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을 위한 힐링] #22
생리가 시작되었다.
어젯밤에는 TV를 보면서 키득거리는 남편을 향해 "좀 조용히 하라"며 짜증을 냈다.
황당해하던 남편의 얼굴.
그게 생리가 나오려고 그랬던 것이었구나.
기분 참 우울하다.
남편과 다투는 일이 많아졌다.
내가 이러다가 성격 파탄자가 되는 것은 아닌지.
남편에게 카톡을 보냈다.
"오늘 생리 시작. 어제 미안했어."
화선에게서 전화가 왔다.
화선은 결혼한지 1년이 넘어가던 차였고 계속 임신을 기다려왔다.
우리는 종종 임신 정보 사이트에서 알게된 정보를 서로 이야기하곤 했다.
"어, 선영아"라고 말하는 화선의 목소리에 흥분한 느낌이 역력했다.
오늘 산부인과에서 아기집을 확인했다고 한다. 2주 뒤에 심장 뛰는 소리를 들으러 오랬다고 한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겨우, "어머, 축하해."라고 뱉었지만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전화를 끊을 수는 없었다.
수다스런 화선은 벌써부터 애 이름 타령이다. 남자애일지 여자애일지 궁금하단다. 남자애 이름 후보와 여자애 이름 후보를 대면서 어떤 것이 좋겠냐고 묻는다.
"너네 애니까 너가 골라야지." 했다.
기가 막히다.
초기에 유산되는 경우도 많다고 하니, 조심하라는 말이 입안에 맴돌았지만 꾹 참았다.
그녀를 축복하기 싫다.
질투심, 그것이 올라오는 나 자신에게 죄책감이 생겼다.
하지만 화선이가 노력한 것보다 내가 수십배는 더 노력하지 않았는가.
이건 뭐, 공부 안 한 애가 시험 잘 보고,
공부 열심히 한 사람은 낙방하는 것과 똑같지 않나.
왜 이렇게 불공평해.
공부 안하고 시험 잘 본 애가 미웠던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 크게 밉다.
그 친구를 미워하는 내가 더 밉다.
이제 당분간 화선이의 얼굴을 보기는 힘들 것 같다. 보기 싫다.
요즘 남편은 내가 우울증에 걸린 것 같다고 말한다.
나는 그저 임신이 계속 안되니까 기분이 다운된 것이고, 그게 당연한 거지, 그렇다고 우울증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멍하게 창밖을 바라보다가 눈에 힘을 풀렸다.
그러자 창을 보고 있는 내가 보였다.
나, 선영이...
말이 줄었고, 아무 것도 하기 싫고, 감정기복이 심하고, 늘 무기력한 선영이.
선영이 지금 우울한 건가.
삼촌과 만나기로 날이었다.
선영 : 삼촌, 제가 요즘 임신 생각만 해서 그런지 좀 우울한 것 같아요.
삼촌은 내 얼굴을 한참 보았다.
삼촌 : 그래, 내가 너였어도 그랬을 거야.
삼촌은 그 특유의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짧은 한마디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삼촌은 내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삼촌이 계피차 티백을 머그잔에 담갔다.
뜨거운 물의 김과 함께 계피의 향이 코끝으로 날아든다.
삼촌 : 자, 마셔봐. 뱃속까지 따듯해질 거야.
선영 : 우와, 계피향 진짜 좋네요.
호호 불고 한 모금 마셨다. 달달하다.
선영 : 이 계피는 맵지 않고 무척 달달하네요, 국산인가요?
삼촌 : 계피는 국산이 없어. 우리나라에서는 좋은 계피나무가 자라지 못해. 약용 계피로 가장 좋은 것은 베트남산이야. 베트남에 옌바이라는 지역이 있는데 거기서 나는 1등급 계피란다.
선영 : 아, 계피도 등급이 있구나.
삼촌 : 계피는 따듯한 약성이 있어. 몸이 찬 여자들에게 참 좋지. 자궁 쪽으로 혈액순환이 잘 되게 해주고, 손발도 따듯하게 해준단다. 그리고 지금 너처럼 우울해서 기운이 쳐져 있을 때 계피차를 마시면 몸 속의 양기가 위로 올라온단다. 삼촌이 한 봉지 왕창 줄테니 가져가서 수시로 마시거라. 맛있어.
선영 : 아, 정말요? 향도 좋고, 진짜 맛있네요. 이거 마시면 커피 끊는데 도움 되겠어요.
삼촌은 계피차를 한 모금 삼키고 말을 이었다.
삼촌 : 너 임신을 무척 원하지?
선영 : 당연하죠.
삼촌 : 임신을 하면 무척 좋겠지?
선영 : 아, 당근이죠.
삼촌 : 그래. 지금까지 숱한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임신이 되지 않아서 계속 낙심했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드니까 불안하고 우울한 마음이 들지.
선영 : 제 맘을 아시는군요.
삼촌 : 그래, 우울한게 당연하지.
그런데 삼촌이 갑자기 씩 웃었다.
삼촌 : "그런데 말입니다, 좌절감, 불안감, 두려움, 우울함… 이런 감정은 그저 한 번 느끼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 감정들은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들어가 뿌리를 남깁니다."
삼촌은 '그것이 알고 싶다'의 김상중 흉내를 냈다.
선영 : 하하, 삼촌 웃겨.
삼촌 : 그래, 그렇게 웃자. 너무 심각해지지는 말자고.
삼촌은 살짝 웃고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재성은 지금 여기 이곳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