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캄캄한 어둠에 가려 세상이 잠들어 있는 시간. 전날 쳐놓은 그물에 걸린 물고기의 파닥거리는 소리에 잠을 설치다가 새벽 3시 반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산 중턱에 지은 어촌 집에서 작은 포구까지는 나라에서 무상으로 제공하는 전기불이 켜져 있었고, 그 불빛을 따라 방파제로 돌아왔다. 텐트에서 라면을 꺼내 요깃거리를 준비했다. 짜장면, 빵 한 조각과 어제 먹다 남은 삶은 뿔소라가 있었다. 새벽 벽두이고 입안이 까칠해서 먹기를 주저하는 나에게 이 섬이 고향인 동료는 '밥 힘으로 일을 한다'며 든든하게 먹어 두기를 권했다.
양동이 가득 어획을 상상하며 물이 빠진 바위섬으로 갔다. 어제저녁에 쳐 놓은 30여 m 그물 2채를 걷어야 했다. 한 사람은 스티로폼이 달린 그물 끝을 잡고 두 사람은 무거운 추가 달린 그물을 걷어 올렸다. 세 사람이 보조를 맞추어 그물 간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하였다. 그리고 해류에 따라 한쪽 방향으로 헤엄치다가 걸린 물고기가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그물이 털리지 않도록 조심했다. 물 묻은 그물이 많이 무거웠고, 바위에 붙어 있는 김과 파래가 많이 미끄러웠다. 손바닥만 한 볼락, 망상어와 노래미가 주렁주렁 달려 있어 마음은 즐거웠지만, 그물을 걷어 올리는 손과 팔뚝은 지쳐가고 발은 헛딛어 미끄러지기를 반복했다. 중도에 포기를 할 수는 없다. 기진맥진한 끝에 그물 2채를 바닷가 콘크리트 길가로 끌어 올려놓고, 길 위에 지친몸을 뻗고 누워 땀을 식혔다.
경험이 많은 동료가 그물에서 물고기를 따내기로 하고, 두 사람은 어제 해삼과 뿔소라를 잡은 바닷길을 찾아 나섰다. 전날 늦은 오후 간조 시간에는 뜨거운 햇볕을 받아 바위와 돌이 마르고, 바위를 뒤덮은 파래가 천연 김같이 바싹 말라 걷기에 좋았는데, 이른 아침의 물 빠진 바닷길은 어찌나 미끄럽든지 한 걸음 한걸음이 조심스러웠다. 물에 젖은 바위틈 사이에는 미쳐 빠져나가지 못한 군소 여러 마리가 눈에 띄지만, 포획할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부피가 크고 무거웠지만 낑낑대고 들고 가서 삶아보니 십 분의 일 크기로 줄어들었다. 괜히 힘을 쓰고 싶지 않다. 얕게 고인 물에서 해삼 한 마리를 발견했다. 마음은 조급했지만 느린 걸음으로 조심하며 전날 뿔소라를 줍던 장소에 도착했다. 그 많던 소라가 보이지 않았다. 아직 물이 덜 빠진 모양이니 기다려 보기로 했다. 5시 30분이 간조 시간이다. 벌써 날이 환하게 밝아오고, 시간은 알 수 없었다. 행여 휴대폰이 바다에 빠지는 불운이 발생하지 않도록 폰을 텐트에 두고 왔기 때문이다. 조심스럽게 바위들을 오르내리면서 해삼과 소라를 찾으며 시간을 보냈으나 물이 빠지기는커녕 물이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많은 시간을 그물을 걷는 데 사용해서 물때를 놓친 모양이다. 안타깝지만 낮은 바위가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확인하고 급히 철수를 결정했다.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가득 소라를 줍겠다고 가져간 양동이 두 개에 톳을 잘라 가득 담았다. 철분, 칼슘, 요오드 등 무기질과 식이섬유가 풍부해 성장기 어린이들에게 특히 좋아서 한 때 전량 일본에 수출되었고, 쌀과 섞어 톳밥을 지어먹기도 하는 자연산 톳이 큰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몇 년간 인간의 손을 타지 않은 듯 길게 자란 톳이 바닷물과 함께 출렁되고 있었다. 과거 어머니가 해주신 톳 두부무침을 먹은 기억이 났다. 그리고 푸른 잔디밭이 펼쳐진 듯 바위들을 덮고 있는 짙녹색의 파래도 한 뭉치 뜯어 왔다. 파래 초무침이나 파래전을 부쳐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새벽부터 일을 했더니 배가 고팠다. 왜 새벽밥을 먹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고, 밥 힘으로 일한다는 말을 실감했다. 바위섬을 벗어나 방파제로 돌아와서 버너에 불을 피우고 쌀을 씻어 얹었다. 그물에서 따낸 물고기 한 양동이와 동료가 이곳 친지에게서 얻은 손바닥보다 큰 참조기, 갑오징어를 손질했다. 손질한 물고기가 큰 아이스박스 하나 가득 찼다. 뿔소라도 큰 망에 하나 가득이다. 여러 사람에게 자랑하며 나눠 줄 수 있겠다. 그날 아침 나는 생전 처음으로 참조기 회를 먹었다. 완도의 바다는 온통 먹거리가 넘쳐났고, 인심도 넘쳤다.
이 섬에는 한 때 20여 가구가 살았지만, 지금은 단 두 가구만 산다. 삼촌 내외와 조카 내외가 산다. 삼촌이 이장이고, 조카사위가 어촌계장이다. 한가롭게 누워 유유자적 며칠을 보낼 수도 있고, 집 밖을 나서 일을 하면 돈을 벌 수 있다. 아침에 일어나 배를 몰고 가서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빼내 와서 큰 섬에 횟거리로 내다 팔기도 한다. 낮에는 집안이나 나무 그늘에서 쉬었다가, 저녁나절에 물 빠진 바위섬으로 나가서 뿔소라를 줍기도 하고, 가끔은 다이버를 고용하여 종패를 뿌려 섬 전체에서 자라는 뿔소라를 잡아 목돈을 만들기도 한다. 주업은 앞바다에 미역과 다시마를 양식하는 것이다. 미역과 다시마를 말려 육지에 내다 판다. 더러는 생미역을 공장에 납품한다. 공장에서는 미역을 납품받아 뜨거운 물에 살짝 데쳐 가공 미역을 만든다. 2, 3주에 한 번쯤은 그물망을 걷어 에어 건으로 그물을 깨끗이 씻고 말려서 다시 그물망을 설치한다. 그물이 깨끗해야 고기가 많이 잡힌다.
이 섬에서의 삶은 단순하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없다. 쉬고 싶을 땐 쉬고, 집을 나가서 일을 하면 돈이 벌린다. 머릿속에 아무런 잡념이 일지 않아 스트레스가 없다. 어두워지면 잠자리에 들고 날이 밝으면 바다로 나간다. 지극히 단순한 삶, 반복되는 일상으로 건강한 삶을 누린다. 이 섬의 주인들은 도시에서는 못살겠다고 했다. 도시에 나가면 머리가 복잡해지고, 삶이 여러 가지로 얽히게 되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게 된다며 고향으로 돌아온다고 한다.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도심에서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살면서도 스트레스 없이 살아갈 수는 없을까? 섬사람들 삶의 특징은 단순하다는 것이다. 그날그날의 하루 일거리를 그날에 마치고, 다음날까지 연장하지 않는다. 걱정도 하루에 끝낸다. 그날 하루 최선을 다해 살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용서하고, 잊어버리면 되지 않을까? 다음 날은 다음 날의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단순하게 사는 방법이고 날마다 새롭게 사는 방법이다. 그러다가 혹시 푸른 멍자국이 보이거나 마음이 무겁다고 느껴질 때가 있으면,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그 무엇인가를 해서 마음을 가볍게 만들면 될 것이다. 어떤 것에 집중할 때 삶의 무게가 가벼워진다. 나는 주 1회 수채화를 그리는데, 집중할 때 세상의 모든 근심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하고 있다.
완도에서 이틀간, 나는 세상사 근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전혀 의식이 없었다. 낚시를 즐기고 군소와 해삼을 잡고, 톳과 파래를 걷고 미역 줄기를 잘라와서 햇볕에 말렸다. 참조기 회를 처음 먹었고, 뿔소라를 오독오독 씹어 먹었다. 가볍고 단순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섬에 들어갈 때보다 더 많은 수확물을 배에 실어 나왔다. 부산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병영 면소재지에 들러 남도 한정식 한상을 맛있게 먹었다. 다음에 시간이 날 때 강진에 들러 하멜 박물관, 영랑이 살았던 집과 다산 초당을 살펴보기로 했다. 남도 맛집 순례도 빠지지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