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권고사직, 그 자체보다 힘든건

권고사직을 당한 후 심리는 놀랍게도...

by 온전

이별을 겪고 심리 회복을 하는 5단계가 있다고 한다.

권고사직도 회사, 팀, 진행하던 업무와의 이별이라 그 과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1단계 - 부정

'내가 왜?' 라는 생각이 제일 컸다. 객관적으로 봐도 그랬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여러 브랜드를 거느리고 있는 중견 기업이었고, 아무리 브랜드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하더라도 20대에, 팀에서 막내인 나를 내쫓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른 팀원들을 포함해 거의 전직원을 대상으로 면담을 한다고 믿었다. (실은 아니었고 만만한 내가 타겟이었다.) 처음 면담을 할 때만 해도 아니겠지..아닐거야.. 라는 생각 뿐이었다.


2단계 - 분노

면담이 한 두번이 아니라 수차례 불려가자 통보 이별이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점점 화가 쌓이기 시작한다. 내가 잘못한 것도 없고, 원하지도 않는데 갑자기 왜 나가야 하지? 그리고 나를 자꾸면 불러내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드는 임원도 미웠다. 아무런 방어도 해주지 않는 팀장님도 미웠고. 아무것도 모르고 일 시키는 팀원들이 미워질 때도 있었고. 그냥 세상이 나를 억까하는 기분이었다. 노무사랑 상담을 해봐라,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해라 라는 주변의 여론에 휩쓸려 소송을 알아보게 되는 때이기도 하다. 동시에 정말 각잡고 싸울 준비를 하지 않으면 개인이 조직에 맞서 싸우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뼈져리게 느끼게 되는 때이기도 하고. 그리고 이 단계의 특징은 정신적 스트레스가 몸으로 드러나기 때라는 점이다. 잠을 못자는 건 기본이고, 식욕도 없을 뿐더러, 나의 경우에는 생전 없던 알러지까지 생겼다.


3단계 - 타협

노무사랑 상담도 해보고, 근로계약서도 들여다보고, 주변에도 수소문 해보고. 이쯤되니 내가 별로 할 수 있는게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 그래 위로금이라도 주는게 어디야. 아무리 시장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나 하나 이직할 곳 쯤은 있겠지.' 이런 합리화를 스멀스멀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채용공고를 살펴보며 약간의 희망회로도 돌려본다. 쉬다가 더 좋은 회사를 간다면 오히려 좋잖아? 하고.


4단계 - 우울

내가 겪은 분노와 우울의 차이점은 에너지의 유무이다. 분노의 단계는 오히려 에너지에 있어서는 긍정의 상태이다. 누군가 미워할 대상이 있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며, 때로는 실행에 옮기고 싶은 행동력까지 있는 적극적인 상태이다. 하지만 우울은 완전히 다르다. 탁해진 계곡물에 모래가 걷히고 침전물만 쌓인, 고요-한 상태. 일이 도저히 손에 안잡히고, 미래는 그려지지 않으며, 화장실에 가서 몰래 울기도 하고. 정신적인 번아웃 상태라고 볼 수 있다.


5단계 - 체념

많은 사람들이 바닥을 찍고 나면 오히려 괜찮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울로 마음의 지옥을 겪고 나면, 수용과 체념의 단계가 절로 찾아온다. 물론 그 사이에 감정은 계속 왔다 갔다 한다. 팀원들에게 권고사직 사실을 알렸을때 잠깐이나마 위로를 받다가도, 회의에서 배제될 때 이게 맞나 싶다가도, 반대로 회의에 불려가도 내가 지금 뭐하고 있나 싶은 복합적인 감정까지. 체념의 단계는 주로 공식적인 의식을 통해 시작된다. 인사팀과의 면담이라던가, 남은 연차계를 상신한다던가, 인수인계를 한다던가 하는. 그리고 체념의 단계를 넘어서는 순간 이별에서 잠시 자유로워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이별의 5단계를 돌이켜보니, 권고사직이라는 그 사실 자체보다도 이별의 과정 속에서 내 마음의 소용돌이가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누군가를 크게 미워해 본적이 없는 나는 분노의 단계가 특히 힘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미워하지 않았더라면, 용서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앞으로도 살면서 권고사직처럼 예상치 못한 이별부터 준비한 이별까지. 많은 이별들이 있겠지만 지금의 교훈을 기억하면서 현명하게 마음을 다스려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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