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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내 Nov 10. 2020

보리야, 꿈에서는 알프스에 사는 강아지가 되어 줘.

눈이 녹고 있다. 엄마가 청소를 한다고 창문을 열었는데, 눈이 녹은 자리에 새 순이 돋아나는 냄새가 바람을 타고 흘러 들어왔다. 나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봄이 오고 있다! 이불처럼 두툼한 눈밭을 뒹구는 것도 좋고, 차가운 바람이 코끝을 찡하게 만드는 것도 좋지만 그래도 봄은 반갑지. 산책을 나가기 한참 전부터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청소를 하는 엄마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공을 물어다 놓았다. 신난다, 신나! 엄마는 평소보다 훨씬 좋은 내 기분을 알아채고 슬쩍 창 밖을 바라보았다. 엄마도 봤죠? 들꽃이 고개를 내밀었죠? 봄이죠? 봄이 온 거죠?

엄마에게 붙들려 목줄을 매는 동안 나는 생각했다. 나가면 뭐부터 하지. 싱그러운 풀 냄새를 좀 맡고, 어딘가에 있을 축축한 흙도 좀 밟고. 새로운 꽃씨가 날아와 싹을 틔우지 않았나 확인해 봐야겠다. 또, 또! 이제 슬슬 알프스를 찾을 하이커들을 위해서 길을 닦기 시작해야지. 친구들에게도 말해줘야겠다. 봄이 오고 있다고! 아, 신나!


내 SNS 피드는 강아지로 도배되어 있다. 우리 보리와 같은 종인 귀여운 푸들들을 꽤 많이 팔로우하고 있고, 산과 들로 캠핑을 다니는 골든 리트리버의 계정을 즐겨 보고 있으며 뉴욕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 웰시 코기의 일상도 매일 같이 훔쳐보고 있다. 곱슬곱슬한 머리가 트레이드 마크인 유튜브 스타 푸들, 아궁이에서 고구마를 훔쳐 먹다가 얼굴에 검댕을 묻혀 유명해진 조그만 말티즈, 주인과 함께 아기를 공동육아 하고 있는 골든 두들 세 마리, 단풍국에서 머플러를 두르고 분위기 있는 겨울을 나는 리트리버 두 마리의 사진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찌푸리고 있던 얼굴의 긴장을 풀게 되고, 어깨를 짓누르던 스트레스가 스르르 사라진다. 손가락으로 슥슥 스크롤을 내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안정으로 충만하게 채워주고, 세상만사 모든 시름을 잠깐 지운 채 '짜증을 내어서 무엇하리' 하고 흥얼거릴 수 있게 해주는 '귀여움 테라피'의 압권은 스위스에 사는 자유로운 웨스티다.


하얗고 몽실몽실한 그 웨스티는 매일 알프스를 산책한다. 봄에는 푸릇푸릇한 풀밭에서 들꽃 냄새를 맡으며 뛰어다니고, 여름에는 만년설이 녹아 흐르는 시원한 계곡과 호수에 몸을 담그고 반신욕을 한다. 물이 얼마나 맑고 깨끗한지, 내가 다 발을 담그고 싶을 정도로 투명하게 반짝인다. 일찍이 추워지는 가을에는 어른어른한 노을을 배경 삼아 사색에 잠기고, 알프스가 가장 아름다운 겨울에는 눈밭을 뒹굴며 알프스에 사는 강아지라는 이점을 톡톡히 누린다. 빛나는 눈 위에 몸을 비비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눈 맺힌 털을 뽐내며 천천히 걷는 아이. 웨스티의 주인은 날씨가 궂어 도저히 산책을 나갈 수 없는 날 빼고는, 매일 하이킹을 즐기는 웨스티의 엉덩이를 동영상으로 중계한다. 도시견 보리라면 좋아서 미쳐 날뛸 게 분명한 풍광 앞에서, 알프스의 웨스티는 늘 걷는 길, 별다를 것도 없는 일상이라는 표정으로 산자락을 어슬렁거린다. 나는 심드렁한 그의 표정과 엉덩이를 바라보며 행복해하고, 동시에 보리에게 미안해한다.


사회 초년생 시절, 정말 철없었던 때에 친구들과 환생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인간으로 태어나, 심지어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아시아인으로 태어나 고통받는 것은 전생에 큰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둥 얼토당토않은 말을 하면서 깔깔거리고 있었는데, 강아지를 키우던 한 친구가 말했다. "나는 우리 연두를 보면 강아지의 인생이 지금 내 인생보다 훨씬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해. 아무것도 안 해도 예쁨 받고, 밥 얻어먹고. 잠만 자도 잘한다 하잖아. 분명히 나보다 연두가 전생에 착한 일을 훨씬 많이 했을 거야. 그래서 강아지로 태어날 수 있었던 거지." 이야기를 듣던 애견인 모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리 있지. 강아지가 아무것도 안 하는 건 아니고, 귀엽기 위해서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애쓰는 그들의 노력은 인정해줘야 마땅하지만 아무튼 '개 팔자가 상 팔자'라는 오래된 말처럼 거실 아무 데나 드러누워 늘어지게 낮잠을 잘 수 있는 보리의 인생이 내 인생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강아지가 살고 있는 환경도 다 다르잖아. 알프스에서 태어난 강아지, 선진 애견문화를 가진 도시에서 태어난 강아지, 센트럴파크처럼 맘껏 뛰어놀 수 있는 산책 코스를 가진 강아지, 마당 있는 집에 사는 강아지. 이런 강아지들은 전생에 보리보다도 더 많이 착한 일을 한 걸까. 전생에 나라라도 구나. 위인들은 모두 자연이 품은 도시에 사는 강아지로 환생했을까?


쓸데없는 대화를 나누고 집에 돌아오니 보리가 평소처럼 쪼르르 달려와 나를 맞아주었다. 현관 앞에서 1차로 귀가를 축하하는 파티를 하고, 신발을 벗고 들어가 거실 소파 위에서 2차 파티, 내 방까지 따라 들어와 침대에 올라앉은 보리 배에 얼굴을 비비며 신나게 3차 파티까지 마쳤는데, 이유 모를 슬픔이 찾아왔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 차올라서 까르르 웃고 있는 보리를 꼭 끌어안으며 등에 눈물을 조금 묻혔는데, 보리가 이상함을 알아챘는지 몸을 휙 뒤집어 나와 눈을 마주쳤다. 보리는 내 기분을 캐치하고 금새 동화되었다. 웃음기가 사라진 까맣고 고요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알았다. 그 슬픔의 본질은 내가 어떻게 해도 해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무력감이었다는 걸.


보리를 데리고 스위스로 여행을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천운 같은 기회가 온다면 스위스에서 보리와 몇 년 살아볼 수도 있겠지. 스위스까지 가지 않아도 도시를 떠나 시골 어딘가에서 매연 대신 신기한 냄새를 실컷 맡으며 살게 해 줄 수도 있다. 상상 속에서는.


엄마는 보리의 동네 친구인 말티즈 순심이가 가족들과 제주도 여행을 다녀와서 너무나 피곤한 나머지 식음을 전폐하고 며칠 내 잠만 잤다는 것을 듣고는 보리와 함께 여행하는 것을 격렬히 반대했다. 보리는 나이도 있고, 순심이보다 더 약하기 때문에 비행기는 더더욱 안 된다고 했다. 고기를 줘도 눈도 뜨지 못하고 헤롱헤롱, 잠에 취해 있었다는 순심이의 이야기는 엄마에게 강력한 선입견을 심어주었다. 제주도도 안 되는데, 유럽은 당연히 더더욱 안 됐다. 스위스에 1년쯤 살아보는 건 내 직업과 환경을 고려했을 때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지만 언제가 될지 알 수가 없는 먼 미래의 일이었다. 보리의 껌딱지인 엄마와 보리를 1년이나 떨어져 살게 한다는 건 엄마를 고통 속에 몰아넣는 일 같기도 했다. 가장 실현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시골로의 이주는 사실 가장 불가능한 일이었다. 가족 모두가 서울에 터전을 두고 직장을 다니고 있는데, 보리 간식 값은. 옷 값은. 껌 값은 누가 벌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시골에 내려가서 돈 벌 재주가 있어 뵈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우리 보리는 도시에 계속 살아야 한다는 말인데. 모르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그 현실이 슬프고 아팠다. 보리가 더 좋은 환경에서 지내게 해 줄 수 없는 내가 참 밉고 못나보였다.


그날부터 나는 자러 들어가는 보리를 붙잡고 보리에게 좋은 꿈을 꿔주기를 부탁했다. "보리야, 오늘 꿈에서는 알프스에 사는 강아지가 되어 줘. 실컷 뛰어놀고, 눈밭에 막 몸을 비비고 뒹굴고, 들꽃 냄새도 맡고 그러자." 보리에게 부탁하는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사실 하늘에 있는 누군가에게 빌었다. 우리 보리가 꿈에서는 더 행복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혹시 제가 부족했다면, 꿈에서는 완벽한 언니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저는 좋은 꿈을 꾸지 않아도 좋으니, 보리는 언제나 신나고 재미있는 꿈만을 꿀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잦은 기도였지만 그만큼 간절했다. 중얼중얼, 보리의 작은 몸을 그러안고 그날 꾸었으면 하는 꿈을 이야기하고, 사랑한다고 잘 자라고 속삭이고 나면 보리는 네 마음을 다 안다는 듯 몇 번 뽀뽀를 하고 쿨하게 뒤돌아 안방 문 안쪽의 어둠 속으로 총총 걸어 들어갔다. 뽀글거리는 털이 어둠 속으로 쑤욱 빨려 들어가고, 엄마의 이불을 파고 드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내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언니가 미안해, 도시를 떠날 수 없어서 언니와 가족들이 미안해. 너에게 더 좋은 것을 주지 못해서 정말로 미안해. 진짜로 하고 싶은 마음은 말하지 않고 꾹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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