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론트서울 신사에서
대도시의 사랑법 영화에서 나온 인상깊은 구절이다.
집착은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해왔던 내 생각을 깬 당돌한 문구였다.
나도 나름은 주체가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 편인데, 가끔 이렇게 내가 생각하고 정의 내렸던 것들이 타당한 설득력 있는 이유로 내 정의가 바뀌게 될 때 짜릿한 기분이 든다.
먼저 내가 집착을 사랑이 아니라고 했던 이유는
집착은 내가 없을 때, 내 스스로가 자신이 없을 때 나오는 불안감으로 타인에게 나를 투영하여 애착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아주 빡빡하게.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절대 내가 될 수 없는 타인을 조종하려는 행위. 내가 자신이 없으니 타인이 다른 사람을 쳐다보지도 못하게 하며 쳐다봤다간 내가 매력이 없는 것이 들킬테니 절대 다른 이와의 접촉을 삼가게 꽁꽁 얽매는 행위라고 생각해왔다.
집착도 정도가 있다고는 생각했었지만, 사랑 안에 집착은 더욱이나 고귀하고 정도를 가늠하기도 구분하기도 까다로운 무언가였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이에 있어 집착은 필수요소라고 볼 수 있었다. 집착이 없다면 일반인 내 사친들과 같은 감정이고 같게 대하기에 굳이 연인으로서의 사귐이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정도를 판가름하는 건 나랑 사랑을 하는 그 상대와 내가 어느 정도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 건지 파악해야함을 알 수 있었다. 대놓고 물어보더라도 분명 스스로 어느 정도가 괜찮은지 잘 모르는 경우일 게 뻔하기 때문에 물어봄에 의미는 없고 조금씩 조금씩 내 집착의 정도를 내비추는 일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또는 함께하다 문득 질투감, 강렬하게 연결되고자 하는 느낌이 들었을 때 누군가 우리의 사이를 방해하는 그 느낌이 굉장히 불쾌하고 낯설게 느껴질 때는 표현해봐도 괜찮은 것 같다.
누군가에게는 같은 행동에서 사랑을, 부담을 느끼겠지만 그건 받아들이는 사람이 내 사람이 맞는지 판가름 해볼 수 있는 요소이기도 한 것 같다. 이쯤되니 내가 사랑하는 그가 이제는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느끼는 집착은 어떠한가. 사람의 마음은 한 순간에 변하기도 생기기도 움직이기도 한다. 타인의 마음은 내가 어찌할 수 있는 부분이 없다. 내가 사랑이라 믿었던 우리의 관계에 끝이 보일 때.
마음이 남지 않았다는 사람도, 아직 마음이 많이 있다는 사람도 모두 속상한 건 마찬가지이다.
사랑의 끈을 한 명이라도 놓았을 때, 우리는 욕심을 버려야하는 것이 맞다. 이제는 놓아줘야하는 것이 맞다. 내 안의 집착을 이제는 풀어내야할 줄 알아야한다. 사랑했던 만큼 꽁꽁 얽매였던 만큼 다시 풀어내기란 참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해내야하고 할 수 있는 일이다.
이 정도의 집착의 양이 가장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끊어야할 때 끊을 수 있는 정도의 집착.
나에겐 네가 맞는 것 같은데, 너에겐 내가 아니라했을 때 나도 네가 아니어도 되는 정도를 항시 유지할 수 있는 게 적당한 것 같다.
내 스스로가 주체로 있을 때는 전부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그러지 않을 때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항상 내가 나로써 내 주변에 무언가 없어져도 맨 몸으로 서있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길 바란다.
나. 그리고 모두에게.
끝으로 내가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할 모든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사랑했던 그들 주변에 내가 있지 않더라도 그들은 그들대로 늘 행복하고 평온한 하루들이 이어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