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졸리고 엄마는 설레는 여행의 첫날
드디어 여행을 떠나는 날이 되었다. 여행을 코앞에 두고 아이가 독감에 걸리고 내 무릎이 말썽을 부리는 탓에 비행 일정을 조정해야 하는것 아닌가 하는 위기의 순간들을 어찌저찌 넘기고 드디어 인천공항이다. 배낭을 며칠째 수십번을 쌌다 풀었지만 어깨에 메고 나란히 서있는 사진을 찍어두니 어색하기 짝이없다. 이런 어설픈 배낭여행자의 단 한가지 목표는 "아프거나 다치지 말고 건강히만 다녀오자"는 것.
D-day (7.1) 인천에서 페낭으로.
'가난한 여행자라면 에어아시아 아닌가?!' 하며 호기롭게 가장 싸고 싸기때문에 불편을 감내해야 하는 에어아시아 티켓을 끊었다. 충분히 각오했다 생각했지만 밤12시에 시작된 비행은 만만치 않은 여정이었다. 게다가 쿠알라룸푸르 공항에 새벽 여섯시에 내려 네시간을 대기했는데 긴장속에서 졸리고 피곤한 아이들의 투정과 짜증을 받아내며 '아, 이 아이들을 데리고 한달동안 여행을 한다고?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거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더랬지.
쿠알라룸푸르에서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오후 한시가 넘어 페낭 조지타운의 호텔에 도착했다. 다행히 호텔이 기대했던 것 보다 훨씬 좋았는지 복층인 호텔을 뛰어다니며 아이들은 신이났다. 이 호텔이 여행기간중 다닌 모든 숙소를 통틀어 가장 비쌌고 가장 호화로웠는데(꼬마들은 미처 몰랐겠지만) 장기여행엔 숙소 선택에도 강약을 주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그래도 아이들이 여행의 시작부터 걱정과 실망보단 행복회로를 돌릴 수 있어 다행이다 생각하며 꿀같은 휴식을 보냈다.
페낭은 말레이시아 서쪽 해안의 작은 섬으로 덥고 습해서 조금만 걸어도 그야말로 땀이 줄줄 흘렀다. 이국적인 향취에 젖어있는 엄마와 달리 아이들은 5분 걸은 뒤 "엄마, 어디까지 왔어?" 묻고 5분 더 걸은 뒤에 "엄마, 어디 시원한데 없어?" 를 찾았다. 이런 아이들을 데리고 거리의 야장에서 사떼(꼬치) 를 먹겠다고 결심한 것 부터가 잘못이었을까. 해질무렵 거니 드라이브 호커센터에(스트릿 푸드 마켓) 갔다. 테이블을 잡고 손부채질을 하며 앉아 갓 구워진 사떼와 그나마 시원한 맥주와 콜라를 시켜 먹는데 무슨 맛인지 전혀 알수가 없다. 어른인 나도 그저 숨막히게 덥다는 생각 뿐인데 아이들은 오죽할까. "엄마, 택시타고 호텔에 다시 가면 안돼??" 조르기 시작했다. 그래, 이 아이들이랑 야시장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그야말로 꿈을 꿨었네 내가.
계획을 바꿔 맥도널드에 가기로 했다. 쇼핑몰 문을 열고 들어서자 천장에서 얼음같이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훅 불었다. 바깥의 더위 따윈 이제 잊고 즐기라는 듯이. 그 순간 우리 셋은 "우와아아아아!!!" 하고 동시에 소리를 지르고 깔깔 웃었다. 긴장과 더위, 피곤이 순간 불어운 에어컨 바람에 스르륵 녹아 없어진 느낌이랄까. 나에겐 동시에 소리를 지르고 같이 깔깔 웃었던 그 짧았던 순간이 잊지못할 기억으로 남았다. 설명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나와 아이들이 똑같은 기분을 느끼게 되는 어떤 순간들이 여행중에 종종 있었는데 그때가 정말 반짝였다.
동남아 여행을 내가 좋아하는 이유중에 하나는 '힘빼기'에 있다. 골목골목 역사적인 건축물이 즐비하거나 세계적인 걸작이 줄줄이 걸린 미술관이 몇개씩 있는 유럽의 유명도시였다면 여행중 힘을 빼기가 훨씬 힘들었겠지만 동남아의 경우 대부분 그저 예쁜 골목을 걷고 소박한 사원에 가고 잘 웃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으로 충분하다 생각되는 그런 여행을 한다. 그런데 아이들과의 여행은 내 기대보다 훨씬 더 힘을 빼야만 하는 행위였다. 여행의 설렘은 엄마만의 몫인 듯 아이들은 그저 쉽게 지칠 뿐이었다.
이튿날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다문화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건축물과 벽화가 유명한 조지타운 이곳저곳을 걸으며 관광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이른 아침부터 나서서 걸었으나 이국적인 바닥타일이나 거리에 핀 꽃에도 쉽게 감동하는 엄마와 달리 아이들은 전혀 관심이 없고 그저 걷는 것이 피곤할 뿐이다. 게다가 뜨거운 낮시간은 더 문제였다. 이때 아이들과 거리를 걷다가는 지치다 못해 어느새 귀국행 티켓을 검색하고 있을지도 모를일, 시원한 영화관에 가기로 했다.
그날 영화관에서 우리가 본 영화는 '엘리멘탈' 이었다. 한국어 더빙이 아닌 영화를 게다가 '자막없이' 보는 건 처음이었는데도 아이들은 너무 신이나 했다. 비록 낮잠을 잔다 하더라도 시원한 영화관에서 쉬면 남는 장사라고 생각하고 큰 기대없이 갔는데(작은 아이는 영화 시작과 함께 잠들어 어쨌든 손해보지 않는 장사를 했고) 큰 아이는 두시간을 꼬박 집중하며 영화를 보더니 아직까지 이것을 인생영화라고 꼽고 있다. 영화를 보고 충전된 체력으로 계획한 오후 일정은 해안가의 수상가옥 마을 "츄제티"였다.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자리잡은 작은 집들은 오래전엔 바다에 생업을 둔 이들의 터였겠으나 지금은 관광객을 대상으로 기념품 등을 파는 작은 상점과 까페, 식당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골목을 따라 끝까지 걸으니 바다와 하늘이 근사하게 펼쳐졌다. 아이들과 이 먼 곳에 와서 멋진 풍경을 함께 보고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며 여유를 부릴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만큼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