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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내 Nov 12. 2020

사랑으로 글을 쓰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지침서

이슬아 작가의 <부지런한 사랑>

좋은 책은 꼭 이북으로 본다. 아직 책에 밑줄을 긋거나 메모를 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아직'이라는 말을 붙였지만 언제쯤 과감히 또는 아무렇지 않게 연필로 좋은 구절에 밑줄을 치고 짤막한 단상을 남길 수 있을지, 그런 날이 오기는 올지 전혀 감이 오지 않는다. 책을 무척 아껴보는 편이라 귀퉁이를 접어 어디까지 읽었는지 표시한 적도 없고, 읽다 만 책을 등이 벌어지게 엎어놓는 일도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에 이 성스럽고 소중한 물체에 연필로 자국을 낸다는 건 상상도 되지 않았다. 별 일 아닌 걸 알면서도 그냥, 안 됐다. 형편없는 감상을 적어두기엔 너무 귀한 성역 같기도 했고, 보드라운 종이 한 장 한 장이 상처 하나 나지 않게 지켜주고 싶은 아기 피부 같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북다트를 이용해 좋았던 구절을 표시해 뒀는데, 돌아가서 다시 읽어보니 내가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잘 떠오르지 않을 땐 SNS에서 애독가들, 북 튜버분이 책을 읽으며 귀퉁이에 슥슥 메모를 남기는 모습이 떠올라 부러워서 미칠 것만 같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죠. 그만큼 책과 친한 건가요. 나만 책을 너무 어려워하는 건가요? 책에 내 마음을 남길 용기가 없는 걸까요? 그런 상상만 해도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다고요..


바보 같아 보일 정도로 소심한 애서가였던 나는 이북 리더기라는 신문물을 만나고 날아갈 것 같았다. 전엔 감동을 주는 구절을 만나게 되면 휴대폰이나 가방에 있던 일반 노트를 주섬주섬 꺼내 내용을 옮겨 적고 그 아래에 감상을 몇 글자 간단히 적어두곤 했는데, 이북 리더기를 사용하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종이책 질감이 좋아 줄곧 종이책을 고집해 온 나였지만 처음 형광펜 기능으로 밑줄을 주욱 그어 본 날, 나는 바로 알았다. 이북을 모르던 시절로는 절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적응하기 힘들 것 같았던 이북 리더기는 꽤나 쓸만했다. 한 손으로는 책과 노트를 동시에 눌러 고정하고, 한 손으로는 연필을 쥐고서 책과 노트를 번갈아 보며 삐뚤빼뚤 메모를 남길 필요가 없었다. 여행 갈 때 읽고 싶은 책을 몇 권씩이나 바리바리 싸들고 다닐 필요도 없었다. 내 서가 앱에는 책과 형광펜으로 표시해둔 구절, 메모가 차곡차곡 쌓여 갔다. 아직도 종이책이 주는 낭만을 너무나 사랑하지만, 아쉬움을 느낄 때 많았다. 떠오른 생각을 바로 적어두고 싶은데, 그렇다고 읽던 책을 놓고 메모를 하자니 리듬이 깨지는 게 싫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이제 좋은 책을 만나면 무조건, 아니 가능하면 꼭 이북으로 사야겠다고.


대부분 서점에 가서 읽을거리들을 구하곤 한다. 매대와 서가를 돌아다니다 보면 제목만 읽어도 이 책은 진짜다 하는 느낌이 오는 책들이 있다. 그런 설렘을 마주치면 바로 휴대폰을 들어 이북 서점에 들어가 책 이름을 검색한다. 내 감각이 이거다, 외치는 책 중엔 이북으로 제작되지 않는 책들 많기 때문에 검색 결과가 나타날 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검색된 몇 권은 이북 장바구니에 넣고, 나오지 않는 것들은 바로 드림 장바구니에 넣는다. 몇 권의 책은 실물로, 몇 권의 책은 이북으로 품에 안고 나오며 기대한다. 오늘 고른 책 중 종이책이라 아쉬운 책이 많았으면 좋겠고, 이북으로 봐서 좋은 책이 많았으면 좋겠다.


이슬아 작가의 <부지런한 사랑>은 두 번째 기대를 넘치게 충족시켜줬다. 프롤로그부터 형광펜으로 칠해두고 싶은 문장 투성이었다. 어떻게 이런 문장들을 쓰는 거지? 글쓰기를 사랑하는 그녀가 글쓰기에 대해 쓴 글을 읽고 있으니 내 마음속에도 사랑이 차올랐다. 브런치에 첫 글을 게시하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던 기억, 알림창에 들어가 처음 눌린 라이크를 확인했던 순간, 더 부지런히 쓰자고 다짐했던 매일 저녁들이 뒤엉켜 바람처럼 불어왔다. 그 바람이 마음 바닥에 먼지처럼 가라앉아 있던 더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을 휘젓듯 일으켰다. 이토록 가슴이 뛰게 하는 글을 쓸 수 있을까. 안 될 것 같지만 하고 싶어. 나풀나풀 마음을 날아다니는 욕심들은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따로 글 쓰는 을 배운 적이 없었기에, 글쓰기 선생님으로서 그녀가 쓴 이 책의 모든 문장을 흡수하고 싶었다.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 묘사를 훈련'해야 하고 '재능에 무심한 채로 글을 쓸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써 나가야 하며 '어떤 행간은 비워둘수록 더욱 정확해진다'는 구절들에 형광펜을 그었다. 그녀의 감성적인 묘사에도 수없이 밑줄을 남겼다. 리더기엔 구현되지 않은 기능이지만 어떤 문장엔 마음속으로 두 번, 세 번 형광펜을 그으며 문장을 진하게 마음에 새겼다. 그녀의 문장을 읽으면, 그녀가 책을 위해 모은 모든 글감들을 사랑해 마지않는 게 티가 났다. 그 묘사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나는 그녀가 사랑하는 것들을 사랑하고 싶어 졌다.*


휴직을 하고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글감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쓰자니 부담스러웠고 남의 이야기만 빌어 말하자니 쓸 것이 없었다. 이런 것까지 쓰는 건 너무 바닥을 드러내 보이는 것 아닌가? 하지만 말하지 않으니 더 속으로, 더 깊숙한 곳으로 고 들어가며 너를 좀먹 것들로부터 해방되고 싶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던 거 아니야? 매일 두 마음이 노트북 앞에 앉아있는 나를 방치해둔 채 격렬하게 싸웠다. 나는 비겁하게 어느 한쪽이 우세해질 때마다 그 마음의 편을 들어 이야기를 썼다. 어떤 날은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얘기를 했고, 어떤 날은 내가 본 것에 대해서만 말했다.  날은 말하지 않으면 답답해 미칠 것만 같은 이야기를 쓰고 발행 대신 저장 버튼을 눌렀다. 나는 내 이야기를, 내 글감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슬아 작가는 욕심에 비해 부족한 재능에 절망하고 눈물짓는 대신 성실함과 꾸준함이 가지는 힘에 대해 쓴다. 사춘기를 지나는 제자들이 겪을 혼란스러움을 자의식의 축복과 저주라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이 자신의 몸을 아무래도 좋다고 느끼기를 소망한다. 제자들의 졸업식에 참석해 엉엉 우는 학생을 보며 슬픔을 완전히 누리는 배짱에 대해 말한다. 그녀가 인생에서 만난 모든 이와 모든 사건이 아름답지는 않았겠지만, 그녀는 그녀의 인생에 들어온 수많은 사람들과 사건들을 예쁜 글감으로 승화시켰다. 그것도 아주 다정하게. 너른 마음과 배포가 그녀가 가진 강력한 무기일 거라고, 몇 번을 생각했는지 모른다.


나는 평생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왔다. 중학생이 되면 오디션을 보고 싶다는 나에게 엄마는 '너보다 예쁘고, 잘하는 애들이 널렸어.'라고 말했다. 내 자존감을 갉아먹기 위해 일부러 한 말이 아님을 알았고, 그게 사실인 듯도 했기에 학생의 본분인 공부를 아주 열심히 했다. 좋은 성적을 거두고 선생님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3년을 보냈지만 이상하게도 예술을 가까이하며 살고 싶다는 욕심은 사그라들질 않았다. 예고를 가고 싶어 부모님께 이야기를 꺼냈을 때에도 엄마는 비슷한 말을 했다. 그동안 해온 게 아깝지도 않냐며 네 적성은 공부라내 한계를 한정 짓기도 했다. 결국은 예고 대신 외고에 갔다. 대학생이 되면 진짜로 노래를 해야지, 생각했지만 그때도 결국 용기가 없어서 취직을 하고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았다. 이제와 엄마를 탓하려는 게 아니다. 엄마는 나의 '먹고사는 일'을 걱정했을 것이다. 재능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결국 죽도 밥도 안 되는 삶을 살아갈지도 모르는 딸의 미래가 두려웠고, 내가 적당히 평범하면서도 적당히 나은 삶을 살아가기를 바랐을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먹고사는 일'보다 '내가 되는 일'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걸,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건 나의 무지이기도 했다. 나는 나를 몰랐다. 그저 다른 사람에게 칭찬을 듣는 게 좋아 그 사람들의 입맛에 맞춘 삶을 살았다. 누가 네가 가고픈 길은 어렵고 힘든 길이라고 말하면 나를 생각해주는 그 사람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가기 좋은 길을 걸었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삶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길이라는 것 까맣게 몰랐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는 견딜 수 없이 힘들었다. 이게 진짜 내가 원하는 인생이 맞나, 매일 밤 고민했다. '넌 돈도 많이 벌고, 직장도 안정적이고, 걱정할 게 없잖아' 하는 사람들의 말에 현혹되어 그렇게 좋은 조건의 삶을 살고 있는 내가 왜 불행한지에 대해 계속 고민했다. 만족하지 못하는 나의 성격이 우울의 근원이 아닐까 생각했고, 내 삶을 사랑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이상한 사람이라 몰아붙였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고민을 도대체 왜 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나도 아무렇지 않게 매일의 시간을 낭비하며 '돈을 주잖아'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심리가 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조금만 더, 한 달만, 며칠만 더, 하면서 몇 년이 흐른 뒤에야 알게 됐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결혼이 최적의 형태의 사랑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아닐 수 있듯이 회사 생활도 마찬가지였다. 누구에게나 맞지 않는 옷은 있었다.


나는 먹고사는 일이 보장된 삶을 원하지 않았으니 만족할 수 없는 게 당연했는데도 계속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괜찮아, 나름 좋은 인생이잖아? 스스로를 세뇌했다. 그러다 이슬아 작가 같이 자신이 하고픈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사랑으로 쓴 글을 보면 무너져 내렸다. 김소영 전 아나운서가 독립서점에 이어 스테이셔너리 사업에 뛰어든다는 포스팅을 발견했을 때도 그랬다. 내가 꿈꾸었으나 이루지 못한 삶을 가진 사람들이 부러웠다. 시기와 질투의 마음이 부끄럽지만 내 현실이 그랬다. 노력도 해보지 않고 우는 것이 창피했지만, 도전을 할 용기가 없는 내가 밉고 나를 미워하는 내가 더 미워서 울었다. 한 번, 도전이나 해볼 걸. 결국엔 다시 바로잡게 되더라도 후회는 남기지 말 걸. 울어도 소용이 없는 걸 알지만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다행인 건, 이번 슬럼프는 매번 울기만 하고 마음먹지 않았던 날들과는 달랐다. 긴 긴 후회 끝에 결심했다. 휴직하고 글을 써보자. 그 와중에도 퇴사까지는 지르지 못하는 내가 한심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기회가 있으니 한 번 해보자. 불가역적인 변화는 나중으로 미뤄두는 용기 없음을 개탄하는 대신 최선을 다해 써보자. 내게는 큰 변화였다


아침에 일어나 느긋하게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한가로운 날들이 좋다. 회사 일에 치여 어떤 것에도 깊게 골몰하지 못했을 때와는 달리 마주치는 많은 것들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 행복하다. 떠오르는 상념이 얼마나 많은지, 깊고 진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비슷한 성향의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쉴 새 없이 떠들고, 쓰고 싶다. 그렇게 계속 생각하고 쓰고, 또 생각하고 쓰다 보면 어느 순간 나도 이슬아 작가처럼, 내 앞에 나타나는 글감들을 사랑으로 품어낼 수 있지 않을까? 내 손 끝에서 튀어나오는 이야기들, 내 마음속에 남은 후회와 미련까지 전부 사랑으로 쓸 수 있지 않을까.


그녀가 글을 배우고 가르치며 남긴 기록 희망 삼아 오늘의 글을 쓴다. 회사 생활을 벗고 새로 골라 입은 옷이 내 몸에 잘 맞는 것 같으니, 이제 이 옷을 잘 길들여 언제 꺼내 입어도 편안하고 포근한 옷으로 만들어 갈 차례다. 이 옷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고, 내 삶을 사랑할 수 있길 바라며.







*문단 내 '-'로 표시된 부분은 모두 이슬아 작가의 <부지런한 사랑>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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