산이 지척이니 걸음걸이를 서둘러 본다. 모처럼 다가온 기회를 놓치기 싫었다.
태양의 열기가 점점 더 붉게 고조된다. 천지개벽의 순간이다. 어둠에 잠긴 등로를 지나며 마음속으로 외쳐본다.
새벽 여명 앞에 당당히 섰다. 동이 터올때의 이 장엄함과 육중함. 순간 온몸이 굳어버린 듯 전율마져 느껴진다. 활짝핀 중나리 꽃망울에 전해지는 붉그스레한 일출의 모습.
순간, 내 머릿속을 휘젓고 있던 모든 잡념들이 어디론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새벽 여명이 나에게 말해준다. 잡념일랑 모두 내려놓고 그냥 가던길 말없이 가시라 한다. 오직 하늘길이 하는 이야기만을 듣고 걸으라 한다.
내가
만약,
신선이었다면 이곳 봉화산에서 나만의 낙원을 건설하였을 테고 ,
내가
만약,
뭉크와 같은 화가였다면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태양을 보며 절규를
화폭에 담았을 것이다.
갑자기 행복이 무한샘솟고 있었다. 플랫폼의 눈가에 스멀스멀 미소가 피어나고 야생화들도 화들짝 피어나 잔뜩 무거워진 내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고 있었다.
하마터면
열씸히 달려버릴 뻔 했다
기린초, 중나리, 뱀무의 이쁜 꽃망울들에 취해 걷는다. 산이 나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행복을 잉태하는 길이었다는 걸 왜 잊었던 것일까. 파도 파도 끝없이 흘러나오는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다, 라는 것까지도.
낮과 밤이 자리바꿈하는 황홀한 모습에 한동안 취해 걷고 또 걸었다. 인간의 더듬이로는 도저히 쉽게 포착할수 없는 일출을 보고 나서 또 떠남짓이다. 갑자기 가는길에 초록잎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신록의 푸르름에 온산이 향기로 가득 울려퍼진다.
억새가 하늘하늘 춤을 추고 이를 헤치며 지나가는 대간러들의 뒷모습이 아름답고 황홀하다. 잡념일랑은 온데간데 없다. 일출하나가 내 마음을 그토록 흔들어 놓을 수 있다니. 한순간, 한순간이 감동의 물결이다. 그래서 삶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라고 말했던 걸까.
산에는 행복이 넘치고 하늘엔 희망이 꾸물거리고 대간러들의 마음엔 꿈이 넘실댄다. 그렇게 감사할 일 수두룩한 삶에 무슨 불만이 있을 수 있을까. 모든 잡념 내려놓는다. 그져 행복하다. 어느새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떠나는 여행은 룰루랄라 길이되고 있었다.
잠시의 멈춤 이후, 갑자기 무력감이 행복감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앞만보고 남의 속도대로 달렸을 땐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멈추니까 보였다.
나 다움이란 바로 이런것이 아닐까. 내 마음이 원하고 지시하는 것처럼.
신선이라도 된냥 오름짓, 내림짓이 한동안 거듭된다. 광대치도 지나고 월경산도 지났다. 무릎에게 한없이 미안해지는 중재까지의 내림길. 조금만 내려가 달라 기도했건만, 역시 그 기도는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일 뿐이었다.
몸을 최대로 낮춘 중치고개. 무성한 참나무 잎사귀 사이로 한줄기 빛줄기들이 들어온다. 숲이 웅성거렸고 온통 투명해졌다. 주변 관목들도 밝아지고 영롱해지고. 물한모금에 한숨소리가 가냐리게 세어 나왔다.
백운산 오름길은 플랫폼의 인내력을 테스트 하듯 길고 거칠었다. 정상에 다다를 만하면 굽이쳐 내렸고 다다를 만하면 또다시 솟구쳐 올랐다. 산행길은 플랫폼의 인생길의 복사판이다.
그렇게 수번의 오르내림을 되풀이하고 나서야 정상을 허락하였다. 황망하여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감격에 겨워 더이상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감동이 물밀듯 솟구쳐 올랐다.
하늘의 뭉게구름까지 날 반겨주었다. 일년 몇 달간 운무에 뒤덮혀 있어서 백운산이라 명명되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를 마음속에 담는다.
백운산 깎아지른 오름길에서 만난
흰참꽃나무는 날 한동안
마법의 세계에 빠지게 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뒤의 적막감 뒤. 난, 흰참꽃나무의 부시시한 눈망울을 보았다. 백운산 오름길 직전에 화사하게 얼굴보여준 흰참꽃나무.
오늘 산행의 백미인 백운산 깎아지른 오름길. 정상을 불과 100여미터 남겨두고 오르다 쉬다를 수번 반복한 끝에 만난 흰참꽃나무와 회목나무,
난, 무언가 마법에 빠져버린듯 한동안 말도 걸음도 잇지 못했다.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것처럼. 이게 바로 산뽕, 대간뽕의 맛이 아닐지 싶어졌다.
산녹색부전나비와의 숨박꼭질에도
빠져보다
몇 차례 술래잡기 끝에 나에게 몸을 허락한 산녹색부전나비. 정상에 너무 취하며 안된다는 걸 난, 이미 알고 있었기에 다시금 길을 떠난다. 한낮의 열기가 더욱 빛을 발한다. 그것마져도 우린 운명처럼 온몸으로 받아내고자 했다.
1,000미터 고지 능선의 솔바람과 참바람 향기가 내 마음까지 싣고 한고개, 또 한고개 넘어간다. 점점 영혼이 무아지경으로 치닫는다. 부귀도, 영화도, 명예도, 사랑도 일장춘몽이란 싯귀를 읇조리며 걷는데, 걸음걸이가 급속도로 느려진다.
천년 만년 살것도 아니면서 부귀영화를 그토록 모으고 모아서 뭘 할것인지. 그져 산과 들을 벗삼아 뭉게구름처럼 두둥실 떠다니면 그만인거지.
꿈속을 걷는것처럼 비틀거리기를 여러번. 드디어 염원하던 영취산에 도착했다. 기다리던 저 구름들이 나에게 말을 건네는 듯하다. 플랫폼님! 수고하셨다고. 해낼줄 알았다고. 성취감과 희열이 쏱아진다.
오늘 내 정신이 벌인 무모함때문에 생고생한 두다리와 심장에게 감사드렸다. 수많은 땀방울들과 고통속에 맞이한 기쁨들. 백운산 오름길 숱한 땀방울들을 생각해본다. 심장이 터질듯한 고통후의 이 짜릿함.
그 순간순간의 흥분들이 어느새 전율로 뒤바뀌고 난, 무룡고개 어느 한적한 주막에서 국수에다가 막걸리 한사발에 위안을 삼는다.
오늘도 버벅거리고 많은 잡념들과 싸우고 육신은 힘이 들었지만 마음만은 온통 행복감으로 점철된 하루였다,
내가 결국 해낸것이다. 내 두다리가. 내 심장이.
내 두눈이 끝이 없을 것 같은 마루금의 한구간을 완주해 버린것이다.
멈춤을 생각하며
내가 어디까지 가게될지. 내가 갑자기 어느 하늘길 모롱이에서 멈추게 될지 모른다. 오직 대간을 다스리는 신만이 알 것이라 짐작만 할 뿐. 하지만,
그 길을 멈추게 된 날. 아니, 걷는 걸 포기하는 그 날.
그 찰나의 순간까지 매 구간 최선을 다하려 한다.
매순간이 고비이고 위기라는 걸 알기에 좀더 지혜롭고 슬기롭게 대처해 보고싶다. 다음 산행이 더 기대되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이어서, 플랫폼의 좌충우돌 백두대간 산행 도전기 08, 할미봉 편이 발행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