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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나리 Mar 31. 2023

하찮음을 견디는 봄날

- 누구나 시작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슬님께,


안녕하세요 슬님, 봄입니다. 불과 몇년전까지만 해도 길가에 핀 꽃에 감탄하는 누군가를 보며 '봄에 꽃이 피는게 저렇게 신기할 일인가?' 시크한 체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저는 죽은것 마냥 앙상했던 나무가지에서 연두빛 보드라운 새순이 나고 조그맣게 오므렸던 봉오리가 팝콘터지듯 꽃을 피우는 이 계절을 매일 감탄하며 맞습니다. 그리고 혼자만 이 자연과 생명의 놀라움을 누리기엔 아쉬우니 아이들에게 말해요. 나무의 새잎을 보라고, 개나리와 목련을 보라고, 자연의 변화가 신기하지않냐고, 이 기쁨을 함께 누리자고. 아이들은 놀랍지 않게도 전혀 반응이 없지요. 아, 저는 이제 영락없는 중년인가 싶습니다.


슬님의 편지에서 소개해준 음악을 한곡한곡 들어보았습니다.「The Astronaut」은 과연 우리가 좋아할만한 바이브를 가진 곡이었습니다. 우리의 아이들과 우리가 세대를 넘어 그 곡을 함께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BTS가 정말 대단한 뮤지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BTS의 멤버 구성과 한명한명의 이름을 저도 최근에야 "학습"했습니다. 언젠가 BTS가 세계적으로 엄청난 팬덤을 확보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서치 해본적이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그 이유로 꼽은 건, 그들이 아무것도 아니었던 아주 처음부터 끊임없이 노력하고 조금씩 발전을 거듭해서 세계적인 뮤지션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벽돌을 한장한장 쌓아올려 집을 만드는 것과 같이 포기하지않고 차곡차곡 시간을 쌓아올리는것, 이것이 기본이자 가장 중요한 인생의 태도라는 걸 저는 어리석게도 최근에야 깨달았습니다.


새로운 기타 강습을 시작했다는 이야기 했었나요? 십대 소녀시절 좋아하던 성당 오빠의 연주를 들으면서부터 사랑이 시작되어 마흔이 된 지금까지도 해결하지 못한 숙제같은 존재인 기타연주. 20년이 넘게 꾸준히 했다면 진작 저는 기타 강사가 되고도 남았을 겁니다. 그래도 어쨌든 포기하지 않고 - 그러고보니 저는 왜 기타연주를 결코 포기하지는 않는걸까요! - 기타강습을 받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친한 선배가 그러는 거에요. "기타란 게 참 그래. 연습은 안하고 싶은데 잘치고는 싶거든."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비단 기타 뿐만이 아니라 내 인생 전반의 태도가 저래왔다고. 기타 연습을 안해도 기타를 잘치고 싶고, 운동은 안하지만 근육 탄탄한 몸매를 갖고싶고, 공부 안해도 시험은 잘보고싶고, 일은 많이 하지않고 일잘러로 평가받고, 돈을 많이 벌기위해 남들보다 노력하지 않지만 부자는 되고싶은.... 인생 전체가 그저 공짜만 바래왔더군요. 머리를 크게 한대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살면서 꽤 많은 외부적 성취들을 이뤄왔습니다. 회사에 입사한 것부터 크고작은 프로젝트들을 마무리했고, 진급도 했고, 돈을 모아 차와 집을 샀습니다. 그런데 그 성취들을 오롯이 기쁜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내가 그 모든 순간에 내가 들인 노력보다 큰 요행과 운을 바랬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을 저는 그저 '운이 좋았다' 라고 밖에 말할 수 없었어요. 헐겁게 쌓여있던 벽돌이 쉽게 무너지는 것처럼 회사에서 겪는 어려움들이 저에게 더 크게 다가왔던 것 같아요. 당연한 거겠죠. 제가 슬님에게 말했던 '작고 이상한 성취'가 필요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습니다. 크고 멋지지 않아도 나의 손으로 직접 쌓아올려 만들어낸 성취를 맛보고 싶었던거에요. 더불어 그 과정이 즐거운 덕분에 결국 이루어낸 것이 너무 작더라도 '재미있었으니 되었어!' 라고 할 수 있는 그런게 저에게 필요했던 겁니다. 저는 요즘 하찮음을 견디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기타 스트링에서 나는 쇳소리를, 헬스장에서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스쿼트를 하는 모습을, 짧은 글을 쓰기위해 며칠씩 고민하는 나를 견딥니다. 이런 시간들이 쌓여서 훗날 저는 무엇이 되어 있을지 궁금합니다. (마흔에도 커서 뭐가 될지 고민하는 어른이라니요.)


‘봄의 멜로디’ 라는 컬렉션 테마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책은 제가 좋아해 마지않는 단편집인 김연수 작가의 ’사월의 미, 칠월의 솔’ 이었습니다. 슬님의 서가에도 꽂혀있는걸 보았지요. 책등만 봐도 마음이 저릿해 올만큼 이책은 저에게 특별한 아름다움입니다.

“서귀포시 정방동 136-2번지에서 바다 보면서 3개월을 살았어. 함석지붕집이었는데, 빗소리가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우리가 살림을 차린 사월에는 미 정도였는데 점점 높아지더니 칠월이 되니까 솔까지 올라가더라.” <사월의 미, 칠월의 솔>, 김연수

미래가 없는 젊은 연인이 제주에서 3개월을 지냈던 함석지붕집. 그곳에서 듣던 빗소리가 사월에는 미 였다가 칠월에는 솔이 되더라라는 표현을 할 수 있는 작가가 있어서, 내가 그 아름다음을 느낄 수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난 후 빗소리를 들을때마다 이건 어떤 음일까 생각해보곤 합니다.


또 하나 소개하고 싶은 책은 도쿄다반사의 <Tokyo Diggin‘(도쿄디깅)> 입니다.  도쿄의 다양한 거리 산책기록과 함께 각 스팟에 어울리는 뮤직 플레이리스트를 제공하는 특별한 가이드북입니다. 저는 유튜브를 통해 도쿄디깅 플레이리스트를 먼저 접하고 자연스레 책도 알게되었는데요. 큐레이션된 각각의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이 따뜻한 봄날 도쿄의 분주한 거리를, 꽃이 핀 공원을, 아기자기한 골목을 거니는 상상을 합니다. 도쿄를 여행한다면 이 책과 플레이리스트를 꼭 챙기리라 다짐해봅니다. 어떤 음악을 들으면 과거의 어느 시공간으로 순간이동하는 경험을 해보셨을겁니다.언젠가 지금 듣고 있는 이 음악을 들으면 경의선 숲길의 벚나무가 보이는 까페 창가에 앉아 글을 쓰며 도쿄디깅의 “우에노 공원 플레이리스트”를 듣고 있는 나를 떠올리게 되려나요.


사람들이 봄꽃을 보며 감탄하는것은 잎이 다 떨어진 앙상한 가지로 겨울을 견디고 기어이 새잎과 꽃을 틔워내기 때문이 아닐까요? 저도 저의 하찮음을 견디고 조금이라도 나은 내가 되기위해 하루하루 보내고 있겠습니다.


봄이 너무 서둘러 가버리지 않길 바라며,

미나리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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