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무역과 교류, 게임의 발전과 효과
인종과 문화가 뒤섞인 싱가포르의 근대문화와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싱가포르 리버 근처에 자리 잡고 있는 아시안 문명 박물관을 찾아갔다.
영국 식민지 시절에 완성되어 1980년대 말까지 정부관청 건물로 사용되었던
건물의 위치는 영국인 래플즈경이 최초로 싱가포르 섬에 내렸던 지점이기도 하다.
건물사이에서 그의 동상을 볼 수 있다.
아시아 문명만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박물관에는
아시아 문화와 세계 문화 사이의 교류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중국 및 서아시아의 문명과
국제무역의 중심지로서의 싱가포르 역사와 관련된 유물, 유적들이 전시되어 있다.
2,100여 년 전 한 나라의 실크로드 개척으로 중국과 페르시아의 교역이 시작되었다.
육로와 해상을 통해 중국의 비단, 도자기, 차 등이 페르시아로 수출되었고
페르시아는 유리, 보석, 향로, 조랑말 등을 교환하며 문화적 교류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박물관 1층에는 1998년 인도네시아 자바 앞바다에서 인양한 당나라 난파선에 실렸던
수 만점의 9세기 도자기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아프리카산 목재로 건조한 선박은 걸프만과 인도에서 만들어진 초기 선박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830년경 아바스 제국의 걸프만에서 건조된 이 배는
인도와 동남아시아에 정박한 후 중국 항구에서 화물을 하역했으리라고 추측된다.
도자기를 실은 당나라 배가 중국의 광조우를 출발하여 남중국해를 거쳐
싱가포르 앞바다, 믈라카 해, 래카다이브 해를 지나 오만만과 아라비아만을 통과해
최종 목적지인 아바스 제국 바스라(이라크)를 향해 항해해던 중 거센 풍랑에 휩쓸려 침몰했다.
무역선의 침몰은 당시 아시아의 교류와 무역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시간의 타임캡슐 역할을 한다.
이번 관람은 아시아의 국제무역과 문화교류를 이해하는 기회가 되었다.
당시 말레시아 페낭, 말라카 등은 향신료를 차지하기 위한 열강의 각축지이었고
국제 무역의 중심지였으므로 교역을 위해 언어소통이 절실했을 것이다.
전시품 중에 당시의 외국어 학습에 사용된 교육자료가 눈에 띄었다.
외국어를 먼저 배우고 익힌 자가 선진문물과 지식, 상거래를 선도적으로 접힌 자가 되고
외국인과의 교역 중개인, 직접 상거래자가 되었을 것이므로
외국어 학습은 당시의 깨인 자들에게는 부를 쌓고 선각자가 되는 기회이었을 것이다.
19세기말 미국과 수교를 한 조선에 영어를 아는 사람이 없었을 때
서재필, 서광범같이 영어를 익힌 젊은 관리들이 서양의 문물을 배워 조선의 개화를 이끌었고
이준, 이상설, 이위종이 헤이그 특사로서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국제사회에 선포했고
영어에 능통한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었다.
조선말 영어 학습 교재를 보면, 우리말 발음을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하였는데
그 표기가 지금보다도 더 영어 발음에 가깝다.
유럽인들이 동남아에 진출하면서 전파된 종교와 관련된 유물도 눈에 띈다.
천주교는 동남아를 거쳐 중국을 통해 조선 백성들에게 전해졌고
일본에는 네덜란드 상인들에 의해 직접 선교되었다.
당시 조선과 일본에서는 천주교를 배척하고 교인을 탄압하였다.
십자가상을 땅에 놓고 지르밟는지 여부로 천주교인을 색출하기 위해 사용했던 동판과
표면에는 부처님 상을 새겼지만 실제는 십자가 모형을 제작하여 신앙의 징표로 간직했던
당시의 눈물겨운 역사적 신앙의 증거물 앞에서는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조선말 대표적인 실학자 정약용과 형 정약전은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강진과 흑산도로 유배되었으며 정약종은 순교를 당했다.
교인들의 죽음에도 신은 끝까지 침묵을 지켰던 영화 'Silence'가 생각났다.
성모 마리아가 죽은 예수의 시신을 안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피에타는 기독교 예술의 주요 주제이다.
로마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전에서 보았던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가장 유명한 작품이지만
박물관에 전시된 주조물과 조각상에서도 아들을 잃어버린 어머니의 슬픔과 비탄은 똑같이 느껴졌다.
인간의 발전 단계 초기에 인간은 목숨을 지킬 수 있는 안정성 확보와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먹이 활동에 최대 관심을 집중했다.
생존을 위한 근본적인 두 조건이 해결된 후 인간은 남는 시간에
자유롭고 원초적인 놀이 활동을 하며 즐거움과 만족감을 얻었다.
시간이 더 흐른 후, 특정 목적이 없는 자발적인 놀이에 승패, 점수, 미션,
명확한 목표와 결과 등의 경쟁적인 요소와 규칙을 부여하여 게임을 개발했다.
인더스 계곡의 고대 게임과 우르 왕가의 게임 작품과 같은 고고학적 발견은
게임에 대한 충동이 문명만큼이나 오래되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우리는 시간을 보내고 자신을 시험하고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고
때로는 이기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게임을 한다.
박물관에는 아시아 각 나라에서 사용해 온 수십 가지의 게임 관련 유산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콩깍과 마작과 같이 빠른 교환과 바둑의 조용한 정밀함까지 눈부시게 다양한 형태를 띤다.
초기의 많은 게임은 이제 사라졌겠지만 레이싱, 사냥, 전투, 카운팅, 패튼 제작 등
인간의 필수적인 활동을 반영하는 게임은 삶의 은유, 외교의 도구 또는 권력의 표현으로도 사용된다.
승리의 스릴과 강박적인 플레이의 위험을 넘어서 바둑과 같은 전략적 보드 게임은
정신훈련과 자기 성찰의 도구로도 사용되었다.
경쟁, 사색, 인내심, 예지력, 회복 탄력성 등 게임의 기술은 삶의 미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오늘날 게임은 대중적인 오락으로 변모하고, 전 세계적으로 대회를 조직하는 국제적 연맹에 의해
마인드 스포츠로 기념되고 있다.
디지털 시대에도 게임은 계속해서 발전하고 변화해서 인공지능의 영역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우리는 인공지능 알파고와의 바둑 시합에서 승리한 이세돌을 기억한다.
해외여행 중 낯선 이국에서 어렸을 때 즐기던 것과 비슷한 게임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많은 게임들이 국경을 넘어 새로운 형태에 영감을 주고 경계를 허물고
글로벌 게임의 전통을 형성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것이다.
고대 아랍과 동아프리카에 뿌리를 두고 있는 보드 게임의 일종인 '콩깍'은
인도양 무역로를 통해 동남아시아에 도착하여 17세기에 이르러 대중적인 게임으로 자리 잡았다.
말레시아와 인도네시아 바하사에서는 콩깍, 자바에서는 다콘, 필리핀에서는 성카 등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만 게임의 핵심은 지역 전번에 걸쳐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두줄의 일곱 개 구멍과 양끝에 큰 구멍을 만든 게임기에 동일 수의 씨앗, 돌 또는 조개껍질을 넣는다.
구멍을 가로지르면서 씨앗을 하나씩 넣고 자기 측 구멍에 마지막 씨앗을 넣으면
마주 보이는 상대방 구멍에 담긴 씨앗을 모두 빼앗고 한번 더 플래이 하는 게임이다.
마지막에 누가 더 많은 씨앗을 가졌냐에 따라 승패가 갈라진다.
가을철 잘 말린 콩을 수확하고 남은 껍질,
콩깍지처럼 생긴 도구를 이용하는 콩깍은 씨앗을 뿌리고 수확을 하는 농부의 생활을 상징하는 것으로
게임과 삶의 흐름, 의식을 연관시킨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 이름이 우리말 콩깍지에서 마지막 한 글자를 뺀 것과 발음이 똑같은 점도 신기하다.
실크로드는 기원전 2세기부터 서기 15세기 중반까지 유라시아 대륙을 동서로 횡단하며
경제, 문화와 종교적 교류를 가능하게 했던 고대 무역루트이다.
중국의 비단, 차, 종이, 화약 등과 서역의 보석, 향료, 포도, 악기 등이 거래되었으며
불교, 이슬람교, 기독교, 마니교 등이 이 길을 통해 전파되면서 각국의 문명을 풍요롭게 꽃피게 하였다.
단순한 상업적 교역의 루트로서의 의미를 넘어
동서양의 문명을 하나로 묶어주는 소통의 창구 역할을 한 도시들.
시안, 둔황, 사마르칸트를 거쳐 파미르 공원을 넘어
로마로 이어지는 육로의 초원길을 답사해 보고 싶었다.
이번 싱가포르 아시아 문명 박물관의 전시물을 통해
지중해에서 아라비아, 인도를 거쳐 중국, 한반도 신라와 백제까지 연결된 바닷길,
해상 실크로드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인 당나라 난파선의 발견은
장거리 육로 여행보다 바닷길을 이용하는 것이 화물 무역과 문명의 교역에 더 용이하고
9세기 아시아는 당나라 치하의 중국과 중동의 아바스 왕조 칼리프 왕국(이라크 바그다드)에
의해 지배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당시 아시아의 시대적 상황과 문명의 역동적 교역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9세기 아시아와 중동을 잇는 해양 실크로드에 대한 지식이 쌓이자
중세시대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앞다투어 경쟁을 펼쳤던 대항해시대의 해상 항로가 궁금해졌다.
다행스럽게 박물관 출구 쪽에 전시되어 있는 16 ~ 19세기 글로벌 무역 네트워크를 알려주는 지도를 발견했다.
당시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과 네덜란드는 향신료 무역과 신대륙의 금 은 확보를 위해
각자의 해상 항로를 개척했다.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경유 인도에 도달하는 항로를 개척함으로써 향신료 무역을 독점했고
스페인은 1492년 콜럼버스가 서쪽을 향해 아메리카에 도달하여 무역루트를 개척했다.
멕시코 아카폴로와 필리핀 마닐라를 있는 태평양 항로를 개척한 스페인은
필리핀을 식민지화하여 400여 년 동안이나 스페인 속박 속에서 살게 했다.
지난날 여행 중 리마와 푸스코 등 남미의 여러 도시에서 스페인풍의 대성당과 광장을 보았고
중미 아이티에서 콜럼버스의 동상을 보았다.
유럽의 대항해시대는 파편화되어 있던 여러 대륙들을 하나의 세계로 연결시키는 기여를 하였지만
유럽국가들이 식민지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원주민의 문명이 파괴되었고 노예무역이라는 비극적 역사를 잉태시켰다.
남미를 점령한 유럽국가는 커피 등 향신료 생산 인력확보를 위해
아프리카계 흑인을 납치하고 이동시키는 과정에서 천만명이 넘는 인명을 살상했다.
그 반인륜적 악행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유럽이 대항해시대를 열 수 있었던 것은
바람과 해류를 이해하는 '볼타 두 마르' 기술이 발달하여 단순히 해안에 따라가는 것이 아닌 대양을 가로지르는 항해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중국계를 비롯한 말레시안인, 말레이, 인도 등 다인종이 살고 있는
싱가포르는 현재에도 저출산 고령화에 대응하기 위해 외국인 투자자를 찾고
지속가능한 미래 경제 성장을 위해 전문인력을 유치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문호를 개방하고 있다.
다인종 다문화로 혼합된 싱가포르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싱가포르 아시아 문명 박물관을 찾아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