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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영 Dec 21. 2020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은

2017년 5월 러시아 여행

고속열차를 타고 4시간을 달려 밤 11시에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에 도착했다. 모스크바에는 목적지의 도시 이름을 붙인 14개의 기차역이 있다. 결국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는 백러시아로 갈 수 있는 벨라루스 역은 있고 모스크바 역은 없고, 벨라루스에는 모스크바 역이 있는 것이다. 이름을 잘 지었다. 내가 서울에 산다면, 서울에서 대구에 가기 위해서는 대구역에, 부산에 간다면 부산역에 가면 되는 것이다. 현재처럼 전라도 나주에 가려면 용산역에 가야 되는지? 서울역에 가야 되는지? 혼란을 겪을 필요가 없게 된다. 현명하다.   

우리 국토의 170배나 되는 국토에 인구 1억 5천 명인 러시아는 절대 강국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러시아도 우리와 비슷하게 1,000번 이상의 외침이 있었고 1,237년 몽고의 침입으로 3년 만에 국토 전역을 빼앗기고 240년간 지배를 받는 전력이 있다. 많은 시련을 겪은 나라로 미국이나 유럽에 비하여 인종 간의 갈등이나 편견이 적다. 우울한 날씨의 영향으로 사람들의 표정이 굳고 무뚝뚝해 보이지만, 실제 관계를 맺게 되면 우리 민족만큼이나 인정이 넘치는 다정다감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러시아 특별 관광지에는 반드시 동행해야 하는 현지 가이드 역시 동행하는 몇 시간 내내  얼굴 표정 한 번도 안 바뀌고 굳은 표정을 유지했다. 차가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많이 묻고 이것저것 얘기해서 속마음을 엿볼 수 있어야 했는데...   


한 때 2만 2천 명에 달하던 이곳 교민은 1990년 말 소련연방이 붕괴된 후로 급격하게 루블의 가치가 떨어지게 되자, 귀국자가 늘어나면서 이제는 유학생 천명을 포함하여 1,800여 명으로 축소되었다고 한다. 환율 40 원하던 것이 21원 수준으로 떨어졌다.

 

크렘린 성 전경
러시아 제정시대 공식행사와 화려한 제전이 열렸던 소보르나야 광장

소련이 붕괴되기 전에는 누구의 근접도 불허된 금기의 지역이 이제는 수많은 관광객이 모여들고 있다. 도시 방어를 위해 축조된 2.5km 붉은 벽돌 성곽으로 둘러싸인 크렘린 성내로 들어서면 많은 대포들이 나열되어 있다. 이는 러시아를 침공한 나폴레옹 60만 군대를 물리친 것 역사적인 사실의 흔적이다. 모스크바가 함락되고 크렘린 성이 짓밟히는 치욕의 패배를 당하지만, 한 장군의 지혜로 전쟁은 러시아의 승리로 끝났다. 러시아는 모스크바 전 지역을 비우고 가축과 먹을 것을 없애버렸다. 텅 빈 도시를 점령한 프랑스군을 도심에 가두고 보급로를 차단한 끝에, 프랑스군은 10월의 살을 에는 추위를 견디지 못해  퇴진하고 말았다. 물러가는 프랑스 군대를 파리까지 쫒아 가 격퇴시켰다. 그때 살아 돌아간 자가 60만 명 중 겨우 2만 5천 명에 불과했고, 이 전쟁으로 나폴레옹은 결국 황제 직위에서 물러나게 된 것이다.

1812년 나폴레옹 군대가 퇴각할 때 버리고 간 프랑스 대포, 아래 차르 캐논(황제의 대포)은 무게 40톤, 대포알은 지름 105cm, 무게 1톤이나 된다.

크렘린 성은 지금도 왕궁으로 사용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이 근무하는 건물 쪽으로는 군인이 관광객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크렘린 성의 2층 전면에 보이는 방이 푸틴의 집무실이라고 한다.

당시 러시아는 터키 인스탄불의 성 소피아 대성당과 같은 대규모의 건축물을 축조할  수 있는 건축기술이 부족했다. 그래서 성내에는 하나의 큰 건물을 짓는 것 대신, 큰 광장에 여러 개의 건물로 나누어 12 사도, 성모 수태고지, 대천사 등의 다수의 성당이 축조되어 있다.

이 중 성모승천 성당은 러시아 최고의 사원으로 국왕들의 대관식이 치러졌고 정교회 총 주교들이 선출되었던 곳이다. 비잔틴 마지막 황제의 딸과 결혼한 이반 4세의 영향으로 로마의 카톨릭과 다른 종파, 그리스도 정교를 잇는 러시아 정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외부는 여러 개의 황금색 아치와 그 위에 설치된 십자가는 우리가 아는 일반 십자가와는 모양이 다르다. 십자가 상하단에 예수님의 머리와 발을 뜻하는 수평 막대기가 추가되어 있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우편에 있는 죄인의 용서를 받아 주셨던 것과 같이 가운데 긴 수평 막대기의 오른편이 조금 더 올려 우편이 선함을 표현하고 있다. 실내는 성화 이콥으로 벽면 가득 채우고 있다. 4대 복음을 싱징하는 4개의 큰 기둥이 큰 구조물을 버티고 서있고, 천장에 뚫린 구멍 옆에는 성부, 성자, 성신을 뜻하는 3개의 빛이 들어오는 틈새가 있다. 그 천정에는 우리를 내려 보시는 예수님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성모승천 성당
성모 성천 성당  입구, 4개 기둥, 천장과 벽면 모두 성화로 가득 채워져 있다.

크렘린 성과 바로 연결된 붉은 광장은 러시아 말 '크라스나야'로 '아름다운'을 의미하는 '붉은' 단어를 영어 Red로 표현한 것이어서, 피나 전쟁을 의미하는 것으로 왜곡해 들릴 수 있다. 원래의 명칭이 '아름다운 광장'이었지만 크렘린 궁전을 둘러싼 담장과 광장의 에닌의 표도, 역사박물관도 모두 붉은색이니 '붉은 광장이라고 불러도 무난할 것 같다. 붉은 광장은 국영으로 운영되었던 러시아 최고의 굼 백화점, 레닌의 무덤, 러시아 역사박물관과 러시아 정교회 성 바실리 성당이 사각으로 둘러싸고 있다.

크렘린 성과 붉은 과장
러시아 최고의 굼 백화점,  1625년에 건축된 카잔 성당, 러시아 역사박물관
문 위에 있는 카잔의 성모 성화는 러시아에서 가장 숭앙받는 정교 성화중 하나다.
크렘린 성벽과 연결된 붉은 광장 한쪽에 위치한  크렘린 묘지에는 레닌, 가가린, 막심 고르키 등 소련의 관료와 영웅들이 묻혀 있다.  

바실리 성당은 모스크바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러시아를 240년간 지배했던 몽고를 완전히 몰아낸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반 4세가 건립한 것이다. 이탈리아 장인을 초빙하여 축조한 것으로 왕 자신을 상징하는 중앙의 황금빛 돔과 왕이 정복한 8개의 대도시를 8개의 돔으로 표현하였다. 작은 돔들이 황금 돔을 둘러싸 보좌하는 것같이 축조하였다.  선명한 원색의 독특한 양파형 지붕을 한 9개의 돔은 형태, 크기, 색상이 모두 달리 설계되어 매우 신비롭고 아름답다. 9개의 지붕은 지상 어느 각도로 보아도 최대 8개의 지붕밖에 볼 수 없다.  

모스크바를 상징하는 건축물, 바실리 성당

모스크바 국립대학이 있는 지역을 참새 언덕이라고 부르는데, 이곳을 차지해던 옛 영주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한다. 평지로만 펼쳐진 모스크바 중 가장 높은 지역으로 겨우 100m 정도 더 높을 뿐이다. 러시아인들은 모스크바 국립대학을 세계 3대 대학에 속한다고 자랑한다. 대학 건물 양옆으로 이 대학 출신 노벨상 수상자의 동상 12개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참새 언덕 거리에는 기념품 노점상이 많았다. 그중 러시아 마뜨로슈까 인형과 모피 목도리와 모자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이곳에서 모스크바 시내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었다. 광대한 땅에 유독 러시아의 발전상을 나타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높은 건물들을 세운 Mosco City가  보인다. 워낙 지가가 높아 일반 시민이 거주하기를 거부하자, 국가가 강제적으로 투자 외국기업을 입주시켜 우리나라 삼성, 엘지, 은행 등이 입주해 있다고 한다.  

모스크바 국립대학이 있는 참새 언덕

아르바트 거리는 일찍 18세기부터 러시아가 유럽과 아시아를 이어주는 역할을 할 때 숙소로 사용되었던 개방의 지역이었다. 현재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문화와 자유를 상징하는 지역이다.

이 거리에는 러시아의 시인 푸시킨이 18세 나탈리아 곤차로바와 결혼하여 신혼시절 살았던 집이 그대로 보전되어 있다. 자신의 아내를 사랑한 연적과의 결투에서 사망했다는 푸시킨의 사망설에는 다음과 같은 진실이 있다고 한다. 러시아 문화상을 지냈고 여러 경험과 싸움 기술이 뛰어난 푸시킨은, 자신의 동성애 사실이 폭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인위적으로 사건을 만들었다. 나탈리아와의 연분을 퍼트리는 프랑스 단테스 남작에게 목숨을 건 결투를 신청했다. 몇 차례 푸시킨과의 대결에게 진 단테스는 정해진 걸음을 다 걷기 전에 돌아서서 총을 발사했다. 약속된 발걸음 후 뒤를 돌아 총을 쏘아야 한다는 규칙을 위반한 것이다. 비겁자의 총탄에 맞아 쓰러진 푸시킨은 단테스의 시신을 싣기 위해 보내진 마차에 대신 실려 갔다고 한다.

아르바트 거리의 명소 중 하나는 빅토르 최의 벽이 있는 거리다. 러시아의 국민 가수이었던 빅토르 로베르토비치 초이, 빅토르 최는 소련 레닌 그리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고려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이에 태어났다. 그이 할아버지 막심 최(최승준)는 함경북도 성진 출생으로 일제 강점기 초기에 러시아로 건너가,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카자흐스탄으로 강제로 이주한 고려인이다. 빅토르 최는 보일러공으로 일하면서 밴드 키노의 리더이자 보컬로 활동했다. 록 음악을 서구의 퇴폐문화로  치부하던 구 소련 시절에 자유를 갈망하는 반체제적 노래를 발표했지만, 대중으로부터 워낙 절대적인 사랑을 받은 터라 당국에서도 어쩔 수 없이 그냥 놔두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90년 8월 15일 리트비아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교통 사고로 28세 나이에 요절하였다. 그의 죽음에는 KGB가 관여했다는 의혹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아르바트 거리 37번 건물의 벽은 그의 팬들의 성지다. 빅토르 최의 벽 아래에 있는 재떨이에 불 붙인 담배를 두고 가는 것이 전통이라고 한다.     


아르바트 거리를 둘러본 후 공항으로 달려가 비행기에 몸을 실어 다시 현실로 날아 왔다.
이번 여행은 여기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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