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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나리 Jun 30. 2023

우연을 쫓아 떠나는 여행

'될 일은 되고 안될 일은 안될 것'

안녕하세요 슬님,


오늘입니다. 아이들과 배낭여행을 떠나는 그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역시 여행은 이래야 제맛" 이라고 메아리처럼 들리듯 여행준비의 막판은 혼돈과 위기의 연속이었습니다. 제 무릎이 갑자기 말썽을 부려 그 무거운 배낭을 맨 채 50일 가까운 날들을 길위에 설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던 날들과 아이의 독감 확진으로 비행일정을 바꾸든 아이를 두고 떠나든 결정을 해야할 것 같았던 순간들을 겨우겨우 넘기고 오늘 떠납니다. "아이들과 배낭여행을 하기로 했다"는 제 결심을 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왜?" 라고 가장 먼저 물었습니다. 어떤날은 '그냥, 애들 방학이니까' 라고 했다가 또 어느날은 '휴직기간에만 할 수 있는 일이잖아' 라고 대답했어요.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저 스스로도 계속 질문해봤어요. 여행을 가는 진짜 이유를요.


"멕시코 어부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나요? 한 미국인 경영자가 휴가를 떠나 멕시코의 작은 바닷가에서 한가로이 낚시를 하는 어부를 만납니다. 짧은시간 자신이 필요한 만큼의 고기를 잡고 나머지 시간을 친구와 가족과 보낸다는 어부에게 미국인이 조언하죠. "더 많은 시간을 일해 번 돈으로 보트를 사요. 보트를 사면 고기를 더 많이 잡을 수 있을테고 더 큰 돈을 벌수 있어요. 그리고 나중에는 잡은 고기를 가공할 수 있는 공장도 갖게 될테고 아주 부자가 될 수 있어요" 어부가 묻습니다. "그 다음에는요?" 미국인이 대답합니다. "그러면 은퇴를 하고 벌어둔 돈으로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와 시간을 보내고 한가로이 바다에서 낚시를 즐기며 여생을 살 수 있어요" 팟캐스트를 진행하는 김하나, 황선우 작가가 이 이야기를 해주며 '자신이 돈이 아주 많으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라고 했어요. "돈과 시간이 아주 많은 부자가 되면 장기 여행자가 되겠다."가 나의 대답이라는걸 그때 알게 되었어요. 그것이 나의 오랜 꿈이었다는것도 깨달았어요. 그러니까 이 배낭여행은 더이상 행복을 유예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 부자가 되는 선택을 하는 겁니다.


회사라는 곳은 슬님의 말대로 늘 더 큰것, 더 많은것을 하기를 바랍니다. 끝이 없지요. 나나 슬님과 같이 체제 순응적인 사람의 경우 그런 시스템에 더 쉽게 동화되고 심지어 자기 자신을 계속 검열합니다. '나 제대로 하고 있나?' '더 잘해야 하는거 아닐까?' 하고요. 그것이 자신을 망치는 길이라는걸 알면서도 멈출수가 없었어요. 지금와 생각해보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잖아' 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만큼 감정이입이 된 상태였다고 생각해요. 회사의 기대에 늘 조금은 모자라다 느껴졌고(당연하잖아요? 기대가 너무 높을뿐 아니라 끝이 없었으니) 항상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는 나 자신이 싫었어요.(이것도 당연합니다. 전쟁터에는 항상 적군이 존재하기 마련) 슬님의 지난번 편지와 최근에 쓴 글을 읽으며 마치 내 이야기인듯 마음이 저릿저릿하기까지 했습니다. 슬님이 어떤 기분인지 너무 잘 알 것 같았거든요.


하지만 답은 없지요. 저도 다시 일을 시작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쭈구리 회사원 모드'가 세팅되겠죠. 하지만 일, 회사와 적절히 담백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이 한 문장만은 반드시 기억하고 싶어요.

세상에 나를 망칠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김신지)

물론 내가 회사에서 괴로움에 가득차 있을때 많은 이들이 비슷한 조언을 했지만 전혀 들리지 않았었음을 고백합니다. 하찮은 나 하나쯤 갈아 없어져도 내가 맡고 있는 일이 잘되었으면 하고 바랐던, 지금와 생각하면 어이없어 코웃음이 나는 시간들이었어요. 회사안에 있으면 쉽게 그렇게 되기 마련인 것 같아요.


우리는 여행을 왜 좋아할까요? 여행의 끝에 뭘 얻기에 늘 그것을 그리워 하는 걸까요? 생각해보니 여행은 무엇을 특별히 잘 할수도 못 할수도 없게 통제할 수 없는 상황들의 연속. 그것을 통해서 "될 일은 되고, 안될 일은 안될 것" 이라는 깨달음을 얻는 과정인 것 같아요. 편지 서두에 말했듯이 이번 여행도 준비과정에서부터  여러 위기를 거치며 진하게 배웠습니다. 그러고 보면 모든 여행은 그저 우연을 쫓아 떠나는 것일테지요. 여행에서의 배움을 토대로 회사일에서도 저런 태도를 유지 해보도록 합시다. 내가 무언가를 엄청나게 잘 할수 없는 사람인 건 쉽게 인정하고 자책하면서 반대로 나 하나가 무언가를 온전히 망쳐놓을 수도 없다는건 모른채 전전긍긍하지 말자고요. 슬님이 하는 프로젝트도 잘 될 일이라면 잘 될 것이고, 안될 일이라면 그건 슬님이 아닌 누군가가 해도 안될 일입니다.


여행을 떠나며 뮈르달 여름 컬렉션을 소개하고 갈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계절이라 특히나 더 테마를 고심하던 중에 제주에서 만난 반딧불이 반짝이던 신비로운 여름밤이 떠올랐어요. 여름에는 너무 뜨거운 한낮보다는 해질녘부터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 아닐까요?


'23. Summer 뮈르달 컬렉션 <여름 밤> 책 리스트

 

- 밝은밤, 최은영 (소설)

-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에세이)

- 평온한 날, 김보희 (그림에세이)

- 언젠가 이밤도 노래가 되겠지, 옥상달빛 (에세이)

- 긴긴밤, 루리 (동화)

- 밤의 숲에서, 임효영 (그림책)


슬님, 사랑하는 사람들과 부지런히 밤산책 하는 여름을 보내길 바래요. 나도 아이들도 건강히 여행 잘 다녀오겠습니다. 우리는 가을의 시작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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