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환기시키는 수많은 감정 중 가장 선호하는 것을 하나만 꼽으라면, 그리움을 첫 순위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종종 생각했습니다. 글이 주는 평온과 위안도 좋았지만, 과거에 대한 향수가 불러일으키는 힘은 어마어마해서 며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책과 책이 불러낸 기억 사이에 파묻혀 있곤 했거든요. 떠올리기만 해도 미소가 지어지는 추억은 그것 자체로 좋았고, 죽을 것 같이 힘들었던 일들은 나와 같은 일을 겪는 책 속의 인물들이 치유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떠오른 기억들을 되짚다 보면 결국엔 책이 파헤친 기억들 전부를 그리워하게 되었어요.
<<복자에게>>가 끄집어낸 기억은 조금 달랐습니다. 스쳐간 어떤 사건 하나가 떠오른 것이 아니라 영초롱과 복자가 만난 열셋 즈음의 저의 기억이 거의 통째로 떠올랐어요.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기억이 나는 대로 열심히 생각들을 뒤지다 보니 조그맣던 시절에 모르는 것도, 아는 것도 참 많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참을 생각하다 나는 죽을 때까지 모두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을 수도, 모두에게 나쁜 짓을 할 수도 없는 존재라는 아주 뻔하고 고리타분한 결론을 내렸는데요. 평소와는 달리 그게 참 어쩔 수 없이 느껴졌습니다. '모두가 나를 좋아할 수 없어'라는 말은 그러고 싶지 않아도 관계에 조바심을 내버리고 마는 저 스스로를 안심시키는 주문일뿐이었는데, <<복자에게>>를 읽고 누운 그날 밤엔 어쩔 수 없는 일들과 어쩔 수 없는 관계 맺음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고, 그건 참 어쩔 수 없는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순간만큼은 '힘내, 괜찮아, 다 잘 될 거야'하는 그 어떤 위로를 들었던 순간보다 마음이 편했습니다.
제주를 바탕으로 한 에세이나 소설이 쏟아지는 시기인 것 같습니다. 책을, 특히나 소설을 너무나 좋아하는 저에게는 정말 다행스럽게도 배우자가 제주에서 일을 하고 있어 한 달에 한 번쯤 짧게는 사흘에서 길게는 일주일 정도를 제주에서 지내는 호사를 누리곤 하는데요. 마침 <<복자에게>>도 제주에서 머물며 읽을 수 있어 책 읽기 좋은 카페를 찾아다니며 읽었습니다. 그중 '잔물결'과 '여섯 번의 보름'을 추천해드리고 싶어요.
'잔물결'은 제주시 바닷가에, '여섯 번의 보름'은 서귀포시 산 끝자락에 위치해 있습니다. '잔물결'은 차분하고 그윽한, '여섯 번의 보름'은 정갈하고 보드라운 톤입니다. 언뜻 다른 점이 많아 보이는 두 카페지만 책 읽기 좋은 테이블과 의자가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곡도 나쁘지 않습니다. 예쁘고 독특한 카페가 많기로 소문난 제주이지만 책 읽기 좋은 카페는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에 책을 들고 제주도로 떠나시는 분들이 있다면 이 두 곳을 꼭 추천드리고 싶었어요. (예쁘지만 영 불편한 가구에 앉아, 디즈니 만화 영화 OST를 편곡한 연주곡을 들으며 책을 읽었던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두 곳 모두 이미 굉장히 유명하기 때문에 성수기나 주말에는 꽤 붐빌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차분히 침잠하며 읽고 싶은 책이 있으시다면 '토템 오어'를 추천합니다. 이 곳도 근래 많은 관심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요.
처음으로 책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글을 마치려고 합니다.
복자는 그런 제순의 눈썹이 일종의 농담 같은 거라고 했다. 그리고 농담은 우리에게 일종의 양말 같은 것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우리의 보잘것없고 시시한 날들을 감추고 보온하는 포슬포슬한 것. 농담을 잘하는 사람들을 곁에 두면 하루가 활기차다고도 했다. (p.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