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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내 Oct 08. 2020

그냥 해야 하는 일도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하세요, 즐기세요

아침 운동을 하고 출근하는 습관을 들인 건 3년 전쯤입니다. 평일 아침 다섯 시 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매일 알람이 울립니다. 가뿐하게 침대 밖으로 벗어날 수 있는 날도 있지만, 히끄므레한 정신과 함께 침대 속으로 쑤욱 빨려 들어가 버렸으면 싶은 날도 있습니다. 그래도 일단은 몸을 일으킵니다. 간단히 양치와 세수를 하고 전날 미리 싸 둔 짐을 챙겨 월요일과 수요일 금요일에는 수영장으로, 화요일 목요일에는 헬스장으로 걸음을 옮깁니다. 여섯 시, 운동을 시작합니다. 어딘가 고장 난 듯한 몸을 서서히 데우고 컨디션을 조금씩 끌어올립니다. 땀을 흘리고 나서 출근길에 오르면 여전히 남아있는 가기 싫은 마음에 오늘도 어쨌든 시작은 해냈다 하는 작은 성취감이 더해져 기분이 조금 나아집니다. 출근을 하지 않고 있는 요즘엔 여덟 시 반에 일어나는 게으른 생활을 하고 있지만 매일 아침 운동은 빼먹지 않고 있어요. 아침을 간단히 챙겨 먹고 아홉 시 반 필라테스 수업을 수강하며 갈비뼈를 하나하나 분리했다가 재조립하는 느낌으로 몸을 움직입니다. 평소에 즐겨하던 수영이나 헬스와는 좀 다른 결의 운동이라 배로 힘이 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부서진 것이 확실한 겉보기에는 멀쩡한 다리로 어찌어찌 걸어서 집에 도착한 뒤 빨래를 정리하고, 커피를 한 잔 내리고 나면 그제야 몸에 '옳은 짓'을 했다는 생각에 뿌듯해집니다. 고작 한 시간의 짧은 운동을 하고 온 주제에 완벽한 하루를 보낸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해요. 운동이 주는 효용은 아마 그런 것이겠지요.


친구들은 도대체 어떻게 아침에 운동을 하고 출근을 하냐고 묻습니다. 그럴 때면 항상 별 것 아닌데 생각보다 좋다고, 며칠만 해보면 저절로 된다고 답하곤 하는데 몇몇은 그런 저에게 '참 독하다'는 표현을 돌려줍니다. 그런데, 정말이에요. 귀찮음이나 피곤함과 며칠만 싸워 이기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그냥 눈만 뜬 것 같은데 어느샌가 화장실에서 양치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때부터는 아침에 운동을 가는 것이 '그렇게 하기로 했기 때문에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그냥 하는 일'이 됩니다. 독해서도, 헬스장 등록 비용이 아까워서도 아니라 그냥 아침마다 으레 하는 일이 되는 거지요.


얼마 전 인상적인 웹툰을 봤어요. 웹툰을 잘 보지 않는 편이라 커뮤니티 게시판에 누군가 갈무리해 올려둔 것을 뒤늦게 접하게 된 것인데, '무기력하고 우울하기만 한 내가 성취감을 가진다는 건 일생의 중요한 사건이었다'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이 게시글엔 댓글이 어마어마하게 달려 있었습니다. 홀린 듯이 제목을 클릭해 읽어 내려갔습니다.  제 마음대로 주제를 요약해 보자면 '그냥 하기' 정도가 될 것 같은데요. 우울하고 힘들고 지치는 날이 계속될수록, 어떤 일인가는 그냥 해야 된다는 겁니다. 웹툰의 작가 '현이씨'님은 바닥을 치던 컨디션을 그냥 운동을 하면서, 그냥 걸으면서, 그냥 일찍 자면서 끌어올리셨다고 했습니다. 비슷한 맥락으로 웹툰에도 인용된 김연아 선수의 말도 있죠.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 모든 일을, 이 말처럼 이유도 목적도 찾지 않고 그저 해버리는 게 우울함을 이겨내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겁니다.

'현이씨'의 웹툰에서 가져온 몇 컷입니다



돌이켜보면, 저도 '아무 생각 없이' 운동을 하게 되고 나서 차츰차츰 우울의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저는 우울증을 앓기 전에도, 우울증을 치료하는 과정 중에도 늘 규칙적으로 운동을 해왔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운동하는 뇌>>라는 책을 추천해 주시며 규칙적으로 생활하려고 해라, 유산소 운동을 해라, 어째라, 잔소리를 하셨기에 기분이나 몸 상태가 안 좋을 땐 하루에 3시간 가까이 과도한 운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우울을 떨쳐내야 해, 난 이겨낼 수 있어, 운동을 하고 나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 도파민이 분비될 거야, 같은 말을 되뇌면서요. 거의 매일을 그렇게 열심히 운동을 했는데도 별로 나아지는 건 없었습니다. 운동하고 난 뒤 잠깐은 몸이 개운하고, 뭔가 해낸 기분에 으쓱하긴 했지만 그게 끝이었어요. 노력을 했는데도 달리 차도가 없 아프기 전에도 꾸준히 해왔던 운동마저 때려치우고 싶라고요. 그래도 기는 해야  것 같아 아침에 딱 한 시간만, 눈 뜨자마자 운동하기로 마음을 바꾸어 먹었습니다. 그날부터 비몽사몽으로 수영장과 헬스장에 출근 도장을 찍었어요. 가기 싫다, 하기 싫다 생각할 틈도 없이 기계처럼 움직였습니다. 그렇게 한 두 달쯤 지났을까요? 가라앉았던 기분이 점차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아침 운동을 했으니까 출근을 했고, 출근을 했으니까 일을 했어요. 일을 했으니까 점심을 먹었고, 저녁이 되었으니 퇴근했습니다. 버거웠던 일상이 간단해졌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깨달았어요.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에 너무나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는 것을요.


한참 아팠을 매일 해야 하는 일들이 아무 의미가 없는 듯 보였고, 그럴 바엔 하기 싫었고, 그래서 무기력했습니다. 일어나 봤자 고통스러운 매일의 반복일 뿐인데 왜 눈을 떠야 하나, 입맛도 없는데 굳이 또 뭘 먹어야 하나, 잠이 들지 않는 것도 괴로워 죽겠는데 꼭 자겠다고 누워야 하나. 별의별 것에 다 의미를 붙이고 따졌어요. 운동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힘들어도 운동은 해야겠지, 규칙적으로 생활해야 하니까, 이따가 조금이라도 빨리 잠들기 위해서는 몸을 피로하게 만들어야겠지, 오만 생각을 하면서 운동을 하러 갔어요. 뭘 하려고 하든 머리가 복잡했습니다. 아침이 되었으니 일어나고, 늘 하던 대로 운동을 하고, 때가 되어 밥을 먹고, 어두워졌으니 자면 되는 일인데요.



'현이씨' 웹툰에서 가져온 몇 컷입니다


생각하고 노력해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그냥 하는 일들로 일상을 채우기. 태여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일상을 간단하게 만들기. '현씨'의 웹툰 한 구절처럼 '귀찮아하지도, 행복해하지도 않고 일상으로 받아 들'이고 나니 든 게 생각보다 쉬웠습니다. 하루하루를 채우는 게 탑이라도 쌓아 올리는 양 스트레스였던 날들이 뭐 한 것도 없는데 정신 차려 보니 벌써 10월이 된 날들이 되었어요. 흘러간 시간 동안 자랑스레 내보일 만 의미 있는 일을 해낸 건 아니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생각보다는 알차고 단단한 일상을 보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의미를 찾아 방황했던 시간들보다 훨씬 편안했던 것도 같고요.


저는 앞으로도 꾸준히 '그냥 하기'를 실천해 보려고 합니다. 아니 한 발 더 나아가, 이제 '그냥 하기'를 즐겨보려고요. 더 많은 일상의 의미를 '그냥'으로 대체해보려고 합니다. 그냥 운동을 했던 것처럼 그냥 밥을 먹고, 그냥 로션을 바르고, 그냥 친구들을 만나고, 그냥, 그냥. 대단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일을 대단할 것도 없이, 특별할 것도 없이, 그냥이요. 그러다 보면 진짜 의미 있게 간직해야 할 순간을 더 잘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 그런데 아무래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출근하는 것에는 실패한 것 같아요. 성공하신 분은 비결을 공유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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