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이내 기록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내 Oct 14. 2020

INFP와 ESTJ가 싸우지 않고 여행하는 법

'그런 인간이구나'의 무한한 힘

이미 한물 간 화두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MBTI 말이에요. 사람의 성격을 어떻게 열여섯 가지로 나누겠어, 의미 없어,라고 말하는 ESTJ가 제 남편이고, 그런 남편에게 '그래도 우리 성격이 완전 딴판인 게 한눈에 딱 보이니까 신기하지 않아?' 굴하지 않고 계속 이야기하는 게 INFP인 제 모습입니다. 저도 신기해요. 성격 유형 검사의 반을 딱 나누어 가졌을 정도로 다른 사람 둘이, 어떻게 싸우지 않고 이토록 무난히 살아가고 있는 건지요.


남편과 저의 궁합은 '파국'입니다


잊고 있던 MBTI가 떠오른 건 어느 주말 남편과 뒹굴거리며 '여행 가고 싶다~' 노래를 부르던 때였어요. 상당 부분 정반대에 가까운 성격과는 다르게 여행을 좋아하는 것 하나는 같아서 연애할 때부터 해마다 한 번은 장거리, 한 번은 단거리 해외여행을 떠났었는데 올해는 예정되었던 여행도 전부 취소하고 집에만 있으려니 영 아쉽더라고요. 상황이 좀 나아지면 어디부터 갈까, 한참 행복한 상상  제가 '시칠리아에 가고 싶어!' 하 남편은 '거기 뭐가 있는데?' 하고 물었고, '몰라? 날씨가 좋을 것 같아' 하고 대답했더니 금방 검색을 마친 남편이 '거기는 해산물이 주 식재료라 우리가 먹을만한 게 별로 없을 것 같은데' 하고 했습니다. 그 이후로도 저는 '북유럽!', '아일랜드는 어때?' 하고 생각나는 대로 지명을 뱉었고 남편은 제가 말한 곳들을 유튜브와 네이버에 검색해 가볼만한지 따져보고 있더라고요. 순간 마음이 가는 곳으로 발을 보냈다가 된통 고생하곤 했던 남편을 만나기 전의 여행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났습니다. 뒤이어 안정적인 계획을 기반으로 별다른 변수 없이 수월하고 순탄하즐길 수 있었던 남편과의 여행들이 떠올랐어요. 아하, 그랬구나. 그때 깨달았습니다. 둘 다 여행을 좋아하니까 뭐 하나는 비슷하네, 했던 부분에도 사실은 다른 점이 있었던 겁니다.


저는 대충 세운 계획도 제대로 지키지 않고 하고픈 대로, 아무렇게나, 뭐든 내가 하면  좋아, 식의 여행을 하는 편입니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P형의 계획법과 비슷하면서도, 살짝 디테일합니다. 일단 가고픈 곳들, 먹고픈 것들을 체크하고 구역 별로 묶어요. 그런 뒤 좋아, 완벽한 계획이군, 하고 마무리하면 계획은 거기서 끝입니다. 이렇게 준비하고 떠난 여행에서는 항상 고난을 마주쳤습니다. 지금이야 어디서나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고 공항에 내려서 숙소 가는 법을 구글링 해도 전혀 문제 되지 않지만, 10년 전쯤 처음 혼자 파리에 도착했을 땐 달랐어요. 어느 지하철 역에 내려서 찾아가면 되겠다 정도만 알고 간 첫 배낭여행의 시작은 멘붕 그 자체였니다. 대충.. 이 구역에.. 여기 근처에 한국인이 하는 민박집이었는데.. 아. 큰일 났다. 첫 숙소부터 못 찾을 수도 있겠다. 나는 왜 이렇게 중요한 걸 제대로 안 알아봤지. 자괴감에 빠져 있는 저를 구한 건 멋진 코트를 입고 슈트 케이스를 든 프랑스 신사였습니다. 출근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자기가 아는 근처 한식당에 저를 데려다주었고, 너무나 다행히도 제가 묵을 민박집을 알고 계시는 사장님께서 저를 도와주셨습니다. 나름 큰일을 겪었는데, 그 날 저는 '뭐, 못 찾았으면 근처 아무 호텔이나 들어가서 자면 됐을 거야. 혼자 하는 유럽 여행 첫날인데, 너무 긴장하지 말자'라고 생각하며 잠들었습니다. 무슨 배짱이었을까요.


남편도 자기는 계획 같은 건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편이라고 주장합니다. 글쎄요. 제가 보기엔 릅니다. 저희 부부의 여행은 대부분 제가 고 싶은 곳에 가거나, 제가 갔던 곳 중 좋았던 곳을 다시 찾는 편이라 (좋았던 도시를 또 가는 걸 너무 사랑합니다. 파리는 네 번을 갔어요.) 제가 주도를 하고 남편이 저의 계획 아닌 계획을 따라다니는 편이지만, 딱 한 번 남편이 계획을 세우고 제가 따라다녔던 적이 있어요. 작년 초, 상하이로 떠난 짧은 여행이 드문 그 케이스였습니다. 생각 없이 졸졸졸, 남편을 따라다니며 여기저기를 구경하고, 이것저것을 먹으며 좀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비는 시간이 없더라고요. 원래 여행이란 '아, 이제 뭐하지?' 하는 고민으로 이루어진 것 아니었나요? 구글 지도를 켜고 주변에 뭐가 있나 검색해보지 않아도 되는 여행은 처음이었습니다. 와이탄에서 동방명주로, 근처의 맛집으로, 그런 뒤엔 소화를 위해 산책 코스로 쉼 없이 움직였습니다. 오늘 먹을 메뉴를 오늘 정하지 않는 것도 처음이었어요. 남편의 꼼꼼한 계획을 따라가며 '오늘은 딤섬 느낌이 아닌데' 하는 말은 마음속에만 묻어두었습니다. 그래도 즐거웠어요. 많은 고민이 필요하지 않은 여행이 익숙하진 않았지만요.


이렇게 다른 두 사람이 싸우지 않고 여행할 수 있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그리고 몇 가지 일화들이 떠올랐어요. 어느 해 동유럽 여행을 계획하며, 뼛속 깊이 F형인 저는 저보다 25cm나 더 큰 남편의 긴 다리가 겪을 불편함을 깊이 공감해 그나마 레그룸이 좀 넓은, 칸막이 바로 앞자리를 추가금까지 지불하며 미리 지정했습니다. 그 날부터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그거 좀 신경을 썼다고 있는 생색 없는 생색을 다 냈어요. 비행기에 타서 자리로 걸어가면서까지 '잘 봐, 내가 여보를 위해서 얼마나 좋은 자리를 예약했는지, 용돈으로 추가금도 냈어' 하면서 뿌듯해하고 있었는데, 웬걸요. 자리를 확인하니 제가 예약했다고 생각한 자리의 바로 뒷자리더군요. 어째서였을까요. 분명히 Seat guru 사이트에서 확인하고 예약한 건데. 왜. 왜! 망연자실한 저와는 달리 남편은 크게 웃더니 티켓에 적힌 자리에 앉았습니다. 잔뜩 쪼그린 다리가 안쓰러웠어요. 창피해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연신 미안하다고 말하는 저에게 남편은 '괜찮아, 진짜 웃겼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한참을 웃은 남편은 장거리 비행에는 술이 최고라며 맥주 한 캔, 와인 작은 병을 털어놓고 잠드는 편을 택했습니다. 프라하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은 남편에게 정말 미안하다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여행하겠다고 말했을 땐 마음 써준 것만으로도 고맙다며 괜찮다고 오히려 저를 달래줬어요. 평생 놀려야지,라고 덧붙이긴 했지만요.



노란색 형광펜으로 표시한 자리가 제가 구매하고 싶었던 좌석이에요. 하지만 저의 실수로 빨간 형광펜으로 표시한 자리를 굳이 추가금을 내고 구매한 뒤 10시간의 비행을 견뎌야 했습니다


사실 동유럽으로의 그 여행을, 저는 꽤 열심히 준비했었어요. 제가 여행했던 코스를 그대로 남편과 함께 다시 찾는 것이라, 이전에 제가 경험했던 모든 좋은 것들을 남편도 함께 느꼈으면 했거든요. 게다가 남편은 제가 이전 여행에서 가보지 않았던 곳까지 다 다녀오고 싶다는 욕심을 내비쳤습니다. 혼자 했던 여행은 한 달이 조금 안 되는 기간으로 일정이 길었고 그만큼 시간이 넉넉했기 때문에 평소에 제가 했던 것처럼 아침에 눈을 뜬 뒤에야 그날 가볼 곳 리스트를 만들고, 그마저도 몇 군데 들른 뒤 남은 곳들은 다음 날로 또는 다음번 여행으로 미뤄도 상관없었어요. 하지만 남편과는 같은 코스를 짧은 시간 안에 모두 돌아야 한다는 생각에 걱정이 앞섰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남편과 좋은 추억을 많이 쌓고 싶다는 일념으로 난생처음 엑셀을 이용해서 여행 계획을 짰어요. 안 하던 짓을 하니 꼭 이래야 하나 귀찮고 지치기도 했지만, 이동 수단도 미리미리 예약하고 가게의 주소나 영업시간도 꼼꼼히 적어두었습니다. 여행을 하면서도 최대한 계획을 변경하지 않고 떠나오기 전 하고 싶었던 일들을 모두 해보기 위해 노력했어요. 결국 제가 3주가 넘게 머물며 경험했던 것들 중 대부분과 심지어 그 긴 기간 동안 해보지 않았던 것들까지, 일주일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편과 저는 정말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생했다고, 분에 너무 행복했다는 남편의 말엔 내심 뿌듯하기도 했어요.


남편과 여행하며 불만이 없었던 건 아니에요. 더 여유롭고 느긋하게 분위기를 즐기고, 풍경을 보고 그때그때 떠오르는 상념들에 대해서 철학적인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 저와는 달리 남편은 현지에서만 할 수 있는 것들을 즐기고, 대화를 하더라도 우리 두 사람이 처한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 토론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렇지만 저희는 다투지 않았어요. 남편은 저에 대해 '어째서 저 인간은 저렇게 칠칠치 못한가'하며 답답해하는 대신 '노을을 보고 나이 든 우리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낭만적인 사람이군' 하고 생각했고, 저는 남편을 '함께 본 풍경에 대해 생각을 나눌 줄도 모르는 무드 없는 실용주의자'로 여기지 않고 '뭐든지 믿고 맡길 수 있는 꼼꼼하고 듬직한 리더'로 인정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남편은 제가 낭만 타령을 하며 자주 발을 멈춰가며 찍은 사진으로 여행을 추억하고, 저는 분위기에는 도통 관심 없었지만 누구보다 정확히 상황을 기억하는 남편을 통해 여행의 기억을 떠올립니다. (이 글도 남편의 도움으로 쓰고 있어요.)


상대의 장점만 보는 것은 어렵습니다. 오래 만나면 만날 수록, 같이 산 시간이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더 그런 것 같아요.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라도 나와는 다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불편한 점이 생기기 마련이거든요. 그래서 '그 사람의 장점을 생각하세요'라는 조언의 힘은 금방 시들해는 것 같아요. 분명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그런 가운데 찾아낸 장점을 바라보며 사는 건 단점을 감내해야 하는 이유를 찾는 것 같아 부담스럽잖아요. 또,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말도 그다지 와닿지는 않아요. 사람이라면 먼저 자신의 편에 서서 생각하는 게 너무나 당연하니까요. 저희 부부도 마찬가지예요. 유연하게 사고하는 제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정직하고 단순한 남편의 생각이 고루하고 답답할 것이고, 어려운 일도 맞서 싸우면 헤쳐나갈 수 있다고 믿는 남편이 볼 때는 피할 수 있는 일은 일단 피하고 보는 제가 유약하고 바보 같아 보이겠죠. 그럼에도 저희가 크게 다투지 않고, 자주 마음 상하지 않고 지낼 수 있는 것은 용인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용인은 남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굳이 좋은 점을 찾아보는 것과도 달라요. 용인은 그냥, 받아들이는 거예요. 죽었다 깨어나도 다른 사람이 되어 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런 사람이 있구나, 인정해버리는 건 생각보다 쉽습니다. 제가 덤벙대는 건 사실이에요. 남편도 그 사실을 압니다. 하지만 상대가 그런 단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골몰하지 않아요. 그냥 '내 아내는 조금 부주의한 면이 있구나'라고 생각해버리고 맙니다. 장점을 볼 때도 마찬가지예요. '내 아내는 섬세하구나.' 끝이에요. 그게 단점이기도 하고 장점이기도 하다는 생각까지도 발전시키지 않습니다. 그냥 그 사람에겐 그런 모습이 있다는 걸 인정해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남편은 감상을 나누기엔 적당한 사람이 아니구나' 하고 남편의 성격을 그냥 받아들입니다. 굳이 왜 그럴까, 그래도 다른 장점이 있으니까, 하는 생각으로 빠져들지 않아요. 그냥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걸 용인하고 나면, 서운하고 섭섭할 것도 없이 관용도 쉬워지더라고요.


제가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무작정 찾아간 식당이 리모델링을 하느라 영업을 하지 않아도, 남편은 그냥 웃고 근처의 다른 식당 평점을 확인합니다. 저는 오래도록 앉아있고 싶은 카페를 발견해 너무 기쁜데, 구글 지도를 켜고 주변을 탐색하던 남편의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걸 발견했을 땐 속으로 다음에 또 와야지 결심하고 조용히 짐을 정리해요. 이렇게 좋은 곳을 빨리 떠나고 싶어 하는 남편을 이해하는 것보다 그렇구나, 해버리는 게 간단하다는 생각과 함께요.


용인과 관용으로 즐거웠던 2019 동유럽 여행의 추억

저희 부부가 남들보다 특별히 잘 지내고 있다고 이야기하려는 건 아닙니다. 각각의 부부에게는 자신들만 알 수 있는 비밀스러운 행복과 믿음이 있다는 걸 잘 알아요. '나만 행복해'라고 말하고 싶은 것도, '내 결혼 생활이 가장 행복해'라고 자랑하고 싶은 것도 절대 아니에요. 그저 너무나 성격이 다른 두 사람이 다투지 않고 잘 살아갈 수 있는 데에는 이런 사고방식이 꽤 도움이 된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그냥 그렇구나, 생각하면서 살아가면 '파국'이라는 INFP와 ESTJ도 잘 지낼 수 있다는 이야기를요.

매거진의 이전글 그냥 해야 하는 일도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